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사두개인들)의 질문(마가복음12:18-23)에 대답을 하신 예수님의 가르치심(24-27절)을 들은 군중들은 감탄하였고(마태복음22:33, 현대인의 성경) 율법학자(서기관) 몇 사람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말하자 그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더 이상 묻지 못하였습니다(누가복음20:39-40, 현대인의 성경). 바리새파 사람들(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는 말을 듣고 다 함께 모였습니다(마태복음22:34, 현대인의 성경). 그들 중에 곁에서 듣고 있던 한 율법학자(율법사)가 예수님이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 모세의 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어라. 우리 주 하나님은 단 한 분 밖에 없는 주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가복음12:28-31; 마태복음22:35-40, 현대인의 성경). 저는 오늘 예수님의 답변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1) 한 율법학자(서기관)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어느 계명입니까?”(마가복음12:28, 현대인의 성경[“모세의 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마태복음22:36, 현대인의성경)]하고 질문을 던졌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마가복음)이란 말과 “가장 큰 계명”(마태복음)이란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유대인들은 계명들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들로 구별했던 것은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의 정신에서 그리하였습니다(호크마).
(a)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더 무거운 것과 가벼운 법령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견지에서 이 서기관은 이 모든 율법 주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호크마).
(2) 예수님의 답변 말씀(마가복음12:29-31)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말씀하셨는데 그 계명이란 유일하신 주 곧 우리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29-30절)과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31절)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는 이유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호크마).
(a) 여기서 “우리 주 하나님은 단 한 분 밖에 없는 주이시다”(29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신명기 6장 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단 한 분 밖에 없는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0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b) 이 신명기 6장 4-5절 말씀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 “쉐마”[“들으라”(4절)]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습니다(호크마). 특히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첫번째 계명부터 네번째 계명인 하나님께 대한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입니다.
(i) 우리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마가복음12:30; 신명기6:5)에서 “마음”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요 “목숨”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며, 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뜻”은 지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하여”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라는 말입니다. 전 인격을 기울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Tasker), 전 생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호크마).
·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이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요한일서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3:43)(호크마).
(c)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마태복음15:1-9). 더욱이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습니다(5:43-47).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개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요한일서 4장 20, 2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예수님에게서 받았습니다”].
(i) 우리 자신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보이는 우리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요 그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즉,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 새 찬송가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2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저는 이 찬송을 하나님께 부르면서 제 기도 제목으로 삼고 마음 속으로 온전한 사랑(미움 등이 섞이지 않는 순전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길 기원했고 지금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이웃을 그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