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을 사용해서라도 우리를 꾀는 사탄?

 

 

사탄은 우리를 꾀되 우리의 형제(자매)나 우리의 자녀나 우리 품의 아내(남편)나

우리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신 13:1-5).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고 싶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 왕 바로가 생각하기엔 "갇힌 바 되었"습니다(출14:3). 

그리고 실제로 바로 왕과 애굽 군대가 병거를 갖추고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까이 이르렀습니다(6-10절).  그 때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0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후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원망했습니다(11-12절)

(하나님께 간구한 후 지도자를 원망 ㅠ).   그 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했습니다(13-14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잘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요, 우리가 못하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salvation)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에는 애굽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judgment)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애굽 군대와 싸우셔서 그들을 전멸시키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30절).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가만히 있어서 보고 있으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능력을 볼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정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마 22:37, 39). 또한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사(롬5:5)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더욱더, 점진적으로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십니다(갈5:22).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그 계명에 순종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온 가족이 한 마음 한 뜻으로(빌1:27; 2:2) 함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서로를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정은 천국화되어가므로 천국의 기쁨(요15:11; 요일1:4)과 사랑(시33:5)과 평화(롬15:13)가 충만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불순종하게 만들고 있으며(엡2:2; 5:6) 도리어 지옥의 계명인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창37:5; 신22:13; 마24:10; 요일2:9).  또한 거짓의 영과 더불어 사탄의 미움을 우리에게 자꾸만 심어서 (신21:17; 삼하13:15; 잠10:12) 어두움의 일을 하게 만들므로(사29:15; 겔 8:12; 엡 5:11)

가정의 쓴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롬7:5).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같은 집에 가고 싶지 않게 만들고 있으며

도리어 집 밖에서 맴돌게 만들던지 더 나아가서 집에서 멀리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식구들을 보고 싶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배우자를 더욱더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우자를 향한 커지는 미움 속에서 그 부부 관계의 균열의 틈을 노려(참고: 느4:3, 히브리어로 "틈"; 6:1)사탄은 다른 여자/남자를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고,

안목의 정욕과 더불어 육신의 정욕으로(요일2:16) 그 다른 이성을 탐하게 만들므로

결국에는 외도하게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탄은 우리 가정을 무너트리고 파괴하므로

가정 천국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며 도리어 우리 가정을 지옥과 같은 가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가정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가정의 우상을 없애야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선

가정의 우상을 없애야 합니다(삿 6:11-16, 24, 25-27).

 

 

 

 

 

가족과 함께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했습니다(수 24:15).

 

집 안에 가장으로서 나만 주님을 잘 섬기가 보다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이

다 함께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길 기원합니다.

 

 

 

 

 

가증한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합니다

(잠 28:9).

가차 없이 내몰릴 필요가?

 

분주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좀 가차 없이 '광야'로 내몰릴 필요가 있습니다(막 1:12).

그 이유는 우리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므로 마음이 겸손해져야 할뿐 아니라

궁핍함 속에서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신 8:3).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간교한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아담의 여자 하와에게는(창3:20) "가장 간교"한 뱀이 있었던 반면에(1절)

다윗의 아들 암논에게는 "심히 간교한" 요나답이 있었습니다(삼하13:3).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경계하고 계시는데 ...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조상들 때부터 오늘까지 우리를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하셨지만

우리는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각각 우리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렘 11:7-8).

갇힌바 되었을 때

 

 

옥에 갇힌바 된 요셉을(창40:3)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인 애굽 사람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결국에 가서는 바로 왕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건져내셨습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바 된 이스라엘 백성을(출14:3)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마른 땅으로. 만드시사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구덩이에 갇힌바 된 예레미야 선지자를(렘38:6)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인 구스 사람 에벳멜렉을 사용하시사

예레미야를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힌바 된 요나 선지자를(욘2:1)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므로

요나를 건져내셨습니다.

 

옥에 갇힌바 된 사도 베드로를(행12:5)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사자를 통해 기적적으로 건져내셨습니다.

