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골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비록 이 세상은
"아골 골짜기"(괴로움의 골짜기)(수7:26)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23:4)라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는 하나님(호2:15)이시요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롬12:12).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
독자 이삭도 하나님에게 아끼지 않았던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창 22:12; 롬 8:32).
아내
어진 여인(잠12:4), 슬기로운 여인(19:14), "현숙한 여인"(31:10)을
아내로 얻은 자는 하나님께 은총(복)을 받은 자입니다(18:22).
그러나 "욕을 끼치는 여인"(12:4), 남편과 다투기를 잘 하는 여인(21:9, 19; 25:24)을
아내로 둔 남편은 ...
아내를 잘 모르는 남편?
남편 엘가나,
그는 자기 아내 한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했지만
자기가 한나를 사랑하므로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한 것을 전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왜 울며 왜 식사를 안 하며
왜 마음이 슬픈지 몰랐습니다
(삼상 1:2-8).
아름다운 옷과 정결한 관
주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우리의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셨으니
이젠 우리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정결한 관을 우리에게 씌우실 것입니다(슥 3:4-5).
아무리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은
"좋은 계략"이라 할지라도 ...
아무리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은 "좋은 계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좋은 계략을 좌절시키기로 작정하셨다면 그 계략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삼하 16:23; 17:14,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인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를 들으시사
압살롬에게 재난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좌절시키셨습니다
(17:14, 현대인의 성경).
아무리 아름답다 또는 미남자라고 해도 ...
아무리 아름답다 또는 미남자라고 해도(삼하14:25)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꾸민 모든 일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저 따라오게만 하는 "압살롬"과 같은 사람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15:6, 11).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어제 저녁에 성경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다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신 후 “…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수8:2). 그 은혜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왜 하나님께서는 아이 성에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는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하신 것일까요?(6:17)
다시 말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성에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둬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여리고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받치고 나서
그 다음 아이 성에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가지길 원하셨던 것을 보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길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경험하길 기원합니다.
아시고 또한 알게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고,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습니다(삼하 7:20, 21).
아이 성 사람들이 잘못한 것 두 가지?
여호수아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이 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아이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 정예병의 유인 작전(수 8;6, 16)에 넘어가서 패한 것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된 아이 성 사람들이 잘못한 점 두 가지:
첫 번째로 잘못한 점:
아이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16절)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는(15절) 이스라엘을 따라간 것(17절).
아니 어떻게 모든 백성이 다 이스라엘을 따라갑니까?
성읍을 지킬 사람들을 남겨뒀어야 하지 않았나요?
두 번째로 잘못한 점: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17절).
아니 어떻게 성문을 열어 놓을 수가 있나요?
어느 군대가 성문을 열고 적군을 추격함에 있어서 성문을 열어 놓나요?
저는 이 두 가지 아이 성 사람들이 잘못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적인 사탄의 유인 작전 또는 유인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사탄과 이 죄악 된 세상과 죄와 나 자신(옛 사람)과의 영적 싸움에서 적을 물리치는 데에만 모든 초점을 맞출게 아니라 동시에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는데도 균형 있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 우리는 사탄과 그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무방비 영적 상태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주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예은이,
주님의 말씀도 아직 그녀에게 나타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주님께서 그녀를 부르실 때
예은이가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삼상 3:7-9).
아직도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혹시 지금 나는 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에 매우 분노하여
아직도 내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욘 3:10-4:5)
아직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교인들 ...
아직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교인들 가운데는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고전 3:3, 현대인의 성경).
아첨하는 사탄
우리가 환난과 역경 중에 있을 때
사탄은 마치 개가 꼬리를 치듯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타협하여
편한 길로 가도록 아첨합니다(박윤선)(살전 3:3).
악인과 의인
악인의 수입은 오히려 그/녀에게 형벌이 됩니다(잠 10:16하).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10:3).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 성도들을
결코 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
것이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우리가 환난과 궁핍함 속에서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사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은 ...
악인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는 증거요,
악인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그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잠28:4).
악인의 죄
악인의 죄는
악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시36:1, 4).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 악인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정녕히 우리의 장래가 있겠고
우리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잠23:17-18; 24:1).
악행으로 인한 궁핍함은 ...
악행으로 인한 궁핍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며,
부르짖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
- 두려워하지 말라
- 우리의 불순종 ... 입니다(삿 6:1-10).
