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으심을 전하면서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마가복음 2:18-20,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에 대한 호크마 주석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였던 이유는 그들의 선생인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참 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을 추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을 하였던 이유는 자기들의 경건과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오직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금식한 이유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그들 모두는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6-27절 새번역 말씀입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2)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은(삼상 31:13; 삼하12:11 - 23; 눅 5:35).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경사스런 행사였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그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신 20: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가 없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2:19,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하셨고 “신랑과 함께 있는” “신랑의 친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및 예수님과 함께 천국의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구속받은 성도들인 저와 여러분들, 즉 신부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신랑되신 주님께서는 신부된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에베소서5:27,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19:9, 새번역).  신부된 교회인 우리는 이 천국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6).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수고와 슬픔뿐”인 신속히 가는 이 세상(시편90:10)에서 이런 저런 문제를 놓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에스라8:23, 현대인의 성경).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금식하고 울고 애통하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참고: 요엘2:12,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압박의 사슬을 풀어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며 억압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이사야58:6,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금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짓는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복음6:16, 현대인의 성경).

(3)   예수님께서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는데(마가복음 2:20,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빼앗길”이란 원어 헬라어의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제거하다'로서 어떤 고통스럽고 미어지는 듯한 이별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  이는 슬픔을 유발시키는 억지에 의한 빼앗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시초부터 그의 죽음에 직면했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3년간의 모습은 바로 그들 제자들이 지니는 기쁨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자신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수의 사역은 모든 죽어 있는 종교와 심령들에게 새로운 진실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한다.”  어제 주일 성찬식 때 읽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시고 공생애 3년 동안 사역을 하셨고 사도 바울도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전하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으심을 전하면서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