 

옥에 갇힌바 된 사도 바울과 실라를(행16:23-24)

하나님께서는 큰 지진이 나게 하시사 건져내셨습니다.

 

우리가 갇힌바 되었을 때,

우리가 동서남북을 아무리 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을 때,

구원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갇힌바 된 나

 

 

갇힌바 된 나,

동서남북을 아무리 보아도

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낙심이 되고 심지어 절망스럽기만 하다.

원망하고 싶다.

자포자기 하고 싶다.

 

갇힌바 된 나,

비록 동서남북을 보아도,

비록 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주님을 갈망하며,

나는 주님 안에서 소망을 품는다.

그 이유는 나는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이기 때문이다(슥9:12).

그러므로 나는 감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갇힌 자들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들을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십니다(시 68:6).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서 이끌어 내사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므로

그의 가족과 후손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보존하셨습니다(창39:20ff.).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바 된 상황에서 이끌어 내사

애굽 군대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출 14:3 f2f.).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사

그로 하여금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행 16장).

 

 

 

갑자기 된 것 같이 보이지만 ...

 

 

"이 일"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우리는 다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대하 29:36).

개미보다 못한 게으른 자

 

 

게으른 자는 개미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잠6:6).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7절).

개미는 서로 사려가 깊고, 상부상조하며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사려가 없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되

자기 일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일을 못하게 만듭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8절).

개미는 추수하는 계절인 무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을 위하여 먹을 것은 예비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합니다(10절).

그 결과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 가난이 옵니다(맥아더).

그러나 과연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26:16)는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개와 돼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이것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하는 말이 응한 것입니다

(벧후 2:20, 22).

거만함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책망을 듣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게 거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잠 9:7-8). 

그 거만함은 진리의 교훈과 책망을 멸시하여 거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만함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어리석음의 소리와 유혹의 소리를 너무나 속히 듣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혜의 소리를 들어야 할 텐데 ...

 

 

 

거짓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그 풍부한 열매를 의지할 때

우리는 두 마음을 품고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호 10:1, 2, 13).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남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0:24, 32).

건지시지 않을 실지라도 …

 

 

당신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사 50:10)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당신은

"건질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습니까? (2절)

당신은 당신에게 가까이 계시며(8절) 당신을 도우시는 (7, 9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을 건질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당신을

그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건지시지 않으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을 의뢰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고난당하시고(6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건질 능력이 있으시면 서도

그 십자가의 죽음에서 건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사랑의 관계를 짓기 위해선 ...

 

 

주님 안에서

능히 요동치 않는 사랑의 관계를

견고히 잘 짓는 사람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눅 6:48; 요일 3:18).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붙드실 뿐만 아니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십니다(시 147:6; 149:4).

 

 

 

겸손한 지식, 덕을 세우는 사랑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으로 인해 계속해서 겸손해 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므로

덕을 세우고 있습니다(참고: 고전 8:1-3).

 

 

 

겸손히 행하는 자

 

 

하나님을 의뢰하는 듯 해 보애는 느부갓네살(단3:28),

그러나 그는 다시금 꿈의 해석을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에게 묻습니다(6-7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듯 해 보이는 느부갓네살(2:47; 4:3),

그러나 그는 다시금 자기에게 영광을 돌립니다(4:30).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해 보이는 듯 하는 느부갓네살(3:29),

그러나 그는 다시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부인합니다(4:26, 32).

교만하게 행하는 자(37절)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낮추시사 겸손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합니다.

경계선

 

 

우리는 경계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출 23:31).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케 만드는

모든 요소들을 그 경계선 밖으로 쫓아내야 합니다(31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33절).

 

 

 

경솔하게 거리낌 없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신앙 속에서 원망하며 또한 형제, 자매를 낙심케 하는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우리에게 방향을 돌려

다른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님께 범죄했다고 말하면서 그제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답시고

경솔하게 그리고 거리낌 없이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패하여 고통 속에서 주님께 통곡 기도를 드리지만

주님은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듣지도 아니하십니다(신 1:19-45).

