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카이로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누가복음 4:13)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먼저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4:13)하는 말씀을 다른 성경은 어떻게 번역을 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잠시 예수님을 떠나갔다”(현대인의 성경),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공동번역),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새 번역), “때가 될 때까지 예수에게서 떠나갔습니다”(우리말 성경), “더 좋은 기회를 노리려고 잠시 동안,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쉬운 성경),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카톨릭 성경),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그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그를 떠났다)(NASB).
(a) 그런 후 저는 “얼마 동안 떠니니라”(13절)을 원어 헬라어로 찾아보았습니다: “ὁ διάβολος ἀπέστη ἀπ’ αὐτοῦ ἄχρι καιροῦ”[the devil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마귀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그에게서 떠났다)].
(i) 여기서 “적절한 때”(an opportune time), 누가복음 4장 13절로 말하자면 “얼마 동안”이란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호크마는 두 견해를 언급하였습니다: (1)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눅4:13)의 기간을 누가복음 22장 3절까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즉, 누가복음 22장 3절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2) 그러나 브라운(Brown)은 사단이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합니다. 호크마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호크마).
· 그래서 저는 누가복음 4장 13절 이후로 “마귀”라는 단어나 “사탄”이란 단어가 어디에 나오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18절에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복음11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하고 말씀하신 것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콘첼만(Conzelmann)이 말한 것처럼 누가복음 22장 3절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마귀”라는 단어나 “사탄”이란 단어가 누가복음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얼마 동안”이란 콘첼만(Conzelmann)이 말한대로 누가복음 22장 3절까지라고 말한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물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18절에서와 11장 18절에서 “사탄”을 언급하셨지만 그 언급이 실제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가복음 22장 3절도 사탄이 예수님을 직접 유혹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명인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므로 결국에 가서는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주는 죄를 범하게 되므로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고 저는 브라운(Brown)이 말한대로 사단이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에 역사했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브라운의 주장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호크마가 말한대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브라운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n 한 마디로, 저는 콘첼만(Conzelmann)이나 브라운(Brown)의 견해 둘다 다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얼마 동안”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저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즉, 저는 아직도 “얼마 동안”인 언제까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브라운과 호크마의 견해로 말한다면 그 “얼마 동안”은 어쩌면 누가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탄이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하게 유혹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얼마 동안”(13절)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당하시고 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때 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 기간 동안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콘첼만의 견해대로 사탄이 표면적으로 역사한 것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것입니다(22:3).
(b) 제가 여기서 좀 생각하게 된 점은 “얼마 동안”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καιροῦ”(kairou)로서 우리가 흔히 들은 “카이로스”(Kairos)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i) 이 “카이로스”란 단어는 기독교에서 흘러가는 일반적인 시간[크로노스(xρόνος)]와 달리,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때, 즉 ‘하나님의 때’를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나는 순간이며,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이고 의미있는 시간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입니다(인터넷).
· 저는 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생각할 때 먼저 전도서 3장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개역한글). 여기서 솔로몬 왕은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말씀하면서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삶 가운데 역사(일)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아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Wiersbe).
-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적을 이루시므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울 때나 웃을 때나, 징계받을 때나 회복 받을 때나, 잠잠할 때나 말할 때나, 사랑할 때나 미워할 때에(2-8절)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뤄 나아가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이 모든 때 가운데 역사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 한 가지 더, 저는 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생각할 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여기서 “때와 시기”란 “주의 날”, 즉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날이 밤중에 도둑같이 온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여 밤에 자고 있을 때에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이름 같이 멸망이 그들에게 갑자기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멸망이 갑자기 이를 때에 어둠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은 결코 그 멸망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사 택하신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그들이 살아있던지 아니면 죽어있든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ii) 이렇게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얼마 동안”이란 헬라어 단어(“καιροῦ”)를 통해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를 묵상하다가 평생 처음으로 ‘사탄의 카이로스’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듯이, 사탄도 사탄의 카이로스에 자기의 계획과 뜻을 이루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한다고 생각합니다.
· 예를 들어,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즉, 선을 행하지 않고 있으면 죄가 당신 문에 웅크리고(crouching)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동생인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4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므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5절). 그것을 아시고 계셨던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면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master it)고 말씀하신 것입니다(7절). 죄가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가인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n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우인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8절). 결국 가인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그의 대적 마귀(벧전5:8)에게 져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다스림을 받음으로 결국 자기 친동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웅크리고 있었던 사자 같은 사단의 밥이 된 것입니다.
· 지금 사탄은 우리 문에 엎드려 있습니다. 마치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처럼 사단은 우리 마음 문에 엎드려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케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 사탄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지금 주님은 우리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십시다. 그러므로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의 힘으로 죄와 마귀 사탄과 싸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n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