“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절실히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27-32)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누가복음 5장 27-32절 말씀을 묵상할 때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절실히 필요한 것처럼(31절, 현대인의 성경)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32절)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21절)이신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24절).
(a)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붕을 뜯고 구멍을 뚫어 그 중풍병자를 침상째로 예수님 앞에 달아내린(18-19절, 현대인의 성경) “네 사람”(막2:3)들의 믿음을 보시고(눅5:20)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까(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고 생각하였던 것(21절)처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레위라는 세리가(27-28절)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자 많은 세리들과 그 밖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것(2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본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하고 비방하였습니다(30절).
(i) 이 두 성경 이야기를 비교하면 예수님 당시이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첫 번째 성경 이야기에선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니까 예수님은 신성 모독하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을 하였고, 두 번째 성경 이야기에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어째서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고 비방하였습니다[‘어째서 당신들의 선생(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오?’(마9:11)]. 즉, 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신성 모독하는 죄를 범한 죄인이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죄인들(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죄를 범한 죄인들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 호크마 주석의 글입니다: “'죄인들'을 나타내는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ῶν)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막 2:16).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이는 곧 율법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거룩하며 반면에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은 본래 죄인임을 의미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마 12:1;15:2)을 죄인으로 간주했다(K. H. Rengstorf, TDNT. I, 317-35). 특히 압제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는 죄인중의 죄인이요 극단적 경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경스러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계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을 범하는 행위였다”(호크마).
(ii)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30절) 죄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범했다고 비방한 것은 그 “세리와 죄인”들 중에 한 명이 그 큰 잔치를 베푼(29절) 레위 세리를 예수님이 부르신 것(27절)도 그들의 관점에서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n “세리”에 관한 호크마 주석의 글입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유대 고위층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이다. 이들 세리도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이고 (2) 이들이 동족들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잔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이다”(호크마).
(2) 여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는데 갑자기 제 카카오톡으로 어느 단체 카카오톡 방(단톡 방)에서 “남편이 어제 오후 일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치료 중입니다”라는 메시가가 떴습니다(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 26분에). 저는 이 글을 보고 놀랬습니다.
(a) 그 단톡 방에 있는 나머지 5명 자매,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그 자매의 글을 읽고 저는 우리 5명뿐만 아니라 49명이 있는 “서로를 위한 기도후원 방”이란 카카오톡 단체 방에다가도 그 자매의 허락을 받아서 함께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i) 그리고 나서 저는 그 6명의 단톡 방에다가 제 기도 문을 이렇게 써서 그 자매와 그리고 오늘 오전에 잠에서 깨서 우리의 대화 내용을 볼 나머지 4명의 지체들에게도 나눴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무척 사랑하시는 보배롭고 존귀한 딸 (그 자매의 이름)이가 지금 너무나 간절하게 남편을 위해 구하는 그 마음 심정을 아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_______이 남편, 뇌출혈을 온전히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지금 혈압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아시는 줄 믿사오니 하나님께서 의사선생님들 간호사들 다 주관하여 주셔서 혈압도 내려주시고 모든 뇌출혈을 깨끗하게 온전히 치료해주세요. 특히 이번 위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기회로 삼아주셔서 ______이 남편이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믿을 수 있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세요. 그래서 ________이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주님의 전에 올라가 감사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 날이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그랬더니 그 자매가 “아멘”하여 저도 “함께 아멘!”하였습니다.
· 그러던 와중에 생각난 말씀이 조금 전에 묵상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현대인의 성경)](눅5:31)하는 말씀입니다.
- 지금 그 자매의 남편에게는 뇌출혈을 치료해줄 수 있는 의사가 절실히 필요할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그 남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도 치유해주시사 구원해 주실 진정한 의사이신 예수님이 그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줄 믿습니다.
(3)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31-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저는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좀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여기서 “건강한 자”와 “의인”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자기 의’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였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행한 종교 예식은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 힘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없게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 여겼습니다[“의인”(눅5:32)].
(i)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 이 기도 내용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 여기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같은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멸시하고 있었기에 자기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b)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자기가 죄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간구한 것입니다(13절).
(i) 이 세리야 말로 예수님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31-32절에서 말씀하신 “병든 자”요 “죄인”입니다. 이 세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자기가 죄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간구한 것입니다(18:13). 이러한 자에게 예수님은 “의사”가 필요하고(5:31,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32절).
·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불러(27절) 회개시키려고 하신(32절) 이유는 레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의롭다하시고자, 그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는 레위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4)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31-32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전에 마가복음 2장 17절(“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과 마태복음 9장 12-13절(“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과 비교한 말씀 묵상 글들을 다시금 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a) “마가복음 2장 17절과 누가복음 5장 31-32절을 보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2-13절과 다른 점들이 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누가는 누가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but sinners to repentance)고 말씀한 것입니다(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없음).
(b)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긍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하는 것은 예배("제사")입니다(마9:13).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없는 예배요(삼상15: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긍휼"이 없는 예배입니다(마9:13). 긍휼이 없는 우리의 삶은 바리새인의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2절).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있습니다(갈5:4). 그러기에 우리는 "의사"이신 예수님이 쓸 데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마9:12). 그래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잡수"시는지(10절)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11절). 그 이유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믿고 있으며(눅18:11)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면서(14절)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우리 마음으로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절).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마9:10)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우리야 말로 예수님이 필요한 "병든 자"들입니다(12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병든 자"요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어야 합니다(12절).”
(i)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의를 추구하는 나의 본능적인 "이기심"(selfishness)은 오늘도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자랑(self-glory)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자아-숭배'(self-idolatry)를 원하는 욕구까지 들게 만들려고 합니다. 결국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교만함에 빠져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심지어 정죄하는 자리에까지 앉게 만들려고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빌2:3)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나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죄의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기 위하여 영적 거울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부지런히 제 자신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비춰볼 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제 양심을 찌르므로 제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많고 넓은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5:20). 그리할 때 저는 그 하나님의 크고 넓고 많은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에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 생각합니다(롬5:20; 눅7:47).”
(ii)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영적 우월감 속에서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을 잘 보고 마음 속으로 판단하며 비판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의 기준은 주님도 아니요 절대 진리인 성경 말씀도 아닙니다. 그 생각의 기준은 성경도 알지 못하므로 나의 오해함 속에서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마22:29; 막12:14). 이러한 잘못된 생각 속에서 그 사람이 혹시나 죄를 범하지 않나 엿보기까지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불의를 기뻐하고 있습니다(고전13:6).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마22:39). 이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것입니다(마7:3; 눅6:42). 이것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내 이웃을 책잡으려는 것입니다(눅20:20). 이것은 악인의 행동입니다(시37:32, 119:95; 잠24:15). 이러한 악한 행동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더 이상 상대방이 혹시나 죄를 범하지 않을까 엿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 상대방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주관적인 생각을 하지 삼가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 보자 나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고 빼야 합니다. 더 이상 율법적인 기준으로 상대방이 잘못하고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iii)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나 자신은 죄인인 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은 '죄인’인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신체적으로는 그 '죄인'과 함께 한 공간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그 '죄인'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나는 ‘저 사람이 지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혹시 죄를 범하지 않을까 엿보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진실을 왜곡하여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거짓을 미워하고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보다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복이 있는 진실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또한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엿보면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그 허물을 덮어주며 제 자신의 잘못을 수정해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이웃 사랑함에 있어서 차별과 거리를 두면서 죄를 범하기 보다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마음 속으로 이웃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긍휼이 여겨주시사 바리새인과 같은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나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