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괴로움은

주님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 심판적 괴로움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위로를 받고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이 시편 119편 74-77절 말씀 중심으로 전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종은 …

 

주님의 종은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합니다(왕상 18:36).

 

 

 

 

주님의 징계를 통해서라도 …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징벌(징계)을 통하여 고통중에서도

주님의 교훈하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94:12).

 

우리는 그 주님의 교훈하심을 받아 회개하므로 죄에서 자유를 누려 마음에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13절).

 

또한 우리는 많은 근심 중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붙잡힌바되고

주님의 위안을 받으므로 우리의 영혼이 즐거워해야 합니다(18-19절).

주님의 파수꾼?

 

파수꾼의 책임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겔 33:7).

 

지금 내 주위에 하나님의 파수꾼의 있는가?

있다면 지금 나는 그 파수꾼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있는가?

 

혹시 주님은 나를 파수꾼으로 부르신 것은 아닐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신 10:12, 미 6:8)

우리는 그보다 우리가 주님께 요구하는 것을

더 찾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

 

'보수'라고 말하면서 '개혁'을 외치는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무죄한 자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배("제사")를 강조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12:7).

주목을 받는다는 것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어느 한 사람이든 소수의 사람들에게

죄악된 질투의 눈으로 주목 또한 받을 수도 있습니다(삼상 18:6-9).

 

 

 

죽기 전에 기도 제목?

 

당신이 죽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잠 30:7)

 

 

죽습니다.

 

욕심을 내면 죽습니다(민 11:34).

 

 

 

죽어 먼지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나는 죽어 먼지로 돌아갈 것입니다(시104:29).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할 것이기에(31절)

나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친양할 것입니다(33절).

나는 나의 기도를 기쁘시게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 할 것입니다(34절).

죽은 믿음, 거짓된 믿음?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둘 사이에서 더 이상 머뭇머뭇하지 말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바알로부터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었다는 것입니다(왕상 18:20-26).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알이나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침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묵하는 바알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거짓된 신(우상)을 닮은 죽은 믿음,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 생각됩니다.

 

 

죽은 자, 죽는 것, 죽어 있는 것

 

 

10번째 재앙이 임했을 때 애굽 사람들은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출 12:33).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사람이 손에 구원하시므로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30절).

 

 

죽을 각오까지 하고 ...

 

주님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주님의 종은 죽을 각오까지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참고: 행 21:13).

 

 

죽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입니다(잠 21:6).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히 1:3)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서(2:10, 현대인의 성경)

"큰 구원"을 이루시되(3절)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1:3)과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2:10)을 하시고자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되(9, 10절)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습니다(14-15절).

 

 

 

 

죽음의 관점으로 살자.

 

다시금 죽음의 관점을 가지게 되니(전 7:2)

이런 저런 문제들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욘 1:17) "박넝쿨"(4:6)과

"벌레"(7절)와 그리고 "뜨거운 동풍"(8절)을 예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준비되지 않은 요나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을까요?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을 받은 후 입니다.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눅17:12-13).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왜 예수님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을까요?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멀리 서서"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을 텐데(12절)

어떻게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14절)

놀라운 것은 그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의 이성(명철)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예수님의 명령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순종했을 때 그들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4절).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그 10명 중 이방인인 사마리아인만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15-16절).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가라 네 미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우리는 주님께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우리의 기도를 응답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을 받은 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게 주"십니다

(엡 3:20, 현대인의 성경).

 

증인의 삶이란 …

 

 

증인의 삶이란(행1:8)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20:24) 내 일상 생활 속에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안에서 및 교회 밖에인 직장이나 사회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과 함께하는 동안

그/녀에게 선한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오늘 선교 주일 조명래 선교사님을 통하여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서)

지극히 미약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던 애굽 나라를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겔 29:14, 15).

 

그 이유는 2가지로 요약 할 수가 있습니다:

 

  1. 그 이유는 애굽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이 교만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를 지극히 미약하게 하셨습니다(29:3, 9; 30:6, 18; 31:10, 14).
  2.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므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을 바라보지 아니하게 하시므로 "그 죄악을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셨습니다(29:16).

