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의 으뜸인 제임스 내 영혼아, 어째서 네가 낙심하며 어째서 내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갈릴리를 지나가게 되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거의 전념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9:30-31,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깨닫기는커녕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31-32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오는 도중에 서로 논쟁한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누가 가장 위대하냐(크냐) 하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였습니다(잠잠하였습니다)(33-34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앉으신 후 열 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누구든지 으뜸(첫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섬기는 자)이 되어야 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 어린 아이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35-37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대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거의 전념하시되 자기가 사람의 손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가복음9:31,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 즉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에 있어서 가르치는 사역에 전심 전력을 하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즉 복음을 전하는데 일에 더욱더 전념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깨닫기는커녕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31-32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어쩌면 그 이유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했기[“큰 슬픔에 잠”겨 있었기(현대인의 성경)] 때문이요(마태복음17:23)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이 숨겨져”있었기 때문(누가복음9:45, 현대인의 성경)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즉 복음)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그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 가르치심에 대해 예수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던 이유는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매우 근심했기 때문(큰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소망보다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소망 없는 사람들과 같이 성도의 죽음을 슬퍼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소중하게 보시는데(시편116:15,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죽음을 보지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4:14,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그들은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를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눈깜짝할 사이에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사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는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고린도전서15:52-53, 현대인의 성경).
(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오는 도중에 서로 논쟁한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누가 가장 위대하냐(크냐) 하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잠잠하였다)(마가복음 9:33-34,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가르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누가 가장 위대하냐”(현대인의 성경)]하고 다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복음)을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 와중에(적어도 머리로라도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위대하냐)?”하고 다툴 수 있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교회를 보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즉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회인 우리는 ‘서로 누가 더 크냐 혹은 더 높냐?’하고 마음 속으로 우쭐대면서 교회 장로나 권사가 되려고 얼마나 애쓰고 속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마치 교회의 직분이 상품화되어 계급주의적인 생각으로 가득차서 교인에서 서리 집사에서 안수 집사에서 장로가 되는 길이 마치 세상적인 성공의 사닥다리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나이가 그 정도 되었으면 다들 장로가 되야 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나요? 주님 보시기에 지금 교회인 우리가 너무나 교만한 것 아닐까요?
(4)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첫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섬기는 자)이 되어야 한다”(마가복음9:35,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제 자신의 이름인 “지원”의 뜻이 생각났습니다: “지혜 ‘지’자, 으뜸 ‘원’자. 즉, 저의 이름의 뜻은 ‘지혜의 으뜸’인데 주님께서는 약 21년전 저를 한국 서현교회에서 미국 승리장로교회로 인도하셔서 담임 목회를 하게 하시면서부터 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지를 자꾸만 그리고 계속해서 들춰내셨습니다. 즉, 저는 특별히 그 때부터 제가 ‘미련의 으뜸’이라는 사실과 현실을 깨닫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너무나 낙심되어서 갈급한 마음으로 매주 수요예배 때마다 성경의 “지혜의 책”을 묵상하고 설교하기 시작했었습니다. 특히 저는 잠언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했었을 때 성령님께서 저의 미련함을 더욱더 들춰내셨습니다. 그 때부터 성령님께서 저로 하여금 붙잡고 기도케하신 말씀이 바로 야고보서 1장 5절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꾸짖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있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가복음 9장 3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모든 사람의 끝” 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으뜸”이 아니 “끝”, 섬김을 받는 ‘상전’이 아니 섬기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 교훈을 묵상할 때 제가 “끝”이 되기 위해선 제 자신의 “끝”인 ‘죽음’도 당연히 묵상하면 도움이 되겠지만 이땅에서의 예수님의 “끝”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할 때서야만이 제 자신이 “모든 사람의 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주님의 “종”인 제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5)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교만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 어린 아이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마가복음9:36-37,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이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이 그 사람들(어린 아이들의 부모들?)을 꾸짖었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마가복음 10:13, 현대인의 성경). 아니, 마가복음 9장 36-37절에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앉으시면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라는 말씀을 받은 그들이 어떻게 그 다음 장인 마가복음 10장 13절에서 그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린 아이들을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을 수 있나요? 어떻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리도 속히 어기고 불순종하였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저의 경우는 주일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 교회 목양실에 들어가서 곧장 그 말씀의 불순종한 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시편 42편 5, 11절과 43편 5절 말씀을 제 자신의 영혼에게 선포하며 이렇게 기원케 하셨고 지금도 그리하고 계십니다: ‘제임스 내 영혼아, 어째서 네가 낙심하며 어째서 내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