 

 

 

고난 중의 위로

 

 

고난 중의 위로는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시 119:50).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고후1:6).

고난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9일),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요?")란 제목 아래

마태복음 14장 24절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즉시 건져 주신 예수님 ...

묵상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허락하시는 '고난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쳤습니다(32절).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33절).

 

지난 주 토요일(어제 오후)(11일),

주님 안에서 한 자매가 사랑하는 둘째딸이 수영장에 빠져

온 몸은 시퍼렇게 되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충격 속에 있었을 때

한 외국인이 그 딸을 건져주고 CPR을 해줬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자매는 옆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사랑하는 아이는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다고

그 자매는 울면서 저에게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비록 지금 중환자실에 있지만 사랑하는 딸이 다시금 숨을 쉬고

일어나 병원 침대에 앉아 있는 사진을 저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내왔습니다.

또한 그 자매는 저에게 간증을 보내왔습니다.

그 간증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답은 예수 그리스도 ..."

 

고통에서 치유 받고 싶지만

 

 

고통에서 치유 받고 싶지만

그러나 그보다 고통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족한 은혜를 누리고 싶습니다(고후 12:9).

 

 

 

 

고통의 기회?

 

 

고통은

나의 연약함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시 39:4).

 

 

 

 

고통의 유익?

 

 

고통만큼 내 죄를 들춰내어 깨닫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고통만큼 주님이 내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시는 방법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고통을 통하여 내 죄를 들춰내시사

내 죄를 자복하고 회개케 하시서 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고후7:10),

그 고통에서 나를 건지시사 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 주시므로

내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37:17b; 38:17).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주권적인 뜻 안에서 겪는

나의 고난이 내 영혼에 유익되다고 고백합니다(시119:71).

공로

 

 

 

우리는 우리 공로를 세우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눅 17:10).

 

 

 

 

 

 

공로의식  vs.  은혜의식

 

 

공로의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행했다는

행함을 우리 머리속에 기록해 놓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심비에 깊이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더욱더 그 은혜의 힘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고전15:10).

 

 

과거 사랑, 미래 사랑, 현재 사랑

 

 

  • 과거 사랑: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과거 구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부어주셨습니다(롬 5:5)

 

  • 미래 사랑:

 

우리가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 구원을 받을 때(미래 구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성령님께서

천국의 법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온전히 순종케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 현재 사랑:

 

성경은 "너희는 구원을 이루라"(현재 구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12).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즉, '너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 답게 살라', '너희는 천국 백성답게 살라'는 적용입니다.

종말론적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사

지금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고 계시고(갈5:22)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순종케 하시기에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사량해야 합니다(16절).

즉,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돼야 하며(18절)

성령님으로 살고 성령님으로 행해야 합니다(25절).

그리할 때 우리 마음이 천국화되고, 우리 가정이 천국화 되며,

우리 교회가 천국화 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과거의 몸, 현재의 몸, 미래의 몸

 

 

  • 과거의 몸:

 

과거 우리의 몸은 “죄의 몸”이었습니다(롬6:6). 

죄의 몸이란 “옛 사람”의 몸입니다(6절). 

“죄의 몸”이란 본래 하나님께서 흙으로 빗으시사

첫 사람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므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창2:7; 참고: 고전 15:45).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과거의 몸인 “죄의 몸”(옛 사람)은 가인처럼(요일3:12)

형제를 미워하는 몸이요 살인을 하는 몸입니다(15절).

                           

  • 현재의 몸:

 

지금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령의 전입니다(고전6:19).

이 현재의 몸은 “새로운 피조물”(“새로운 존재”)이요

“새 사람”(고후5:17, 현대인의 성경)의 몸이요

“의의 종”(롬6:18, 현대인의 성경)의 몸입니다.

이 의의 종의 몸은 의를 행합니다(요일2:29). 

즉, 새 사람인 의의 종의 몸은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3:11, 23).

