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질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여라."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제 어린 딸이 죽어 갑니다. 제발 오셔서 손을 얹어 살려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가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가며 밀어닥쳤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앓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는라고 무척 고생하였고 있던 재산도 다 허비하였으나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병만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 틈에 끼어 가다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데 그 순간 즉시 피가 멎었고 그녀는 병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곧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보시며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하고 물으셨고 또한 누가 옷을 만졌는지 알아보시려고 둘러보셨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사실대로 말하였고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질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여라”(마가복음 5:22-3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생각이 듭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간 이유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어가고 있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또는 자신도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질병을 고쳐주시길 (예를 들어,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앓던 한 여자처럼) 원해서 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도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앓던 그 여자는 재산이 어느 정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12년 동안이나 자기 병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결과는 그녀가 그리도 간절히 바라는 데로 자기 병이 나아지기는 커녕 고생은 고생대로 무척 하고 재산도 다 허비하고 오히려 자기 병만 더 악화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그녀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하며 자포자기 하게 만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지금도 자기 병이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리도 고생을 많이 하는데도 자기 병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병만 더 악화되어가므로 무척이나 실망하고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시편 42장 5, 11절과 43장 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3) 그 여자가 들은 “예수님의 소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녀가 들은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다는 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군중 틈에 끼어 예수님을 뒤따라가다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의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 순간 그녀의 피가 즉시 멎었고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질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여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녀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그녀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져야 합니다. 새 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3절 가사입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봤도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4) 이 예수님이 입으신 옷을 묵상할 때 요한복음 19장 23-2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은 그의 옷을 가져다 네 조각으로 나눠 각각 하나씩 가졌다. 그러나 속옷은 이어 붙이지 않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어서 군인들은 '이것을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하자' 하고 서로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내 겉옷을 서로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군인들이 이런 짓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인터넷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옷은 그대로 돈이었습니다. 직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한 올 한 올 짜야 합니다. 그래서 옷은 너무나 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아침 9시 정도까지 계속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옷은 찢겨지고 피가 낭자하게 묻었습니다. 그래서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병정은 네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수입이 생겼다고 좋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긴 후에 나누어 가지면 술값정도는 나올 것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겨서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한 깃씩 가졌다고 한 것을 보면 네 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옷 조각도 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피가 묻었어도 빨면 됩니다. 지금 성경 학자들은 네 조각으로 예수님의 나눈 것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복음이 퍼져 나갈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벗기고 나서 속옷을 벗기려고 할 때 로마 병정들은 놀랐습니다. 속옷은 보통 옷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원문에는 <키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톤이라는 말은 놀라운 단어입니다. 직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이지만 모두 한 조각입니다. 한 통으로 짠 옷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23) 이런 옷은 보통 사람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제사장들만이 특별히 입는 옷입니다. …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는 요세프스입니다. 요세프스는 이 옷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었다고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성경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너무나 비싼 옷이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 채로 한 사람이 가져야 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흔히 겉옷이 비쌉니다. 속옷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겉옷을 잘라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속옷은 나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키톤 이 옷을 입고 계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옷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 가요?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키톤 제사장 옷을 입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텍스라고 합니다. 폰티텍스라는 말은 <다리는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 그래서 로마 병정들이 이 옷을 나눌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와 사람들이 있는 성소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제사장 옷을 입고 죽으셨습니다”(인터넷).

(5)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사실대로 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그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질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여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묵상할 때 저는 질병으로 수년동안 고생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에게도 이 말씀을 해주시사 그들이 질병해서 해방되어 건강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갑니다 …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갑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 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갑니다”(새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1절과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