 

주시는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나 사람을 지극히 미약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그 것이나 그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의지케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기억지 아니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자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던 것이나 사람을 지극히 미약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할 때 우리를 지극히 미약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는 낮아지게 하십니다(30:6).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 두어 그들이 둘러 있게 하였지만

지금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서 세상 사람들보다 악을 더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의 요란함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치시며 세상 사람들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고 계십니다(겔 5:5-8).

 

 

 

지금 교회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3 가지 입니다:

 

  1.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사45:4, 5). 

그 이유는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뿐만 아니라 목사님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호4:1, 6). 

지금 우리 목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버렸기에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죤 칼빈에 말대로, 하나님을 알므로 나를 알고 나를 알므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며 또한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일삼고 있습니다(민16:3, 7).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계명을 잃어버린 우리 목사들이 번성하면 번성할 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범죄하고 있습니다(호4:6-7).

 

  1. 지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1, 6절). 

지금 교회는“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빌3:8). 특히 우리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을 모르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고전15:3-4).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롬1:3-4). 

오히려 지금 교회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갈 1:6-9). 

지금 교회는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교회는 율법(계명)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선을 행하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교회는 ‘섞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교회는 믿음 더하기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교회는 “다른 교훈” 듣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딤전 6:3). 

지금 교회는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있습니다(딤후4:3-4). 

참으로 심각한 것은 지금 교회는 그 다른 복음과 섞인 복음과 허탄한 이야기를 잘 용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후11:4).

그 결과 지금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빌1:27). 

즉, 지금 교회는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지 않습니다(27절).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가 되야 하는데

지금 교회는 각자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소견대로 하고 있습니다(신12:8, 삿 17:6, 21:25).  이것이 콩가루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 지금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를 거절하고 있습니다(막8:34, 마16:24, 눅9:23). 
성도님들은 둘째치고 지금 우리 목사들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우리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있습니다(딤후3:2-5). 

지금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딛2:12). 

지금 우리의 경건은 헛 것입니다(약1:26). 

지금 우리는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딤후2:16).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3:12)

지금 우리는 박해보다 박수 받기를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 칭찬받기를 간절히 사모하기보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복신앙에 젖어들어 ‘예수님을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면 좋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물질적인 축복이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도구로 퇴위시켰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목적을 개인의 영달과 사업의 번영 등의 현세적인 것에 두게 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러한 가운데서 지금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걷기보다 세상의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보다 “잘 지은 궁전”(렘22:23, 현대인의 성경)과 같은 교회당의 “안락의자에서”(암6:4) “안락하게 사는” 것(렘22:23)을 훨씬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히5:8).  그러니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질 수 있겠습니까(고후2:15).

 

교회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교회는 무너져야 합니다. 

교회는 철처히 부서지고, 철처히 깨지며, 철처히 무너져야 합니다. 

특히 교회 강단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교회 강단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 모르는 우리 목사들이

다른 복음이나 섞인 복음이나 허탄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 입술로 뿐만 아니라

강단을 내려와서도 삶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므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교회 강단은 무너져야 합니다.

지금 궁핍함이 너무 심하면 ...

 

지금 궁핍함이 너무 심하면 전에 풍부함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창 41:31).

 

 

지금 나는 갇혀 있어도

 

 

지금 나는 갇혀 있는데, 내 눈으로는 동서남북을 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은 보이지 않고 있는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일을 행하시고,

뜻하시고 계획하신바를 이루시겠다고 말씀(약속)하십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렘 33:1-3).

 

 

 

 

지금 나는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러 이 세상의 돈 많음과 심히 강한 권력 등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사 악행을 행하는 우리나

우리의 악행을 돕는 이 세상 사람들을 치시사

우리를 돕는 자도 넘어지게 하시며

도움을 받는 우리도 엎드러지게 하실 것입니다

(사 31:1-3).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사30:12). 

지금 우리는 성령의 검이요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렘23:29; 엡6:17). 

그 이유는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의 찔림이 있고 우리의 마음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종들에게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말들[사40:10, “부드러운 말”(pleasant things)]을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우리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는 우리의 간지러운 귀를 긁어주는 부드러운 말들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바른 길을 버리고

거짓된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허망(deceit)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마치 육신의 음식을 편식하여 먹고 싶은 음식만 골라 먹듯이

지금 우리는 영적인 음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여

듣고 싶은 설교 말씀만 골라 듣고 듣기 싫은 말씀은 듣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균형을 잃었고 또한 병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참고: 왕상 22장).

