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
하나님께서는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출12:40-41).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였으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민 14:33).
그 40년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해주시면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신 29:5; 행 7:36).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습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않는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신8:2).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에 복을 주셨고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신 2: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하실 정도로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신 2:7, 8:4, 29:5; 느 9:21).
그런데 그들은 그 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았습니다(암 5:25).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지도 않았습니다(수 5:6).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증험했습니다(히 3:9).
그러나 하나님은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행 13:18).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근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시 95:10).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민 32:13; 히 3:17).
그 결과 그들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수 5:6)
광야에서 소멸되었습니다(민 14:33).
그런데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조상들이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었던 이집트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던 이집트를 심판하셨습니다
(참고: 겔 29-31장).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땅을 황폐한 볼모지로 만드시사
40년 동안 그 땅에 사는 자가 아무도 없게 하셨습니다(29:11).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를 세상에서 가장 황폐한 땅으로 만드시사
40년 동안 폐허가 된 채 버려지게 하신 것입니다(12절).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를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14, 15절).
그 이유는 이집트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가 교만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를 지극히 미약하게 하신 것입니다(3, 9절; 30:6, 18; 31:10, 14).
또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고자
이집트를 심판하시므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29: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이집트를 바라보지 아니하게 하시므로
자신들의 죄악을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시고자 이집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지난 40여년 동안 저의 죄악된 소행을 참으셨습니다.
저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했던 것처럼(삼하12:14)
저는 지난 40여년 동안 하나님께 간음의 죄를 범했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요일 2:16)에 이끌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큰 죄를 범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탐심이라는 우상이 있었습니다(골 3:5).
그 40여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크나큰 은혜의 축복을 베풀어주셨는데
저는 그 은혜를 보답하기는 커녕 그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배은망덕한 죄를 수 없이 범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약 20여년 전에 첫째 아기 주영이를 잃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이를 데려가신 것처럼 말입니다
(삼하 12:14-18).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주님의 인자하심이 주영이의 55일 생명보다 나으므로
제 마음과 입술로 하여금 주님의 구원을 사랑을 찬양케 하셨습니다(시 63:3).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의 최대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크고 깊고 넓고 높게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저는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그 미련한 간음죄를 거듭행했습니다(잠 26:11).
아니 저는 개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저희 집 강아지를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 강아지는 자기가 싼 똥을 도로 먹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다시 반복적으로 같은 죄를 거듭 거듭 범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고 죄책감과 자괴감 속에서 허덕이면서
실망과 낙망을 수없이 거듭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제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어(롬 7:8)
제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미워하는 것을 하게 만들었습니다(15절).
저는 제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19절).
제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싶은데
제 육체는 죄의 법을 따를 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22-23절).
그런데 마침내 40여년이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건져주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스스로 제 자신을 건질 수 없는 깊은 수렁에서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 같은 죄인에게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의 탐심을 지극히 미약하게 하시사
저로 하여금 더 이상 탐심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겔 29:14-16).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제 죄악을 기억되지 않게하시기 위해서입니다(16절).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롬 7:25)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기억지도 아니하고 계신데(히 8:12; 10:17)
그 죄를 기억하며 죄책감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던 저를
그 죄책감 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고
저로 하여금 제 죄악을 기억되지 않겠하신 것입니다(겔29:16).
그것도 이렇게 40년 후에 말입니다.
아 ~ 하나님, 감사 감사드립니다.
300과 30?
옥합을 깨뜨린 한 여자는
300 데나리온의 이상의 가치가 있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자
예수님의 몸에 부은 반면에(막 14:3, 5, 8)
그 여인에게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의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고
그 여인을 책망한(5절) 가룟 유다는(요 12:4, 5)
은 30에(마 27:3)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막 14:11).
No 차별, But 분별
우리는 "차별"해서는 아니됩니다(롬10:12, 골3:11).
그러나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거을 분별해야 합니다(레10:10).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분별력을 가지고
이 세상과 "분리"된(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12:2).
크게 불행한 사람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고
무익하고 헛된 수고를 하는 자는
크게 불행한 사람입니다(전 5:16).