또한 의의 종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고전6:19)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5:22)을 맺어 사랑하는 몸이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 미래의 몸:

 

장차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재림 때 변화(부활)할 몸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섞을 몸이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섞을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미래의 몸은 썩지 아니할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신령한 몸)이요

영의 몸이요(고전15:42-44)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몸으로서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을 것입니다(48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 밖의 결점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실 것임(엡5:26-27, 현대인의 성경)].

이 미래의 영광스러운 몸은 천국에서 주님의 이중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7, 39)는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몸입니다.

 

 

 

 

 

 

 

 

 

 

 

 

 

과거의 미래의 사이인 현재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된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지만(롬6:4-5)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되기 전까지(고전15:51, 빌3:21, 요일3:2)

현재 어떻게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요일2:29).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의로운 자들인 된 자들로서(롬 4:25).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언제나 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 거한다/생활한다는 의미임(요일2:28)].

의를 행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마6:33).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일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6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고 행해야 하는데(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7-11절).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기에(5절)

자기 속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과연 나는 그 목사님에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목사님이 나를 아끼기는커녕

내 생명을 찾아 나를 해하려고 할지라도

과연 나는 그 목사님을 아끼고

그 목사님에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삼상 24:10-11)

 

 

 

 

 

 

 

과연 나는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내 자녀를 아끼지 않고 내어 줄 수 있을까?

(롬 8:32)

 

 

 

 

 

광야는 결코 “나쁜 곳”이 아닙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야는 “나쁜 곳”이었습니다(민20:5).

그 이유는 광야에는 그들이 원했던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5절)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만나를

“이 하잖은 음식”으로 여겼고 또한 그 “하잖은 음식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21:5).

 

그러나 감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광야”는 매우 ‘좋은 곳’이요 ‘필요한 곳’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처럼(막 1:35)

우리는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어(헨리 나우웬)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이시요(요6:32)

“세상의 생명을 주는”(33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35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하나님의 동산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되 우리의 사막을 에덴 같게,

우리의 광야를 하나님의 동산 같게 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하게 하며, 찬양케 하십니다.

(참고: 사 51:3)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괴로움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고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할 정도로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므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합니다

(삿 2:15, 17, 19).

 

 

 

교만한 마음은 ...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큰 은혜를  

매우 작게 여길 뿐만 아니라,

스스로 높이므로

너무 분수에 지나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민 16:3, 7, 9).

 

 

 

 

 

교회 안에 "에브라임 사람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말하면서

기드온과 "크게 다투"었는데(삿 8:1)

입다에게도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고 말했습니다(12:1).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나 입다에게

전쟁할 때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말했지만

실제로 입다의 말을 들으면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나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2-3절).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할 때

교회 안에도 "에브라임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말만하고 행동이 없습니다.
  2. 그래서 교회 지도자가 도움을 청해도 그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3. 그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4.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 지도자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5. 그러나 대접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은 분노합니다.
  6. 그리고 그들은 교회 지도자에게 시비를 걸어서 크게 다툼을 일으킵니다.

 

 

 

교회 안에 해로운 모임들

 

 

교회 안에 모임들 중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운 모임이 있습니다.

그 해로운 모임에는 "파당"과 "분쟁"이 있습니다

(고전 11:17-19).

 

 

 

교회 안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돈을 좋아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요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눅 16:14-16).

 

 

 

교회 안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

 

 

공동체 안에서 대접 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기를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할 때

분노 속에서 크게 다툼을 일으킵니다

(삿 8:1-3).

교회 안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자들

 

 

 

분명히 도움을 청하고자 불렀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지도 않았던 자들이

나중에 와서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하면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것을 보면

교회 안에서도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움을 일으킵니다.

(사사기 12장 1-3절을 읽으면서)

 

 

 

 

 

교회 안의 "압살롬" 같은 사람?

 

 

교회 안에서도 "압살롬" 같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쏠리게 한 후

목회자나 당회를 반대하는데

그 세력이 점점 커져서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계속 불어나는데

그들은 "압살롬"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하 15:6, 11, 12, 현대인의 성경).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세우시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자기들을 구원했으니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도

그들을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삿 8:22-23).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구원의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다음에 행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 됩니다.