 

지금 우리의 귀는 …

 

 

지금 우리의 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다른 복음"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갈1:6, 7, 8, 9).

그 다른 복음은 '섞인 복음'입니다.

그 섞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더하기 알파 입니다(Jesus Christ + Alpha).

 그리고 그 알파는 바로 "재물"입니다(마6:24; 눅16:13). 

 

지금 우리의 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축복보다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설교 듣기를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간지러워서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우리의 사욕(욕심)을 따라 목사님들과 교사들을 많이 뒀습니다(딤후4:3).

그래서 목사님들도 우리가 듣기를 원하는 물질의 축복 설교를 하시므로

목사 되기를 포기하시고 우리의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귀는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없도다"가 아닙니다

(새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지금 우리의 귀는 사탄의 소리에 너무나 노출되 있습니다.

마치 여자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말하는 간교한 뱀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창3:1)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의문의 질문을 자꾸만 듣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결핍되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의 거짓말의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거짓 복음 듣기를 좋아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듣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듣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의지하고 있는 대상?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가 보기에 기대고 싶고 의지할 만한 대상이

실제로는 갈대 지팡이처럼 쉽게 부러져서

오히려 우리가 다치고 흔들리며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겔 29:6-7).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님들에게 ...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님들에게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님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밀씀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말 1:6-7)

 

 

 

지금까지 저를 사하신 것 같이 ...

 

 

'주님,

주님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저의 죄악을 사하시되

예수님을 처음 믿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를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참고: 민 14:19).

지나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구나

 

 

아 ...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지나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참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자신의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을

자랑해서는 아니되겠구나.

자랑하는 것을 그만둬야겠다

(고후 12:6).

 

 

“지나치게” 예수님을 믿는 것도 문제?

 

 

예수님을 "지나치게" 믿어

교회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는 것도 문제?

(참고: 갈 1:14)

 

 

지도자는 ...

 

 

지도자는

깊이 생각하며

책망해야 할 때 책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녹을 먹지 않으며

주님의 일을 힘을 다하여 합니다

(느 5:7-9, 14-15).

지혜 ..  능력 .. 자원하는 마음?

 

 

주님의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제게 자원하는 마음이 부족한 이유는

그 일을 어떻게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제 마음에 주시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제 마음에 있으면

주님의 일을 할 줄을 알 것이며,

주님의 일을 할 줄 알면

그 일을 마음으로 원해서 할 것입니다

(출 36:1, 2).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는 자는 ...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는 자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므로

세월을 아낍니다(엡 5:15-18).

 

 

지혜 있는 자는 ...

 

 

지혜 있는 자는

자기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합니다.

그/녀는 때가 악한 줄 알고 세월을 아낍니다

(엡 5:15-16).

지혜가 아닙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미련은 현재보다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전 7:10).

 

 

지혜가 있는 자는 ...

 

 

지혜가 있는 자(신 1:13, 15)는 듣습니다(16절).

듣되 그는 양쪽 말을 다 듣습니다(16절).

듣되 그는 귀천을 차별없이 듣습니다(17절).

그리고 그는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17절).

그는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17절).

지혜가 있는 자는 쌍방간에 공정히 판단합니다(16절).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후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심)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인 것 같습니다

(엡 5:15-16).

지혜로운 부자들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참된 생명을 취하는 지혜로운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않습니다.

소망을 정함이 없는 재물에 두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둡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입니다(딤전 6:17-19).

 

 

지혜로운 사람은 ...

 

 

하나님께 헌신합니다(왕상 3:4),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압니다(6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7-8절),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립니다(9-10절).

 

 

지혜로운 여인은 …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를 압니다(삼상 25:19).

 

 

지혜로운 여인은 ...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남편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엡 6:33) 또한

남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게 합니다(잠 31:23).

지혜로운 여인은 …

 

 

지혜로운 여인은 위기 때 신속히 행합니다(삼상 25:34, 42).

남편의 죄를 자기에게 돌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24, 28절).

남편으로 하여금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도록 막습니다 (31, 33절).

