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

 

 

'주님,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주님께서 막아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상 25:26, 31)

 

 

 

마음에 심어진 말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약 1:18; 21, 22).

 

 

 

마음이 겸손한 자는 …

 

 

자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는 것은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낫게" 여깁니다(빌 2:3).

마음이 녹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그들이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듣는 순간 "곧 마음이 녹았고" 그들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수 2:10-1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습니다(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 성에 백성 중 3,000명쯤 올라갔다가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7:1, 11-12)

보기 좋게 패하여 아이군 앞에서 도망했을 때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4-5절).

 

이방인 라합과 이방인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듣고 마음이 녹아진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 아이 군들이 자기들에게 행한 일로 인해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

 

 

 

 

막힌 길과 열린 길을 통해 얻는 교훈

 

 

 

요즘 저희 교회 앞 길이 공사 중에 있습니다. 

그 길 이름이 Monroe인데

교차로는 Vermont 길이란 크고 넓은 길과

Madison이란 작고 좁은 길이 있습니다.

주로 시(city)에서 나와서 공사하는 사람들이

Vermont 길에서 Monroe 길로 들어오는 입구를 다 막아 놓고,

그리고 Madison 길에서 Monroe 길로 들어오는 입구는

반(half)만 막아 놓고 공사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교회에 들어올 때

차를 운전해서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Vermont 길로 오다가

저희 교회 앞길인 Monroe 길이 막혀있는 줄 알기에

그 전 길에서 우회전을 하던지 해서

Madison길에서 좌회전해서

Monroe 길에 반 열려 있는 입구로 들어와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 두 어번은 깜박하고 계속해서 Vermont 길로 오다가

Monroe길이 막혀있는 것을 보고서야

지나서 그 다음 길에서 우회전을 해서 빙 돌아서

Madison 길로 해서 Monroe 길에서 우회전을 해서 교회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ㅎㅎ

 

제가 오늘 새벽기도회  때 이 삽화(illustration)가 생각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10절을 설교하면서 생각났습니다. 하하.

성령님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시므로"라는 말씀과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씀

(6, 7절, 현대인의 성경)에 대한 저희 교회 식구들에게 적합환 삽화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얻은 교훈은

제가 만일 Vermont 길과 Monroe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서(길 앞에서) 시에서 공사하는 사람들이 막하 놓은 것들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차를 그 앞에 세워놓고 그 막힌 길로만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행동인 것처럼

성령님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아무리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전하는 등 바른 목적과 동기를 바울처럼 가졌다고 해도)을 막으실 때에

미련하게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드리셨던 기도처럼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

저 또한 이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받은 교훈은

제가 Vermont길에서 Monroe 길이 막힌 것을 보자마자

돌아서 Madison 길로 해서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셨을 때

열어주시는 다른 길,

즉 성령님께서 저를 멀리 돌려 인도하실 때에(출13:17-18)

그 멀리 돌려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대부분 왜 성령님께서 저를 이렇게 멀리 돌려 인도하시는지

제 명철로는 결코 이해가 안될지라도

저는 제 명철(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므로(잠 3:5-6)

성령님의 그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만왕의 왕"이신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계17:14)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된 폐가 십자가 위에 붙어 있었습니다(요19:19).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구간 구유에 태어나셨다는 사실도(눅2:7)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유대인의 관점에서 신성모독 죄로(요10:33)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신21:23; 갈3:13)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폐를 십자가에 붙이게 했다는 사실도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구원의 사랑입니다.

 

 

 

만일 사탄의 유혹에 내 배우자가 빠졌다면 ...?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우리의 뼈와 살을 치므로 말미암아

결국에 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지 못하게 하고

또한 주님을 향하여 욕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욥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의 배우자가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탄은 나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여 욕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내 배우자가 하나님을 욕하라고 한다면 ...?

(욥 2:4-10)

만일 우리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

 

 

우리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민 15:30, 31).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 때문이라면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축복해 주셔서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의 모든 소유물이 많아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면

분명히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물(물질과 자녀들)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과연 그래도 우리는 욥처럼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욥 1:9-22)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면 ...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형통하지 못 할 것입니다

(민 14:41).

 

 

 

많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사님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호 4:7).

우리 성도들은 물질과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10:1).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를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11:2). 

많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 + 기도 = 형통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참고: 대하 26:5).