순종하되 우리는 그 말씀 외에

추가로 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다음에 우리가 행할 일을 그 때 가서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상 16:1-3).

"박넝쿨"은 무엇인가?

 

 

 

혹시 나는 내 인생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는

"박넝쿨"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다가도

그 "박넝쿨"이 없어졌을 때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정도로 지금 나는

그 "박넝쿨"을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 "박넝쿨"을 예비하사 나에게 주신 하나님은

내가 그리도 아끼는 "박넝쿨"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끼고 계신 영혼들을

나도 아끼길 원하시고 계신데 ...

(욘 4:6-11)

 

 

 

 

 

 

 

 

 

 

 

 

 

 

그 사실을 덮으려고 ...

 

 

유부녀 밧세바로 하여금 임신하게 만든 다윗은

그 사실을 덮으려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로 하여금

그의 집으로 내려가

그의 처와 같이 자게 만들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그래야 밧세바가 임신한 아기가

자기와 동침해서 임신한 아기가 아니라

남편인 우리아와 동침하여 임신한 아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두 번째 시도 때에는

우리아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취하게"까지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아가 맨 정신이 아닌 취해서라도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아내와 잘 수 있을꺼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충성된 군인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삼하11:5-13).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군대가 지금 전쟁 중이며 여호와의 궤도 그들과 함께 있고

나의 지휘관인 요압 장군과 그 부하들이 빈들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같이 잘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왕 앞에서 맹세하지만 나는 절대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11절, 현대인의 성경).

 

 

 

 

 

그 심한 궁핍함 속에서 ...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므로"

"여호와께서 ...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삿 6:1).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6절).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7절).

 

악을 행하므로 결국에 가서는 궁핍함이 심해졌지만

그 심한 궁핍함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으니 감사?

 

 

 

 

그 악보다 더 큰 악을 행하면서도 ...

 

 

사랑하는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었던 암논은

그녀와 억지로 동침한 후에는 그녀를 심히 미워하되

그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 했습니다.

그래서 암논은 다말을 쫓아 보냈습니다.

 

다말은 암논에게 이것은 억지로 동침한 그 악보다

더한 악이라고 말했지만 암논은 듣지 않았습니다

(삼하13:1-19).

 

사탄의 간교한 유혹(꾐)에 넘어간 자는

그 악보다 더 큰 악을 행합니다.

그러면서도 책망을 듣지 않습니다.

"그 죄에서 떠나지" 않고는 ...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는

"전심으로"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왕하 10:31).

 

 

 

 

 

그가 그리도 원했던 것은 ...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도 원했던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이었습니다

(롬 9:1-3; 10:1).

 

 

 

 

 

그들의 말을 좋게 여기는 게 좋았던 것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들의 말을 좋게 여겨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으로 올라가길 원치 않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 1:19-33).

질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좋게 여겼던 게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모세가 "너희의 하나님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고 말한 대로

순종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그러하여도" 신앙

 

 

주님, 그러하여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시 31:14).

주님, 제가 저를 반대하고 미워하여 심지어 대적하는 원수들의 수중에 가둔바 돼 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8절).

주님, 제가 홍해 바다 앞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아득한 광야에 갇힌바 되었"던 것처럼(출14:3) 갇힌바 되어 아무리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안 보인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제가 사도 베드로와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있었던 것처럼(행12:5, 16:23) 갇힌바 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제가 나의 모든 대적들과 심지어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모욕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시31:11, 현대인의 성경).

주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제가 무서움에 싸여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의 의지합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 제 원수들과 저를 핍박하는 자들로 인해(15절) 제가 고통 중에 있고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져 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9절).

주님,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저를 치는 거짓 입술을 가진 자들로 인하여(18절)

제가 슬픔과 탄식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지쳐있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10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 "그러하여도" 제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14절).

주님은 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9절).