남편을 세웁니다 (28-30절).

 

 

 

지혜로운 자는 ...

 

지혜로운 자는

과거의 전성기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늘에 충실합니다(참고: 전 7:10).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자,

자기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을 믿습니다

(잠 28:26).

 

지혜로운 자들은 ...

 

 

지혜로운 자들은

지혜를 좋아하며 지식을 사랑하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교훈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삽니다.

(잠 1:22, 23, 25, 29, 30, 33).

 

 

지혜로운 자의 어리석음?

 

 

성경에서 제일 지혜로웠다는 솔로몬 왕의

제일 어리석음은

그는 신명기 17장 16-17절 말씀을 어기고

병마와 은금과 아내를 많이 둔 것입니다

(왕상 10:26-11:3).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킬 때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시 119:98-100).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가?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인가? (사명)

나는 그 일을 지혜롭게 성공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기는 한가?

(참고: 삼상 18:5, 14, 15, 30)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두려움 가운데서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되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학대까지 합니다(출 1:10-14).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세상 사람들의 말은 불순종합니다(17, 21절).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안을 흥하게 하십니다(20, 22절).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은 ...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은

듣는 마음이요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왕상 3:9-12).

지혜를 배우는 자의 시작은 ...

 

 

지혜를 배우는 자의 시작(기초)은

자기 자신이 너무 무식(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잠 30:2-4; 시 73:22).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같은 목사님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같은 목사님은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들에게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나누어 줍니다(눅 12:42, 46).

 

 

지혜자의 마음은 ...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줄 압니다.

모든 사람의 끝인 죽음을 마음에 둡니다.

유익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줄 압니다(전 7:1-4).

 

 

지혜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미혹은?

 

지혜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미혹은

바로 "탐욕"과 "뇌물"(돈?)입니다(전 7:7).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신 하나님

 

 

니느웨 왕과 백성들이

자신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욘 3: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이 행한 모든 악 때문에

유다에 대한 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왕하 23:26, 현대인의 성경).

 

비록 유다 왕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하나님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왕하 23:25, 26).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걸머지시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 때

모든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시고

아들 예수님에게 모든 진노를 다 쏟아부셨습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고 위하여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요삼 1).

진리 안에서 행하십시다(3, 4절).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십시다(8절).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잠 22:19-21).

 

 

 

진실을 들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장로님에게서

부목사님들에 대하여 거짓말을 들으시면

그 부목사님들은 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잠 29:12).

 

진실을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 아합

 

 

 

아람의 왕과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도 물어보지 않는 아합(왕상 22:5),

그래도 사돈이 되는(왕하8:18; 대하18::1)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의 말을 듣고(왕상22:5)

물어본답시고 “사백 명쯤” 선지자들을 모았지만(6절)

그들은 하나 같이 “거짓말하는 영”에게 꾀임을 당하여(22절)

‘아람과 전쟁하세요 승리할 것입니다’(6, 11-12절)라고

“좋은 일만 예언”(13절, 현대인의 성경)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아합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던 미가야가 자기에게

“나쁜 일만 예언하므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그렇지만 유다 왕 여호사밧의 권면(7절)을 듣고

아합은 한 내시를 불러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고 명합니다(9절).

그러면서 그는 여호사밧 왕과 함께 왕좌에 앉아서 모든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듣습니다(10-12절).

한편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러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왕에게 좋은 일만 예언하는데 당신도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하나님의 참 선지자 미가야는 그 내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14절).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15절).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의 풍자로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좋아하는

아합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입니다(박윤선).

그랬기에 아합은 미가야에게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려거든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

내가 몇 번이나 너에게 말해야 되겠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좀 웃기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만 예언해 주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듣기를 좋아하면서

자기에게 나쁜 일만 예언해 주는 1명의 참 선지자의 말은 듣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 참 선지자를 “미워하”는(8절) 아합,

그러면서도 자기가 미워하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미가야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려거든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몇번이나 말하는 아합이 웃기지 않습니까?

디도데후서 4장 3-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인데(엡6:17),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행2:37, 6:54),

오히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보다(2:38) 그 말씀은 선포한 주님의 종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면서(7:54, 현대인의 성경)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57절) 돌로 치고 있으니(58절) … 쯔쯔.