말씀을 들려주시는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우리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 4:10).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에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해야 합니다

(창 21:1-2, 4).

 

 

 

매우 경계해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내가 높임을 받아

큰 영광을 누리는 것을

우리는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에 5:11).

매우 위험한 질투

 

 

미련한 자의 분노는

질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 27:3-4, 현대인의 성경).

 

 

 

 

 

면책해 주는 친구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 27:5-6).

 

제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 벗어나서 죄를 범하고 있을 때

저는 제 주위 사람들의 "입맞춤"과 같은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범죄하고 있을 때

저의 죄를 덮어주므로 사랑을 표현하는 친구보다

저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걷게 하고자

저의 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면책해 주는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친구의 면책이 비록 제 마음에는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는 신뢰할 만한 것이기에

그 상처로 인하여 제가 변화되고 싶습니다.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일어나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했을 때(느 2:18)

그들의 대적들은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었습니다(19절; 4:1, 4).

그들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고 있었을 때(4:6)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려고 했습니다(7-8절).

그러므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면서 건축을 했습니다(9절).

그들은 자신들의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님을 기억하고(14절)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리시라"는

믿음으로 공사를 감당했습니다(20-21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목적?

 

 

우리의 삶 속에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되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되도록

작용하고 있습니다

(롬 8:28-29).

모든 일에 절제하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일에 절제하자(막8:35; 고전 9:25).

 

 

"모세"가 "건져냄"

 

 

"모세"란 이름의 뜻은 "건져 냄"입니다(출 2:10).

그가 애굽에서 40년 살면서 "장성한 후에" "고되게 노동하는" "자기 형제들"

("히브리 사람"들) 중 한 사람을 그를 치는 "어떤 애굽 사람"에게서 건져 냄에 있어서

"그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11-12절).

그런데 그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낸 그 히브리 사람은 "그 잘못한 사람"이었습니다(13절). 

즉, 그 히브리 사람은 자기 "동포"인 다른 히브리 사람하고 서로 싸움에 있어서

잘못한 사람이란 말입니다(13절).  "그 잘못한 사람"이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고 말했습니다(14절).

 

"그 잘못한 사람"의 이 말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세우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자신들의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스스로 "자기 형제"를 건져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일이 탄로"가 나서 애굽 왕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습니다(15절). 

그러므로 모세는 바로 왕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훈련시키시사

그의 이름의 뜻대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데 도구로 쓰시고자 부르셨습니다(출 3-4장).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모여서 듣고 배워 지켜 행해야 하는데 ...

 

 

우리는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신 31:11-13).

 

 

 

 

목사는 …

 

 

목사는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 중보기도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은 주님께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순종해야 합니다(레 10:1).

그렇지 않을 때 목사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2절).

목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3절).

결코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해서는 아니 됩니다.

목사는 주님의 일에 전무해야 합니다(4절).

(아론의 두 아들이 죽었을 때 직계 가족 식구들이 아닌

아론의 삼촌의 아들들이 아론의 두 아들의 시신을 진 밖으로 메어간 것을 두고

박윤선 박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음).

주님의 일에 전무하되 목사는 직계 가족의 죽음 속에서도 슬퍼하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6절 -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박윤선).

목사는 분별력을 잃게 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9-10절).

목사님, 자신을 살찌게 하고 있으세요?

 

 

혹시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배롭고 존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 목사님들이

우리 자신을 살찌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삼상 2:29)

 

 

 

목사님에 대한 신뢰는 …

 

 

목사님에 대한 신뢰는

주님께서 목사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때 가능합니다(출 19:9).

 

 

목사님은 ... (1)

 

 

목사님은

풍성한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 안 됩니다

(민 24:13).

목사님은 ... (2)

 

 

목사님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해야 합니다

(민 25:11, 13).

 

 

 

 

 

 

 

목사님을 거스르는 교인들?

 

 

주님이 세우신 교회 지도자를 거스르는 교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분수에 지나고

또한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높이려고 하면서

교회 지도자에게

분수가 지나다 고 말하고

또한 그가 스스로 높인다고 말합니다

(민 16:3, 7).

 

 

 

무심코 쏘는 화살과 같이 내 양심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

 

 

 

참 선지자 미가야는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대하18:13)하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 아합은 참 선지자 미기야를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합이 보기에 미가야는 자기에 대해서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7, 17절).