알고 짓는 죄와 알고 행하는 순종
바벨론의 벨사살 왕,
그는 자기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마음을 높이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왕위를 폐하시고 그 영광을 뺏으신 것(단5:20)을 "알고도"(22절)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22-23절).
그 결과 그는 함께 술을 마시던 일천 명이나 되는 귀인들 앞에서(1절) 높임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 죽임을 당합니다(30절).
바벨론의 총리 다니엘,
그는 국사에 대하여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한 다른 두 총리들과 방백들이(6:4)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고자(5절) 바벨론 왕 다리오로 하여금 한 율법을 세우게 만들되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7절)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식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10절).
그 결과 그는 사자 굴에 던져 넣은바 되었지만(16절)
그가 의뢰하는 하나님으로부터(23절) 구원을 받습니다(27절).
베사살은 알고도 스스로 높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다니엘은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알고 짓는 죄와 알고 행하는 순종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알고도 단속하지 아니하면 …
우리에게는 나쁜(죄악 된) 습관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경고하십니다(출 21:29).
우리는 그 경고를 받아 우리 자신은 단속해야 합니다.
알고도 단속하시 아니하면 ... (36절)
약을 행한 다윗 왕과 아합 왕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다윗 왕(삼하11:27)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이 목욕을 하는"것을 보므로(2절)],
그는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아(12:4, 9-10)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11:27).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사 다윗 왕을 책망하셨을 때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복하므로
죄 사함을 받아 죽지는 않게 되었지만 다윗이 낳은 아이는 죽었습니다(12:13-14, 18).
다윗 왕은 "나이가 많아 늙"어(왕상1:1;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었습니다(2:10).
자기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아합 왕(왕상21:20, 25)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기에(25절)],
그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15, 19절)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시사 아합 왕을 책망하셨을 때
아합은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배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27절).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습니다(29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아합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29절).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 중에 죽임을 당한 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과 같이"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에서
그가 타고 있었던 병거를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22:29-38).
양심과 정의 길이 다를 때 ...?
양심에 찔림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에 이끌린다면...?
인간의 정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양심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찔려야 한다(삼상24:5; 엡6:17).
- 착한 양심/깨끗한 양심/선한 양심을 가진다(딤전1:19; 3:9; 벧전 3:16).
-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다(딤전 1:5, 19).
-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롬 9:1).
- 선한 양심을 위해 기도하며 또한 기도부탁을 한다(히13:18).
어느 때까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멸시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행하신 많은 역사를 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고,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 14:11).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주님,
제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새벽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소서
(사 50:4).
어떻게 마음이 슬픈 여자가 ...?
어떻게 울며 먹지도 않았던 마음이 슬픈 여자 한나가
다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을 수 있었을까요?
(삼상 1:8, 15, 18)
혹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통한 후
엘리 제사장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듣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15, 17-18절)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상대방을 설득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래 참음과 부드러운 혀입니다
(잠25:15).
어떻게 스스로 복을 빌 수 있나요?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은 주님을 떠나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 복을 빌어
우리에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말할 수 있을까요?
(신29:18-19)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우리가 거듭났으면 (중생했으면)(요일4:7)
-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11절)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15절).
어떻게, 왜 하나님이 죽으셨을까요?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이신(요일1:1, 2)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요일5:5) 하나님이신데(요1:1, 10:30; 빌2:6; 요일5:10)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사(요일3:16)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8).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으실 수가 있으셨을까요?
왜 그리하신 것일까요?
어머니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
어머니 리브가의 자식 사랑은 삐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리브가는 맏아들 에서 보다 둘째 아들 야곱을 더 사랑하여(favoritism)(창 25:28) 남편 이삭이 죽기 전에 에서에게 마음 것 축복하려던 것을 야곱으로 하여금 가로채도록 배우조정(manipulation)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27:6)
야곱에게 명하여 좋은 염소 새끼 2마리를 자기에게 가져오면 자기가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에게 가져다 드리게 하여 식사 후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에게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8-10절). 결국 어머니 리브가는 아들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의 눈에 "속이는 자"가 되게 했습니다(12절).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리브가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야곱을 통해 이루셨지만 저는 왜 어머니 리브가가 에서 말고 야곱을 그리도 삐뚤어진 사랑으로 사랑을 했을까 생각해 볼 때 그 이유는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25:27)
또한 에서가 이방인 아내로 맞아하므로 그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고(26:35)
그 며느리들로 말미암아 라브가는 자기의 삶이 싫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27:46).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도 ...?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님들에게
'너를 따르는 교인이 너무 많다',
'교인이 아직도 많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
(삿 6:2, 4)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유익한 것이 아닌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고전 6:12).
