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때”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
“그때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겠다고 제안하자 그들은 듣고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다”(마가복음 14:10-11,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오늘은 한 가지만 좀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그 때”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왜 하필히면 가룟 유다는 “그 때”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겠다고 제안했을까 라는 의문이 좀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볼 때 그 타이밍이 좀 안 맞는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a) 그 타이밍이란 마리아가 아주 값진 향유 약 300그램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을 때(요한복음12:3,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향유를 낭비하시오? 이 향유를 팔면 300 데나리온도 더 받을 텐데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하며 마리아를 호되게 꾸짖은(마가복음14:4-5, 현대인의 성경) 제자들에게 “…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했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6-9절,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신 후 “그 때”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i) 흥미로운 대조는, 마리아는 가룟 유다의 말대로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요한복음12:4-5,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예수님의 몸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반면에(마가복음14:8, 현대인의 성경)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겨주면 얼마나 주겠소?”하고 묻자 그들은 은화 30개를 세우 주었다(마태복음26:14-15, 현대인의 성경)는 것입니다.
· 여기서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며 현재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5천만원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인터넷). 반면에 은화 30개는 그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으로서(인터넷) 오늘날 금액으로 하면 1,200-2,00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인터넷).
-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있는 돈을 자주 훔쳐내는 도둑이었던(요한복음12:6, 현대인의 성경)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부은 아주 값진 나아드 향유 약 300그램(3절, 현대인의 성경)의 가격인 300 데나리온(5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은화 30개라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만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마태복음26:15-16, 현대인의 성경).
n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ii)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 대해서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마가복음14:9,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자”(마태복음10:4; 마가복음3:19)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묵상할 때 우리가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13:2)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마귀가 얼마나 우리를 공격하여 별의별 안 좋은 생각들을 넣는지 참으로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제가 “생각의 영역에서의 싸움”이란 제목 아래 이러한 나눔의 글을 썼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상상의 날개를 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생각의 영역에서 무익한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 또한 저는 “생각 영역에서의 영적 싸움”이란 제목 아래 이러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썼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있습니다(렘6:19).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고 있습니다(16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19절).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10절). 우리는 하나님의 경책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0절). 오히려 우리는 거짓 목사(선지자)의 "평강하다, 평강하다"라는 말 듣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14절).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서는 마치 샘이 그 물을 솟쳐냄 같이 악을 발하고 있습니다(7절). 탐욕의 생각들과 거짓된 생각들(13절)과 같은 악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있습니다(15절). 그 결과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고 있습니다(21절). 우리는 재앙을 만나고 있습니다(19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8절). 우리는 하나님의 경책을 들어야 합니다(10절).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탐욕과 거짓을 다 버려야 합니다(13절).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 가증한 일들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15절). 그리고 우리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해야 합니다(16절). 그리할 때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강을 얻을 것입니다(16절).
- 또한 저는 “가장 교활한 사탄이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 들게하는 의문들과 말들”이란 제목 아래 이러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썼었습니다: “가장 교활한 사탄이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 들게하는 의문들과 말들을 우리는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창세기 3:1-5,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 묵상해야 합니다(시편 1:2,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사탄이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 들게하는 의문들이나 말들을 분별하여 믿음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에도 질서가 있어야”한다는 제목 아래 이러한 짧은 글도 썼었습니다: “지난 날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 나는 내 자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대로 상상의 날개를 피면서 무질서하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면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염려하면서 쓸데없이 괜한 생각들을 많이 한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생각들을 무질서해지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생각들로 하여금 내 생각의 영역을 지배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내 생각의 영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못했고 또한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질서있게 생각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나는 믿음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내가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말씀들을 하신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그 말씀들이 내 생각의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므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 걱정 염려하는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결과 나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는 내가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한 믿음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사 나를 건져주신 것이다. 나는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말씀 충만, 성령충만함을 구해야겠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으로 하여금 내 생각을 지배하게 만들어 무질서하게 생각의 날개를 피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또한 그 말씀의 경계선을 넘어 생각하지 않도록 힘써야 겠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무질서하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잠언 29장 18절, 현대인의 성경).”
(2) 저는 “그 때”를 생각할 때 몇 가지 말씀 묵상한 글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a) 제목: “그 때 그 닭의 울음 소시를 잊을 수 있었을까?” “그 때 그 닭의 울음 소리를 잊을 수 있었을까? 그 때 베드로는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하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한없이 울었었는데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었을까? 분명히 자기 입으로 예수님께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했던 자인데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으니 어떻게 그 때 그 닭의 울음 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마태복음 26:33-34, 56, 75, 현대인의 성경).
(b) 제목: “그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갈망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으로 인하여 충분히 낙망할 수 있습니다(욥기 23:2-3, 8-9). 그 때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왜 이러한 재앙을 혹독하게 겪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다 알고 계신다”라는 진리입니다(10절 상반절).”
(c) 제목: “그 때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관한 일을 전해 들은 에스더는 크게 근심하며 모르드개에게 갈아 입을 옷을 보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에스더4: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크게 근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큰 근심이 우리 마음을 너무나 괴롭게 하면 우리의 영혼은 어느 누구의 위로도 거절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의 근거는 시편 77편 2절 말씀입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In the day of my trouble I sought the Lord; In the night my hand was stretched out without weariness; My soul refused to be comforted”(NASB)].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d) 제목: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덕분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법정에 넘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우리 식구가 우리를 대적하고 고발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님이 우리가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정에서도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참고: 마태복음 10:17-22, 현대인의 성경).”
(e) 제목: “그 때 우리는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신랑되신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그분의 아내로 삼으시사 우리에게 신의와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고 진실함으로 우리를 맞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것입니다(참고: 호세아 2:19-20,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