그 말은 아합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불순종하고 있었고,

오히려 그는 자기에 대하여 좋은 일로만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5, 9-11절).

그런데 그는 인척 관계를 맺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려고(1-2절) 했을 때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듣지 않고

여호사밧 왕의 권면으로 참 선지자 미기야의 자기를 향한 나쁜 일로만 예언하는 말도 들었습니다(14-23절).

그런 후 그는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는

자기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게 한 것을 보면(28-29절)

그는 참 선지자 미기야의 예언을 듣고 자기에게 재앙이 임할까봐 그리했던 것 같습니다(22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기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쏜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에 맞게 하셨습니다(33절).

그 결과 아합 왕은 맹렬한 전쟁에서

병거에 겨우 지탱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습니다(34절).

그는 적군의 무심코 쏜 화살에 맞고 나서 죽기 전까지

자기에 대해 나쁜 일로만 예언을 한 참 선지자 미기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았을까요?

동시에 그는 자기에 대해 좋은 일로만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귀에 듣기 좋든지 싫든지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말씀 듣기를 싫어한다면

지금 우리는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 지금 우리는 거짓 목사의 거짓 설교에

우리의 귀가 익숙해져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주님의 참 종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비록 그 말씀이 주님의 종이 무심코 쏘는 화살처럼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화살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기보다

그 과정에서 오는 불순종의 결과로 겪는 고통으로 인해

그 고통이 없는 과거의 상황을 만족하게 여기길 좋아하는 게

우리 옛 사람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수 7:7).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걷고 있던 바른 길을 버리고

어리석음의 길을 택하여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잠 9:14-15, 18).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을 택하여 결국에는 생명을 얻습니다(6절).

 

 

 

 

 

무엇을 보고 책임을?

 

 

기업 무를 자 보아스는

"현숙한 여자"인 룻을 보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그녀에게 이행하겠다고 말했지만(룻 3:11, 13)

 

"기업 무를 자로서"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12절)

그의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인(3절) "밭"을 보고(5절)

"내가 무르리라"고 말했다가(4절)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한다고

하니까(5절)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6절).

미련한 남편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 나발이

"미련한 자"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25:25, 33).

 

미련한 남편과 사는 지혜로운 아내는 어떻게 함께 살까요?

적어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아내는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속히 행동으로 옮기면서

자기의 미련한 남편에게는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미련한 남편의 "죄악을" 자기에게로 돌리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쏟아내는 것 같습니다

(삼상 25:17-19, 23-24, 36, 41; 참고: 약 1:19).

 

 

 

 

 

 

미련한 자에게 당한 나의 모욕

 

 

주님께서는

미련한 자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삼상 25:39).

미약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미약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 (겔 29:14-15)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케 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기억되지 않게 하여주시니(16절)

하나님께 감사 ...

 

 

 

 

 

미워하는 이유/미움 받는 이유

 

 

어둠에 있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빛의 자녀들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

그들의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책망"하기[들춰내기(expose)] 때문입니다

(엡 5:11).

 

 

 

 

 

믿어야

 

 

믿어야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119:66).

믿음과 순종의 관계?

 

 

 

성경은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2:14, 17, 20, 26)..

또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며(렘42:6, 14, 2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6).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22:39; 요일3:23).

 

 

 

 

믿음으로 순종하자!

 

 

하나님의 명령이

내 명철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자(잠3:1).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내 마음 판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3절).

그 결과

나는 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5-6절). 

또한 하나님께서 내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6절).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할텐데 ...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요

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전 8:12).

 

 

 

바라바 보다 더 큰 죄인 예수?

 

 

어떻게 그 무리들은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죄수"인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요구하고

예수님은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리도 큰 소리로 재촉한 것일까요? (눅 23:23, 25)

 

그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바라바 보다 더 큰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바라바는 폭동과 살인죄였지만

예수의 죄는 신성 모독죄요(5:21; 마11:27; 27:43)

또한 성선 모독죄(요2:19)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을

무지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입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 같은 말

 

 

나를 꾸짖을 생각만 하는 친구,

그 친구의 옳은 말로 인해 실망한 나,

실망한 나의 말이 그 꾸짖은 친구에게는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욥 6:25, 26).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

돈을 좋아하는 목사,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목사,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목사,

그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임을

우리는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눅 16:14-15)

 

(스티브 엄의 "예수님과 돈"이란 글을 읽으면서)

 

 

 

 

바사 왕 고레스와 같은 대통령인가?