에워싸려고 합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마치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에워싸려고 한 것처럼(삼상 23:8, 26)
우리를 에워싸되 두려움과 불신으로 에워싸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그러나 "같은"!
여러 가지 은사,
여러 가지 직분,
여러 가지 사역,
그러나
같은 성령님,
같은 주님,
같은 하나님!
(고전 12:4-7)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참고 견디어 내면서
그 시험들을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여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나아가고
부족한 지혜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므로 받던지
아니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지금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 죄를 범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약 1:2-8; 12-16).
"여러 가지" "재주"와 "기술"로 ...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주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고전 12:4-6).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출31:2).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와 "기술"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시므로(3, 5절)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마16:18).
여자를 모르는 남자들?
남편 엘가나는 자기 아내 한나가 왜 울며 왜 먹지 않으며
왜 그녀의 마음이 슬픈지 몰랐는데(삼상 1:8),
남자 엘리 제사장은 더 나아가서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오래 기도하며 통곡하는
여성도 한나가 포도주에 취한 줄로 오해를 했습니다(10-14절).
"여호와 샬롬"
안심할 수 없는 이 상황, 충분히 두려워할 수 있는 이 상황,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여호와 샬롬"을 누려야 합니다
(삿 6:23-24).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삼상 2:10)
(한나의 기도 중에서 ...)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모세는 보행자 6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달 동안 고기를 먹으려면
양 떼와 소 떼나 바다의 모든 고기를
광야에서 잡은 들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민 11:21-2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몰아 이스라엘 진영 사방에 내리게 하시사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넉넉히 먹게 하셨습니다(31-33절).
빌립은 남자만 5천명 되는 큰 무리를 먹이려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요 6:7).
그런데 예수님은
한 아이의 물고기 2마리와 떡 5덩어리로
그들이 원하는 데로 먹게 하시고 나서도
남은 조각이 12 바구니에 찾습니다(10-13절).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
영원하신 주 하나님
영원하신 주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라! (사 26:4)
영원히 주님의 신부로!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사
영원히 주님의 신부로 삼으셨사오니
주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삼하 7:24; 마 16:18).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는데 ...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롬5: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계19:9)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참고: 삼하 19:28, 현대인의 성경)
이 어찌 감사 찬양 경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랴.
영적 매력과 아름다움
육체적 매력과 아름다움은 행음할 위험이 많습니다(겔 16:15).
영적 매력과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빌 2:8).
영적 아버지 (1)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 영적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본받는 자가 돼야 합니다(고전 4:15-16).
영적 아버지 (2)
영적 아버지는 영적 아들을 권합니다(admonish)(고전 4:14).
영적 아버지는 영적 아들이 잘못하고 있는 점을 고쳐서 바르게 하고자 그를 경고하며 책망합니다.
영적 아버지는 영적 아들에게 변화할 것을 경고하되 그 경고를 듣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면 심판(벌)이 초래할 것을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그의 영적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영적 아버지는 영적 아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자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14절).
지혜롭고 겸손한 영적 아들은 이러한 영적 아버지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며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영적 아버지의 책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낍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영적 성숙?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하는데 ...
(롬 12:1; 골 1:9-12)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 선지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26:4-15)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종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배-증인들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므로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함을 전파하는
'예배-증인들'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14:25).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른 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른 자는
열매 없는 자로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지 못하므로
멀리 보지 못하는 맹인이요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벧후 1:4-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 힘써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해야 합니다(사 40:9).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
사랑하는 이의 눈물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묵상하게 될 때(요11:35)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랑하는 이의 눈물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니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에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기에(요12:12)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계21:2).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목을 곧게 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과 경계의 말씀을 버리고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을 행하면서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주님을 배역하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스스로 팔려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왕하 17:7-17).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 내 육체의 가시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기보다
그 가시를 믿음으로 겸손히 품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가시 면류관 쓰신 주님을 의지하여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족한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경험하십시다
(고후12:7; 마11:28; 27:29; 시편 31:9, 14; 40:13).
예수님의 고난 묵상 1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만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운 것이 없으므로 오는 고난(사 53:2)
예수님의 고난 묵상 2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슬픔과 고통을 많이 당하셨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53:3).
예수님의 고난 묵상 3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예수님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사 53:4).
예수님의 고난 묵상 4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채찍을 맞으시고, 찔리셨고, 상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사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자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원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사 53:5).