크고 높은 사람 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 세상에서
크고 높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기 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게
훨씬 낫습니다
(마 18:1, 4).
큰 교회 목사님에게는 ...
큰 교회(왕상 3:8) 목사님에게는
큰 은혜(6절)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9, 10절)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12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큰 악에서 더 큰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여인을 사랑하여
그 여인과 강제로 동침하는
이 큰 악을 행할 뿐 아나라
동침한 후에
그녀를 심히 미워하여
그녀를 버리는 더 큰 악을 행합니다
(삼하 13:14-16).
큰 어려움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
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큰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 10장).
왜 하나님께서는 그 큰 어려움이 지난간 후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허락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11장).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0:8, 11:6).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큰 어려움과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0:8, 11:6).
그 약속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히, 용기있게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10:9, 11:9).
믿음으로 순종할 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10:10-20, 11:8, 11, 14).
큰 위기 속에서의 큰 구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욘1:2).
그러나 요나는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요나가 탄 배에 "큰 바람"을 내리시므로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4절).
그 배가 거의 깨지게 된 큰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17절).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1절)에 불순종하였지만(3절)
그 큰 물고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했습니다(2:10).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보다 못한 불순종하는 요나에게
큰 위기를 허락해 주셨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큰 위기에서 요나를 건져주시고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럼,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우리에게
큰 역경과 어려움을 주시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큰 죄악에서도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무엘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나라와 같이 자기들에게 왕을 세워
자기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고 한 것은(삼상 8:5)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요(7절),
하나님의 목전에서 범한 큰 죄악이었습니다(12:17).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구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물론 그 당시 사사였던 사무엘의 두 아들이(요엘과 아비야)가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늙어 머리가 희어졌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출입을 하면서 아무 뇌물도 받지 않았는데(12:2-3)]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8:1-3)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그들을 치러 오는 것을 보고(12:12)
자기들도 왕이 있어서 자기들을 다스리며 자기들 앞에 나가서
자기들의 싸움을 싸우길 원했기 때문입니다(8:20).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범한 큰 죄악인데도 불구하고(12: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한 왕을 그들 가운데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8:22; 12:13).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큰 죄악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그들에게 "그 큰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24절)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여금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간 왕을 섬기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게 하시고자 그러신 것은 아닐까요?(대하 12:8)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의 큼을 그들에게 밝히 알게 하시되(삼상 12:17) 장차 사울 왕부터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들의 왕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시다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시요 왕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선택을 받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사 영원히 다스리시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타당한 변명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변명하는 모세(출3:9-10):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4:10);
"...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6:12);
"...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30절)
그러나 성경 사도행전 7장 21-22절은 모세에게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입습니다: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현대인의 성경)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내어다 버리자
바로의 딸이 주워다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이집트의 학문을 다 배워서 말과 행동에 뛰어난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
타락한 자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자들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히 6:4-6).
탐심과 우상숭배
탐심과 우상숭배는 연관이 있다(미 1:7, 2:2, 참고: 골 3:5).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탐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보다 물질이나 명예나 여자를 더 사랑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을 것이다.
탐심은 …
탐심은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게 만들되
내게 주어진 직분을 작게 여기고
(결코 작은게 아닌데)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을 크게 여기므로
그 사람의 직분을 탐합니다
(민 16:3, 9).
탐심은 …
탐심은
간음과 살인과 도둑질을 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합니다
(삼하 12:14).
탐심은 남의 배우자를 가로챕니다.
탐심은 젊어서 취한 아내의 품을
불만족하게 여기게 만들어서(잠5:18, 19)
결국에는 이웃의 아내를 탐하게 만듭니다
(출 20:17; 신 5:21).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아내를 가로채지 마십시오. 우리가 전에 여러분에게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살전4:6, 현대인의 성경).
탐심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선 …
탐심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행 20:33-35).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시고 노하시사 우리를 사랑의 매로 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패역하여 우리 마음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사 57:17).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오랫동안 잠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1절).