 

 

하나님께서는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도 감동시키시사

그를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도구로 사용하신 것처럼(에스라 1장)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사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 것일까?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자기를 해하려는 자 앞에서도 겸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는 자는

복이 있고, 큰일을 행하며,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삼상 26:20-25).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을 때

 

 

 

무거운 재앙으로 인해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을지라도

"내가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고

또한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기에

나는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겨

"그의 걸음을 바로 따"를 것이며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욥 23:2-3, 8-14).

 

 

 

 

 

 

발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우리 발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 119:59-60).

 

 

배우자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래가 자녀를 얻고자

자기의 여종인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창16:2).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인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15:4)을

믿음으로 이삭을 낳을 때까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21:2-3).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래가 이삭을 낳고 그 이삭이 자랄 때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 말씀하신 이유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8-12절).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것"인

"여러 나라의 풍습"과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렘 10:2-3, 5).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

 

 

위로는 커녕 우리 마음을 번뇌케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욥 19:2).

그들은 말로 우리를 꺾습니다(2절).

그들은 우리를 꾸짖습니다(3절).

그들은 자기들의 허물은 못보고 우리의 허물을 보고 꾸짖습니다(4절).

심지어 그들은 우리 앞에서 자긍합니다(5절).

다 우리를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입니다(16:2).

 

 

 

 

번제 나무를 번제물에게 지운다?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준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려고 가는 길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게 한 것이 말입니다

(창 22:1-6).

왜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번제물인 이삭에게

지우게 한 것일까요?

혹시 이것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게 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요?

보아스와 룻에게서 배우는 부부 관계 원리

 

 

보아스는 룻이 이방(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은혜를 끊임없이 베풀었습니다(룻 2:5-9, 20). 

남편은 자기에게 이물질 같은 아내를 끊임없이 사랑하며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원수였던 남편인 그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베풀어주는 사랑이 은혜인 줄 알았습니다(10절).

아내는 '나는 죄인이거늘 ...'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남편이 사랑해주는지

그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 같은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했습니다(11-12절).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로하며 기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기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마음의 위로와 기쁘게 하는 말을 듣고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라고 말하면서

더욱더 은혜를 겸손히 사모하며 구했습니다(2, 13절).

아내는 남편에게 더욱더 은혜와 사랑을 겸손히 사모하며 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는 자는

더욱더 겸손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사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과 함께 식사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남을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보호하고자 그의 종들에게 그녀를 책망하지 말고 꾸짖지 말라고 하고

그녀를 도와주게 했으며 그녀를 돌봐줬습니다(14-16, 19절).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며 또한 아내를 보호하며 도와주며 돌봐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보호해 주시며 도와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룻은 부지런한 여인이었으며

과부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7, 11, 17-18절).

아내는 부지런하며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셨으며 섬기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실 정도로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처음보다 더한 인애를 베풀었습니다(3:10).

아내는 남편에게 더욱더 큰 인애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의 주님께서 그녀에게 처음보다 더 큰 인애를 베풀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현숙한 여인인 줄 알고

그녀가 말한 대로 자기가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11-13절; 4:1-13).

남편은 아내가 현숙한 여인인 줄 알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약속하며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증서는 것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를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것,

즉 보증을 서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맥아더).

성경은 "지혜 없는 자"가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7:18). 

그리고 성경은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26).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녀가 그에게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삼하11:2).

 

다윗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았습니다(요일2:16).

'사람의 눈은 만족함이 없습니다'(잠27:20).

우리는 우리의 눈과 언약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에 보게 했고

분명히 다윗은 그녀가 "우리의 아내 밧세바"인 줄 알았습니다.

즉, 다윗은 분명히 밧세바가 유부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더불어 동침했습니다(삼하 11:3-4).

 

다윗은 "육체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았습니다(요일2:16).

그는 10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열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습니다(출20:14, 17).

우리는 이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보지도 말고 빼앗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유부녀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삼하 11:2).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3절).

그녀를 그녀의 남편에게서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12:9).

 

 

 

복 있는 사람과 악인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그러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들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입니다(시편 1편).

 

 

 

복을 누리는 방법

 

 

우리와 우리 후손이 복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

하나님의 목전에서 선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신12:25, 28).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전도자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됩니다.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고전 9:22, 23).