예수님의 고난 묵상 5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우리 모두의 죄악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사 53:6).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 바울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 바울의 기도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사도 바울의 기도:
"이것이("내 육체의 가시")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7-8).
이 예수님의 기도와 이 사도 바울의 기도를 비교할 때에
예수님과 그의 사도인 바울은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드린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잔"와 사도 바울의 "이것"인 "내 육체의 가시"는
천지차이나는 것이겠지만 서두요.
그 비슷한 내용이란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기도를 드리셨을 때
"이 잔"(예수님)이나 "이 것"("내 육체의 가시")을
'지나가게 하소서'(pass away) 또는 '옮기시옵소서'(remove, take away)(예수님),
'떠나가게 하소서'(take away, leave, depart)(사도 바울)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나 그의 사도인 바울은
각각 "이 잔"(예수님), "이 것"("내 육체의 가시")가 자신에게서 옮겨지길/떠나가길
기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신 반면에(막14:36),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주님의 답변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기도 응답의 말씀을 받았습니다(고후12:9).
그 결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잔"을 마시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반면에(빌2:8; 참고: 마27:50; 막15:37; 눅23:46; 요19:30),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했습니다(고후12:10).
그는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했습니다(9절).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참고: 마16:24; 눅9:23).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를 "날마다" 해야 합니다(눅9:23).
여기서 '자기 부인'이란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잔"이나 "이 것"("내 육체의 가시")가
내게서부터 옮겨지고 떠나가는 것이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 지기'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십자가[예수님의 경우는 "이 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이 것"인 "내 육체의 가시"]를 달게 지고
겸손히 기뻐함으로 죽기까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빌2:8).
예수님의 성육신 사랑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성육신 사랑을 생각할 때(요일 1:1-2; 요이 1:7)
과연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사랑인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기려는 사랑인가?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
예수님의 이중 계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계명을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의미는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네 이웃을 네 사진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을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3-11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요약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님의 초림 때 "이미"(Already)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아직도"(Not-yet)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이미"(과거)와 "아직도"(미래) 사이에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완전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구원을 신실하게 '완성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빌1:6)
보는 데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고후5:7, 새번역).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과거(Past) 예수님의 초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Faith)으로
미래(Future)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여
주님의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을 "소망"(Hope)하면서
현재(Present)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로서
천국 백성답게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Love)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직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 3:6, 7).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키십니다(5절).
사명에 이끌림을 받는 사역자들,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그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임을 아는 사역자들,
겸손하여 서로 협력할 줄 아는 사역자들,
신실하게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충성하는 사역자들,
주님으로부터 자기의 일하는 데로 상을 받을 줄 바라보는 사역자들,
이러한 사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로!
오직 성삼위 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 (엡 1:3-14)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역자들로 세우시사
우리를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로 사용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일입니까
(고전 3:5-7).
오직 주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기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욥 23:10)
오직 주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기에
나는 오늘도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을 따라 살려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
우리는 우리가 접한 큰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력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의 무지함을 깨달았을 때에
우리는 더욱더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대하 20:12).
오해를 해도 어떻게 이정도로?
엘리 제사장은 "마음이 슬픈 여자"인 한나를 "악한 여자"로 여긴 것 같습니다
(삼상 1:12-16).
어떻게 우리 목사님들은 여성도님을 몰라도
이 정도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여성도님들도 우리 목사님들을 봐주고 있습니다.
사랑에 그저 감사하지요.
"옥상"에서의 "동침"?
다윗 왕은
저녁때에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유부녀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더불어 "동침"을 하였는데(삼하11:2-4)
그의 아들 압살롬은
장막을 친 "궁전 옥상"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자기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을 했습니다(16:22, 현대인의 성경).
올무에 걸리지 말아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신 12:30).
옳은 말로 꾸짖는 것?
그칠 줄 모르는 고통으로 인해 낙심한 자에게
옳은 말로 꾸짖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욥6:10, 14, 25, 26).
왜 갇힌바 된 상황으로 ...?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이 보기에
갇힌바 된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 앞에서
애굽 왕 바로가 보기에 갇힌바 되었고(출14:2),
다윗도 그일라에서 이스라엘 왕 사울이 보기에
갇힌바 되었습니다(삼상23:7).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건지심)의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더욱더 구원의 하나님을 믿게 만드시고자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왜 그리도 욕심을 크게 내는 것인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인데
왜 그리도 욕심을 크게 내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신 큰일을 속히 잊어버리고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영혼은 쇠약해졌다
(시 106:13-15, 21).