그러면서도 아합처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려거든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

내가 몇 번이나 너에게 말해야 되겠느냐?”(왕상22:16)라고 말하고 있으니 … 쯔쯔.

적어도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좋은 것이든 아니든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면

우리에게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렘42:6)라고 말하였는데 ..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거짓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멀리함(따돌림)을 받으며

욕을 먹고 내 이름이 더럽힘을 받는게 훨씬 더 낫습니다

(눅 6:22, 26).

진실함

 

주님은 나의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신다(시 51:6).

 

진정 "광야"는 "나쁜 곳"인가요?

 

"광야"는 "욕심을 낸 백성"에게는(민 11:34) "나쁜 곳"입니다(20:5).

그 이유는 광야에는 그들이 원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나 광야는 예수님 한분만으로 자족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좋은 곳입니다(빌 4:11; 딤전 6:6).

그 이유는 광야에서는 육적으로 원하는 것들이 없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내려 주신 것을 겸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 1:3, 현대인의 성경).

 

진정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인가요?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면은

복음 전도 대상자를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까지 구분하여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요 4:4, 9).

 

 

진정한 교제란 ...

 

진정한 교제란 수직적인 성상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영생을 누리면서

수평적인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함께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는 것입니다(요일 1:3-4).

진정한 권위

 

 

“늘 자신이 하나님께 복음을 위임받았다는 자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들 때,

또한 인간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탐심을 부정하며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솔직하고 용기 있게 선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 권위가 있게 됩니다.  … 

근본적으로 바울의 진정한 권위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자기 이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김세윤).

저와 같은 목사의 진정한 권위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자기 이해에서 나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되었다는 은혜 의식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 주어진 권세를 행사하기를 거부하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목사의 진정한 권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의 권위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부모의 진정한 권위는 우리 자녀들에게 부모의 권세를 주장하며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들에게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

부모로서의 권리를 쓰지 않고 모든 일에 참는 것입니다.

특히 저 같은 목사들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아무 장애가 없도록 목사로서의 권위(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9장 12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나의 권리도 쓰지 않고 범사에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 9:12).”

참되 저는 디모데후서 2장 24절 말씀처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라는

성경 말씀대로 저는 목사(복음전파자)로서 성도들과 다투지 않고

그들에게 온유하며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잘 참아야 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김니다.

 

진정한 사귐(교제)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하고 있다면(요일 1:3)

우리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4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사귐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5:11-13; 롬 6:23)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므로(마 22:37, 39)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인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요 15:9-12; 요일 1:4).

 

 

진정한 자유인은 …

 

주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세우고자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절제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됩니다(고전 8:1, 9; 9:12, 19, 25).

 

 

 

진정한 자유인은 …

 

진정한 자유인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테두리(boundary)안에

자기 자신을 매일 쳐서 복종시켜 가둡니다(요 8:32, 고전 9:27).

 

진정한 친구

 

진정한 친구는 나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잠 27:17)

사랑으로 간절하게 나에게 권면하는 친구입니다(9절).

그 간절한 권면에는 나를 향한 아픈 책망도 포함됩니다(27:6).

 

 

진주와 같은 것도 하잖게 여기게 만드는 탐욕

 

 

탐욕은

현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진주와 같은 영원한 축복을 하잖게 여기게 만들고

오히려 진주 껍데기와 같은

순간적인 세상적인 것들을 갈급하게 만듭니다(참고: 민 11:4-7).

 

 

진짜 허사인 줄 알았는데 …

 

 

상대방에게 매우 선하게 대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나의 선을 갚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선대한 것이 진짜 허사라고 생각될 것입니다(삼상 25:21).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서도 나를 선대해주시사

전혀 기대하지 못한 귀한 은혜를 배불어 주십니다.

 

(다윗의 경우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치 않게 되었습니다).

징계의 목적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죄의 결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정결한 예배자들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습 3:9-10).

 

(Iain M. Duguid의 "Zephaniah"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를 읽으면서)

 

 

짧은 묵상

 

우리가 보기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더 나빠진 것(worst)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도 사용하셔서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better) 현실로 인도하십니다

(참고: 단 1:15, 20; 2:46-49).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기 가운데서 높이시되(2장, 특히 48-49절)

더욱 높이십니다(3장, 특히 30절).