 

 

 

복종시키면 ...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을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복종시키면

회복의 은총을 누릴 것입니다

(왕하 5:11, 14).

 

 

 

 

본디오 빌라도와 사도 베드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3번이나 말한 반면에(눅23:14, 15, 22)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22: 57, 58, 60).

본을 보여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고전 4:6).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선을 행함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벧전 2:19-21).

 

 

부모가 알고 있는 자녀의 죄악

 

 

부모가 알고 있는 자녀의 죄악,

그 죄악은 자녀가 스스로 저주를 자청하는 것이건만

부모로서 금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삼상 3:13)

부모는 잘 모릅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삿 13:16, 14:4).

 

삼손은 그의 부모님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또 "알리지 아니하였"고,

또 "알려 주지 아니"했습니다(14:6, 9, 16).

 

부모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녀도 잘 모릅니다.

 

 

 

 

부자가 동침하지 말아야 할 여인하고 ...

 

 

아버지 다윗은

동침하지 말았어야 할 유부녀 밧세바하고

동침한 반면에(삼하 11:4),

그의 아들 암논도

동침하지 말았어야 할 이복 여동생 다말하고

동침했습니다(13:14).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더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

이것저것을 더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삼하12:8).

그런데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 및 자족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요일2:16)

남의 소유를 탐내어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므로

(삼하12:2-4, 9-10; 참고: 출20:17)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삼하12:9, 10)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11:27).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기에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시23: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34:9).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10절).

분노 억제

 

 

분노를 다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분노를 억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와 함께 지내는 것이 낫습니다(잠29:11).

 

 

 

"분노를 풀기 전에는"

 

 

"...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리라"(겔 23: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 풀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향했어야할 하나님의 진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죄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분노와 불평을 버려야 하는 이유

 

 

분노와 불평,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다!

그치고 버리자!

(시 37:8)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주님, 주님,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목사/장로/집사 노릇 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신다면 ...?

(마 7:22-23)

 

 

 

 

 

 

 

불순종으로 인한 인생의 큰 폭풍을 만났을 때 ...?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임한

큰 폭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는데

어떻게 요나 선지자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들 수가 있나요?

배가 거의 깨지게 됐으면

배 밑층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배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요?

요나 선지자는 불신자 이방인 사공들처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야 하지 않았나요?

(욘 1:1-5)

불순종하고 있는 목사로 인해 ...

 

 

주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목사인 나로 인해

나와 함께 있는 비신자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면 ...?

(욘 1:12)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하나님께 가장 최선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예배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삼상 15:18-22).           

 

 

 

 

 

불순종하는 자의 가치관

 

 

하나님의 명령은 다 진멸하라 였는데

불순종하는 교만한 자는 자신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하잖은 것"만 진멸합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자의 가치관은

자기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이 중요하지

(그 "가장 좋은 것"이 자기 자신에게 매우 해로운 것인 줄도 모르고)

결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삼상 15:3, 9, 22).

 

 

불행한 사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전 6:2-6).

 

 

 

불확실함 속에서의 확실함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uncertainty)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확실한(certain) 주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보는 대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참고: 고후 5:7).

비방하지 말아야 ...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악평한 후

극단적으로 단정하여

소문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성경해설)

(레 19:16).

 

 

 

 

비성경적인 지도자 선택의 결과?

 

 

주님께서 교회를 번성케 하시므로

목사님 홀로 교인들의 괴로운 일과 힘겨운 일과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없을 때

함께 짐을 담당할 수 있는 지혜롭고 지식이 있으며 인정받는 자들이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들으며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택하여 세워 교회 지도자들로 삼아야 합니다(신 1:9-18).

 

문제는 지금 미련하고 무식하며 인정도 못받고

사람을 외모로 보며 귀천을 차별하여 들으며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택하여 세워

교회 지도자들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는

우리의 비성경적인 선택의 결과의 쓴 맛을 보고 있습니다.

비열함이 높임을 받는 때입니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입니다(시 12:8).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고 있습니다(1절).

 

그런데 거짓을 말하는 자들, 아첨하는 자들,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은 더욱더 많아지고 있습니다(2-3절).

 

그러므로 가련한 자들이 눌림을 당하고

궁핍한 자들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5절).

그 때에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단련할 것입니다(6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실 것입니다(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입니다(7절).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악한 사탄에게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마 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