왜 방향을 돌려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되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우리를 안으사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일에 우리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돌려 다른 길을 따라 광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신 1:30-40).
왜 하나님은 방향을 돌리사 우리로 하여금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의 불신앙을 단련시키려고?
혹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정화시키려고?
혹시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시려고 그리 인도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왜 여호수아는 정탐꾼 2명만 보냈을까요?
여호수아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그 12명 정탐꾼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민13:8, 16).
그리고 여호수아는 자기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한 갈렙 외에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므로(32절)
이스라엘 온 회중이 밤새도록 통곡하고 원망한 것도 다 목격했을 것입니다(14:1-2).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면서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수 2:1).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여호수아는 모세 시대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낸
부정적인 결과를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는 또 다시 2명의 정탐꾼을 그 땅에 보냈을까요?
물론 여호수아는 그 2명의 정탐꾼을 통해
가나안 땅과 여리고를 몰래 조사해 오길 원했습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왜 여호수아는 모세가 했던 것처럼
각 지파에 한 사람씩 뽑아서 12명을 보내지 않고 2명만 보냈을까요?
그 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낸 결과
그들은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23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이 뭘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디도서 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을 잘 배우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바른 말”(sound in speech)을 하지 못하고 있고(8절)
더 나아가서 '바른 삶'(sound in life)을 살아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그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신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태초부터 계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교제)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1:1-3; 2:2; 3:1, 16).
왜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삿6:13)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1절).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13절).
왜 직분자들은 분쟁하는 것일까?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왜 교회의 연합성(하나됨)을 지키지 못하고
분쟁하는 것일까?
분명히 "주는 같"은데 말이다
(고전 11:18; 12:5).
왜 하나님께서는 ...?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까운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멀리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일까요?(민 13:17-18)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시면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를 따를 것이고
그리하겠습니다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바 될 것인 줄 아셨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리로 인도하신 것일까요?(14:1-4)
우리의 본능은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운전하면서 목적지를 향해서 갈 때에도 내비게이션(GPS)을 키고 제일 빠른 지름길을 선택하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왠지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호하는 짧은 길, 지름길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멀리 돌려 인도하실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까운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기 때문입니다(13:17).
짧은 지름길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빨리 출발지로도 돌아갈 수도 있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케 하시고자
- 그들을 겸손케 하시고자(신명기 8:2)
- 그들로 하여금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자(3절).
비록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지름길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았던 먼 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먼 길을 걷는 중에 홍해 바다 앞에 갇힌바 된 것처럼
큰 위기 문제의 해결점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길 원합니다(행16:25).
그 이유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요(시23:1),
하나님께서 큰 위기 가운데 큰 구원의 사랑을 베푸시사
큰 영광을 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출 14:4-31; 15장).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시기에(시116: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잠23:12).
왜 하필이면 "큰 물고기" 안에서 일까요?
많고 많은 기도 장소에서 왜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욘1:17; 2장)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 내리신 "큰 바람"으로 인해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요나가 타고 있었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을 때에도
요나는 배 밑층에서 기도할 수 있었을 때 오히려 그는 깊이 잠이 들어있었습니다(1:4-5).
한 마디로,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갔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 큰 물고기 안에서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을 그 때서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말입니다(2:6).
우리도 요나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배" 안에서는 기도하지 않고 잡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물고기" 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이유는 "내가 받는 고난" 때문입니다(2절).
왜 항상 불순종하는 자에게 항상 순종하라고 하실까?
"항상" 하나님을 거역해 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말했습니다(신 9:24; 11:1).
항상 주님께 불순종하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항상 불순종하는 나에게
주님의 말씀을 항상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외국인”
우리는 “외국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신1:16,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있었을 때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 즉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민11:4).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섞여 있는 외국인들이 “탐욕”을 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또 다시 울며 불평했습니다(4절, 새번역).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개의 성을 도피성으로 선정하여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가 피신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셨을 때(민 35:11, 현대인의 성경)
그 도피성들은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그들 중에 영주하거나 잠시 머무는
“외국인에게도” 피신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모세는 더 이상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괴로운 일과 힘겨운 일과
그들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가 없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여(신1:12-15)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그들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사람들이 소송 문제를 가지고 오면 여러분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외국인’이든 그들의 말을 잘 듣고 공정하게 재판해 주십시오”(16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외국인을 공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요나단 같은 친구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을 때 내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나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어주겠다는
요나단 같은 친구가 내 곁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 (삼상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