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이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이 믿음으로 간구하고 있는 

사랑하는 투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집 문 앞까지 꽉 차서 발 들여놓을 틈도 업을 정도로 집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을 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왔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2:2-5,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가지 생각이 듭니다: (1)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께 온 그 네 사람을 생각할 때 제 잠든 사촌 여동생 수정이가 살아생전에 암 투병하면서 저에게 말한 내용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 내용이란 제 기억으로는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이었습니다.  여기서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이란 의미는 ‘태어난 코끼리를 둘러싸고 출산 과정에서 포식자와 싸우는 코끼리들처럼, 위기 상황에서 즉시 기도로 나를 둘러싸는 기도하는 믿는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 모두를 습격하는 영적 전쟁에서 보호를 제공합니다’(“Like the elephants that surround a birthing elephant and fight off predators during the birth process, praying believers who immediately surround you in prayer during a crisis provide protection in the spiritual warfare that ambushes us all at times”)(인터넷).  우리 수정이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축복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한 중풍병자에게 네 사람들(친구들)이란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 네 사람들처럼 암투병하고 있는 식구나 친구나 주님 안에서 형제나 자매나 또한 전도 대상자에게 “그 코끼리들”이 되어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친구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길 기원합니다(참고: 로마서 5:8, 현대인의 성경).  (2) 그 네 사람은 그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그 집에 너무 많아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렸다는 사실을 호크마 주석의 해석을 읽으면서 좀 더 생생하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4명의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즉 바깥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내렸다.  한편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이다.  그리고 바깥은 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다(2:1 - 28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고(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막 드러난 들보(the now exposed beams) 안으로 그 환자를 달아 내렸을 것이다”(호크마).  그리할 때 저는 그 네 사람의 헌신적인 최선의 노력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저는 그들의 마음이 사랑하는 그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러한 마음은 사랑하는 수정이를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간절히 간구한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 형제들과 자매들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그 네 사람들이 남의 집의 지붕을 뜯어서라도 그 한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을 때에는 그 지붕을 고치는 값도 당연히 그 집 주인에게 지불할 마음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정이를 위해 기도해준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은 수정이와 그녀의 남편과 다섯 명의 자녀들에게 값을 지불하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참 감사하지요.  (3) 예수님은 그 네 명의 헌신적인 최선의 노력을 보셨고 아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가복음 2:5, 현대인의 성경).  그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우리에게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당장 입을 옷이 없고 끼니를 때울 양식이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평안히 가십시오. 몸을 따뜻하게 하십시오.  배불리 먹으십시오.' 하고 실제로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4-17절, 현대인의 성경).  제 생각엔 예수님께서는 그 한 중풍병자를 위해 지붕까지 뜯어서 그가 누워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그 네 사람들을 보셨을 때 그들의 행함에 살아있는 믿음을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가복음 2:5,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그 네 사람이 제일 첫번째로 듣고 싶었던 말씀이 아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일어나 네 침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9절, 현대인의 성경)을 제일 먼저 듣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암 투병중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암을 치유해 주시길 제일 간절히 기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의 입장에서는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 이 전에 우리의 죄를 용서(죄사함)하시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후 그에게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곧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 나갔”습니다(11-1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네 사람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지붕으로 들것에 누워서(실려서) 집에 들어왔었던 그 중풍병자는 결국 자기의 두 발로 걸어가 그 집을 나간 것입니다. 하하.  이렇게 죄사함과 치유를 받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이 “The Elephants”(그 코끼리들)이 믿음으로 간구하고 있는 사랑하는 투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