탐욕
성경 야고보서 1장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욕이란 결국 사망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 일로 기독교 서점에 갔다가
“희대의 소망”(저자: 이희대)이란 책을 보고 암에 관련된 책이라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저자 자신이 암전문의 의사이면서 암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쓴 책이래서 더 관심을 갖고 책을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암 4기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생명의 5기를 경험한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암 세포에 관한 저자의 글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암 세포란 성장과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 세포의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결코 죽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나는 세포라는 합니다.
암 세포가 무서운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기 위해서
다른 세포들의 영양분을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암 세포란 끊임없이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면서
고칼로리 영양분을 낚아채서 독식하며 성장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저자에 의하면 암세포의 본질은 탐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탐욕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탐욕이라는 것을
십자가 앞에 매일 매일 순간 순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우리는 마음을 끊임없이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 분으로만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탐욕은 …
탐욕은 만족될 수가 없습니다(민 11:4, 20). 탐욕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34절, 현대인의 성경).
탐욕을 부리고 거짓을 행하고 있는 목사들과 교인들 ...?
교인들은 다 탐욕을 부리고, 목사들은 다 거짓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있습니다(렘 6:13-15).
탐욕을 품은 사람들과 섞이지 말아야 합니다!
탐욕을 품은 사람들과 섞여 살면(있으면) 욕심을 내게 됩니다(민 11:4, 34).
탕자는 …
탕자는 아버지의 부(wealth)는 원하지만 아버지의 뜻(will)은 원치 않습니다(눅 15:11-32).
"틀림없이"?
넘치는 모든 소유물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주님을 향하여 욕을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틀림없이" 그럴꺼라고 한 예견이 맞는 것이 아닌가요? (욥 1:11)
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
-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압니다(롬3:23).
그/녀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갑니다(딤전 1:15).
- 자기 자신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롬7:18).
그/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19절).
그/녀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선행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엡2:9).
그/녀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롬10:9; 살전5:9).
그/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눅8:50; 엡2:8; 딤후1:9).
-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신30:20; 시56:4, 10, 11; 고후1:19).
그/녀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잠3:5-6).
그/녀는 하나님께 늘 기도합니다(시62:8; 사26:13).
- 겸손합니다(미6:8; 마11:29; 빌2:3; 약4:6; 벧전5:6).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시115:1).
그/녀는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고전10:31; 고후10:17).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하는 그리스도인은 ...
-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합니다(욜2:12).
하나님과의 일대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들춰질 때에 그/녀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마12:41; 롬2:4; 고후7:10).
- 자신의 가정(욥1:5)과 교회의 죄(계2:5, 22; 3:3)로 인하여 애통합니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가정과 교회, 주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주님의 말씀의 권위에 불복종하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정과 교회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죄로 인하여 애통합니다(겔18:30; 마12:41; 행13:24).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반앙하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는 성령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
-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자신을 알아갑니다(호6:3).
-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민16:3, 7; 롬12:6; 고후 10:13).
- 겸손합니다(사57:15; 엡4:2).
그/녀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빌2:3).
- 비판을 받되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과 잘못을 속히 인정합니다.
- 잘못을 보면 담대하게 마주칩니다.
-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알되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임한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리스도인은 ...
- 오직 자신에게 전가된 예수님의 의만 의지합니다(롬3:22).
그/녀는 자기의 의는 마치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을 인정합니다(사64:6).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마6:33).
-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행합니다.
그/녀는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올바른 일을 행하면서 올바른 길을 걸어갑니다.
- 선한 일을 행합니다(딛3:1).
그/녀는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함을 받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엡2:10).
-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에서 명하신 말씀에 순종합니다(행5:29).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
-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시59:17; 벧전2:10).
그/녀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당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사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시51:1).
-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눅17:4).
그/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기에 그 또한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마 9:36, 18:33; 빌1:8).
그/녀는 죄로 말미암아 허덕이는 사람의 죄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미워하지만
그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우며 섬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마음이 청결한 그리스도인은 ...
- 육신의 순결을 추구합니다(계14:4).
- 아무도 “나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다. 나는 죄 없이 깨끗하다”라고 말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잠20:9, 현대인의 성경).
