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계속해서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장하길 기원합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마음이 굳세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누가복음 1:80)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여기서 “아이”(“아기”)는 사가랴 제사장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아들인 “요한”을 가리키며(눅1:13), 이 “아이” 요한이 “자라며”(80절)란 말씀은 그가 계속해서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참고: 호크마).
(a) 이 동일한 단어 “자라며”는 누가복음 2장 40절에 또 다시 나타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현대인의 성경) “아기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무럭무럭 자라나 튼튼해지고 지혜가 넘쳤다”]. 여기서 “아기”는 “그 아기 예수”님을 가리킵니다(27절).
(i) 이렇게 두 아기인 요한과 예수님은 계속해서 신체적으로 자라고(성장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 저는 이 두 아기처럼 저희 교회에 성도님들의 손주들도 계속해서 신체적으로 무럭무럭 잘 자라나길(성장하길) 기원합니다.
(2) “아이” 요한은 신체적으로 “무럭무럭”(1:80, 현대인의 성경) 계속해서 잘 자라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령이 강하여지며”(80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아기” 예수님은 “강하여지고”(2:40)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음].
(a) 여기서 “강하여지며”라는 헬라어 단어 “ἐκραταιοῦτο”는 수동태(passive)로서 “강하게 되다(be made strong), “힘이 더하다”(to increase in strength), “강하게 자라다”(to grow strong)이란 의미입니다(인터넷).
(i) 즉, 하나님께서 요한의 “심령”(spirit)을 강하게 하셨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 그 목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직분에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그를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호크마).
(b)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 제일 사랑하시는 저희 부부의 딸 예리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리가 많이 힘들어 했었을 때 저의 “간구함”을 들으시고(참고: 1:13) 주신 약속의 말씀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And the God of all grace, who called you to his eternal glory in Christ,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will himself restore you and make you strong, firm and steadfast”).
(i) 진실하시고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 신실하게 예리의 마음과 삶 속에 역사(일)하시사 특히 일본에 2년 동안 선교를 하면서 그녀를 더욱더 굳건하며 강하게 하셨고 그녀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음을 저희 부부는 믿음의 눈으로 지금도 엿보게 하고 계십니다.
· 저의 기원은 주님께서 예리를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녀의 심령이 더욱더 강하여 지는 것과 더불어 저의 바램은 그녀가 신체적으로 건강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이 기원은 사랑하는 첫째 아들 딜런과 제시카 부부와 더불어 막내 딸 예은이도 마차가지 임).
(3) 이 “아이”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었다[(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눅1:80)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빈 들”(“광야”)은 헬라어로 “ἐρήμοις”인데 본래, 경작되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또는 황량한(버려진) 지역이며 비유적으로는 메마르고 외로운 곳이지만 동시에 필요한 고요함(방해받지 않는 자유)을 제공하는 장소를 가리킵니다(인터넷).
(a) 흥미로운 점은 성경에서 “광야”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히 임재하시고 공급하시는 곳이기도 하며, 무한하신 주님은 인생의 “제한된”(어려운) 광야와 같은 곳에서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인터넷).
(i) 그 좋은 예가 바로 출애굽 당시의 광야라 생각합니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건을 통해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셨는데 그 사건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사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신8:2-3)(참고: 인터넷).
·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고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가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광야만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신8:3).
-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즐기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이 살고 또한 소성케 돼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의 넘치는 생수의 강을 체험해야 합니다(요7:38). 우리는 광야에서 성령 충만해져야 합니다.
(b)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면서 “주의 길을 준비”하기 전까지(마3:1-3) 광야에서 살았는데(눅1:80, 현대인의 성경) 아마도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처럼(모세, 엘리야 등) 요한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참고: 호크마).
(i) 우리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nothingness) 주님이 모든 것(Everything)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어야 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3: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사역자들임(5절)을 알고 우리 각자 심는 자는 심고 물을 주는 자는 물을 줘야합니다(6절)
-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나라게 하실 것입니다(6-7절).
(c)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한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마3:3)가 되었습니다.
(i)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으로서 주님의 재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을 우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요1:6, 7, 23, 현대인의 성경).
· 저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고 싶습니다(마3:3). 저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으니라”(2절)고 전파하고 싶습니다. 저는 세례 요한처럼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 역사가 있길 기원합니다(5-6절). 저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싶습니다(3절).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첩경을 평탄게 하길 원합니다(3절). 주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로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소리가 되고 싶습니다.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