비록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와 기대대로 "내 육체의 가시"를 "내게서 떠나가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저에게 족하기에

저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은 나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후12:7-9; 참고: 시103:8; 111:4; 116:5; 145:8, etc).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님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정말 크고 놀랍기에 (시31:19) 저는 "그러하여도"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은 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합니다(14절).

그러한 때에 인간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을 때

이스라엘 왕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습니다(대하18:1).

즉,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누리고 있었을 때

맺지 말았어야 했던 인척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인천 관계를 맺었냐면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과 그의 시종을 위하여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했을 때(2절)

그는 아합 왕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3절).

선견자 예후의 말대로 여호사밧은 악한 자를 도왔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한 것입니다(19:2).

그 결과로 여호사밧 왕은 악한 아합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에 가서  

아람 왕과 전쟁할 때 아합 왕의 말대로 왕복을 입고 전쟁터로 들어갔다가(18:29)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3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사

그를 죽이려고 했던 적군들(병거의 지휘관들)을 감동시키시사

여호사밧에게서 떠나가게 하셨습니다(31절).

그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님을 보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간 것입니다(32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실 때

더욱더 겸손해야지 교만해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는 그러한 때에 인간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사람,

돕지 말아야 할 사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지혜롭게 분별하여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잘못된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잘못된 관계의 악한 영향, 나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나쁜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함께 위기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은 후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종의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19:2). 

그리고 나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위하여"가 아닌

"여호와를 위하여" "잘 살피"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해야 합니다(6-7절).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모였던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모였던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요12:13). 

여기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 큰 무리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으로 여겼고

예수님께서 의를 행하시되

자기들을 로마 정부로 부터 해방시켜주시고(정치적 해방),

경제적 번영을 가져도 주시고

또한 사회적 공의를 이루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아름다움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보신

아름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빌2: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예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십시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지식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요 지식입니다(신 4:6).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그리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진노하사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에게 "그만해도 족하니(It's enough)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3:23-26).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라고 말했습니다(4:21-22).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간절히 원해오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제 그만해도 족하다.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과연 우리는 모세처럼 그 사실을 믿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

"그제서야"라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환난을 당하여서라도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시므로 말미암아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되는 것도 큰 은혜이지요

(대하33:2, 12-13).

그 이유는 "그제서야"래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칠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성실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성실은

그치지 아니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그치지 아니하는 사랑과 성실로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실 겁니다

(창 24:27; 시 48:14).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했던 욥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욥 3:1)

고난을 당하며 마음이 아팠던 욥(20절),

그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 있어(26절)

죽기를 바라고 죽음을 구할 정도였습니다(21절).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자기를 끊어 버리실 정도로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했습니다(6:9-10).

그 이유는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10절).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끊어 버림 받을 실 정도로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2:8).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의 유익은 ...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의 유익은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음을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욥 6:10, 13)과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시 121:2).

 

 

 

 

"극히 약하고" "가장 작은 자"를 부르시사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극히 약하고" "가장 작은 자"라고

스스로 여기는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하시고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삿 6:14-15).

그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은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였습니다(15절).

하나님의 답변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였습니다(16절).

금강석 같은 마음?

 

 

 

만일 지금 우리 마음이 금강석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듣기를 싫어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해서는 안 됩니다

(슥 7:11-12).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스 9:3, 4).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더러운 땅"에 있는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는 "이방 백성들"(세상 사람들)과(11절)

서로 섞이지 말라(2절)고 명하셨는데

지금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고 있습니다(2절).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는 근심하지도 않고 있으며(5절)

더 나아가서 우리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습니다(6, 7절).

감히 우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해야 하는데 ... (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잠간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우리는 남겨두셨습니다(8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조금 소성하게 하셨"습니다(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배반하였습니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0절) 

기도 응답의 비결은 ...

 

 

기도 응답의 비결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일 3:22).

 

한 마디로, 기도 응답의 비결은

주님의 계명이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고: 여기서 '서로 사랑한다'(2:9; 3:11, 18, 23, 24)는 말은

(a) '빛을 발한다'(1:5),

(b) '진리를 행한다'(6절),

(c) '의를 행한다'(2:29; 3:12)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