-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정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시73:1; 잠22:11; 고후11:3).
- 자신을 더럽게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마15:18-19)과 육체의 일들(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또 그와 같은 것들)(갈5:19-21)로부터 자신을 깨끗게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시51:10).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시119:9, 현대인의 성경).
- 눈이 정결하신 주님 앞에서 신앙 생활을 합니다(합1:13).
그/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고후7:1).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시41:12).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은 ...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화목합니다(고후5:20).
그/녀는 그/녀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엡2:14).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녀의 마음을 주장합니다(골3:15).
그/녀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자기의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므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있습니다(빌4:6-7).
-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녀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냅니다(롬12:18, 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고후5:18).
그/녀는 화평의 복음을 전합니다(행10:36).
- 공동체의 화목을 추구합니다.
그/녀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나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식구들과 화목하게 지냅니다.
그/녀는 화평의 일에 힘씁니다(롬14:19).
그/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데 헌신합니다
(빌2:2; 행2:44-47; 4:32-35).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은 ...
-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것이 자신에 복인 줄 알고 있습니다(마5:11).
그러므로 그/녀는 박해를 받을 때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12절).
-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계1:9).
그/녀는 예수님처럼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웁니다(히5:8).
- 고난의 유익을 얻어 누립니다(시119:71).
그/녀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압니다(벧전3:17).
그/녀는 고난을 통하여 그릇 행하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시119:67).
-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합니다(롬8:18).
그/녀는 하늘에서의 큰 상을 바라봅니다(마5:12).
그러므로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이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히11:25).
패역한 우리 기독교인들
패역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권력자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므로
죄에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사 30:1-2).
피해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위험한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 사람을 피합니다.
그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그/녀의 손은 포승 같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녀에게 붙잡힐 것입니다(전 7:26).
편애는 미움을 싹트게 합니다.
가정에서
요셉을 특별히 사랑해준
아버지 야곱이 있는가 하면(창37:3, 현대인의 성경)
요셉을 미워하고(4절) 더욱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 형들(18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irony)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또는 어머니)의 편애는
형제들 사이에서 미움을 싹트게 합니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것을 경계해야
우리 목사들은
사역의 열매로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과
교인들에게 평가를 받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목사들은
주님의 사역자들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고
사역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3:5, 7).
"평생에 버릴 수 없는 아내"
아내랑 결혼해서 살다가
아내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다가
그게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그 여자는 그 남자가
평생에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신 22:13-19).
평생에 성경책을 …
우리는 평생에 성경책을
우리 옆에 두고 읽으므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형제, 자매 위에
교만하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 17:19-20).
평안의 길 아니면 고통의 길?
죄를 짓고 나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범한 죄를 마음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 고집대로 행하므로
어려운 고통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쉬운 평안의 길을 선택하는 자는
자신이 범한 죄를 즉시 하나님께 자백한다
(시편 32편).
(Mark D. Futato 교수님의 "The Book of Psalms" 주석을 읽으면서)
폐를 끼치지 않는 목사님?
목사님들은
모든 일에
성도님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고후 11:9).
풍부함보다 심한 기근이 훨씬 낫습니다?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들이 모여 사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 보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심한 기근이 있는 가나안 땅이 훨씬 낫습니다
(창 12:5; 13:10, 13).
“풍성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자는 …”
풍성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모르고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행합니다(롬 2:2-5).
풍족한 그 곳에는 죄악이 더 많을 수도?
내가 보기에 풍족하게 보이는 그 곳에는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큰 죄인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창 13:10, 13).
풍족한 생활이 위험해지면 ...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위험"해지면
"분노가 가득하여" "요란"과 "분란"을 일으켜
"아무 까닭도 없이" "경솔히" 행할 수 있습니다
(행 19:25, 27, 28, 32, 36, 40).
피하고 싶은 나의 십자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의 괴로움 속에서
피하고 싶은 우리의 십자가 ...
그러나 그 십자가를 위하여 이 때까지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
(참고: 요 12:27).
피하고 싶지 않은 길
하나님의 정하신대로 고난의 길과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자
(눅 22:15, 22,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