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우리의 “괴로움의 골짜기"를 “찬송의 골짜기”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시자 거기 앉아 있던 몇몇 율법학자들(“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구를 들고 걸어가라”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봉 주겠다”하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중풍병자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가복음 2:5-12,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생각이 듭니다:
(1) 왜 몇몇 율법학자들(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1절, 현대인의 성경)에 앉아 있었던 것일까요? (6절, 현대인의 성경) 설마 그들도 예수님께서 전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2절, 현대인의 성경)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호크마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예리한 칼날같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호크마).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이 해석을 제 자신에게 반영해보면, 저도 율법학자들(서기관들)처럼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겸손히 들으려고하기 보다 그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책잡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예리한 성령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기를 원하기보다 오히려 제 마음이 예리한 칼날같이 그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점검하며 자꾸만 잘못된 점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 같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2) 그 몇몇 율법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었습니다(신성모독죄).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심(요한복음 10:30),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해 두지만 앞으로 내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큰 소리로 “저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는가! 여러분도 저 사람의 모독적인 말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자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모두 외쳤습니다(마가복음 26:63-66, 현대인의 성경). 그 대제사장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모여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모든 외친 이유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신성모독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외친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불신앙은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사형받아야 마땅한 죄인으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불신앙은 상대방에 대해 책잡기 위하여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상대방을 죄인으로 여기 마음속으로라도 정죄하게 만듭니다.
(3)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39편 1-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를 살피셨으니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일하고 쉬는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나의 모든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다 아십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우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시되 그 수를 헤아린다면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습니다(참고: 17-18절, 현대인의 성경).
(4)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들에게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시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누가복음6:3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11:4)은 특권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 나갔습니다.” 죄를 용서하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병까지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그러신 후에 예수님의 그의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그 중풍병자의 병의 원인이 그의 죄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의 원인인 죄를 먼저 용서해주신 후 그의 병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6) 그 집에 문 앞까지 꽉 차서 발 늘여놓을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는데(마가복음 2:1-2, 현대인의 성경) 그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곧 일어나 그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서 집을 나갔으니 이것을 보고 어찌 그 모든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12절, 현대인의 성경)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건짐으로 그 감옥에서 나와서 자유의 몸이 된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사도행전 16:23-25).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일부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유다를 침락하였을 때 백성들과 의논한 후에 찬양대를 조직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그들을 진군하는 부대 선두에 세워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하고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찬양대가 찬송을 부르자 하나님께서는 침략군들에게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끼리 서로 치게(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들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 그 곳 이름이 “찬송의 골짜기”로 불려졌습니다(역대하 20:1-2, 21, 26,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 우리의 “아골 골짜기”(괴로움의 골짜기)(여호수아7:26, 현대인의 성경)를 “찬송의 골짜기”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