가정과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 우리 가정과 교회는 견고할 것입니다(참고: 4:26).

내 힘과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우리를 반드시 낮추실 것입니다(참고: 4:30, 3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우리가 은혜로 여기다가

점진적으로 우리 공로로 여기게 될 때 이미 우리의 마음은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 교만한 죄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물들을 다 빼앗으십니다(참고: 5:18-20).

교만한 죄의 결과를 다 알면서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않고,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계속해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끝나게 하실 것입니다

(참고: 5:22-23, 26).

착한 사람 바나바

 

 

 착한 사람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행 11:24).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22절).

교회에서 인정 받는 사람은 언행일치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입니다(요4:23-24).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23절).

그는 영안이 열려서 영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착한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바나바는 영적인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23절)

그는 육체적인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권하는 자(encourager)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 형제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23절).

착한 사람은 성령의 위로의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바나바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울(바울)을 세우고 뒤로 물러났습니다(25-26절).

저도 바나바와 같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의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012 말씀 집회 첫째날 강사 송상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서 ...]

 

 

 

 

 

 

 

 

 

참 제자들

 

 

청함을 받은 천국 잔치에(마 22:2)

사양하지 않고(눅 14:18) 응하는 참 제자들은(26, 27, 33절)

천국 잔치에 왕이신(마 22:2) 주님을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목숨보다 더 사랑합니다(눅 14:26).

그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27절).

그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33절).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제자도의 값(cost of discipleship)을 치루기를 헌신합니다 (28-32절).

 

 

 

참고 견디는 인내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

 

 

영혼의 번민과 종일토록 마음의 근심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

(시 13:1-2)

나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4절).

그 때 내 마음에 몰려오는 두려움은

내가 죽는 것(3절)과

내 원수(마귀?)가 나를 이겼다고 말하며

기뻐할까봐 두렵습니다(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절).

 

                                         참된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멀리해야 할 것을 멀리해야 함(잠 30:8)과 동시에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헛된 것을 멀리함 동시에

참된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말과(갈4:16)

참된 것과(엡4:15, 25)

참된 증인과(계3:14)

참된 은혜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벧전 5:12).

한 마디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요14:6).

 

 

 

참된 신앙인은 ...

 

 

참된 신앙인은

자기가 접한 재앙들 가운데서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재앙들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그 재앙들 가운데서도 노래하고 찬송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기가 접한 재앙들 가운데서도 새벽을 깨웁니다

(시편 57편).

참된 자유인

 

 

주님을 사랑해서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기에

종신토록 주님을 섬기기로 헌신해야 합니다(출 21:5-6).

이렇게 주님께 헌신한 주님의 종은 참된 자유인입니다.

 

 

참된 자유인?

 

 

사랑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이야 말로 참된 자유인입니다

(참고: 출 21:5; 요 8:32; 사도 바울의 편지들).

 

 

창세기 13장 짧은 묵상

 

 

나눔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보기에 풍성하게 할 것 같아 선택한 그 길이 어쩌면 궁핍케 하는 지름길일 수도 ... (참고: 창 13:10)

내가 보기에 풍족하게 보이는 그 곳에는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큰 죄인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10, 13절).

물질이 풍부한데 마음이 넉넉하지 않으면 다투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도 넉넉하면 화평케 합니다(1-8절).

어떻게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여호와의 동산" 같이 볼 수 있단 말인가(10, 13절).  그리고 어떻게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표현을 "애굽 땅"과 같다는 표현과 동등시 할 수 있단 말인가(10절).  과연 롯이란 인물은 어떠한 인물이기에 ...?

어떻게 주님이 멸하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죄악된 세상을 "여호와의 동산" 같이 볼수 있단 말인가.

과연 당신은 어떠한 교인이기에 ...?

육의 눈으로 보기에 "여호와의 동산" 같는 곳에는 물질의 넉넉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동산에는  장차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10, 14-17절).

찾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의 고난을 살피시는 하나님 ...

(출 4:31)

 

 

 

 

 

천국 시민권자의 생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1:27).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은 천국의 법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 천국의 법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 

우리가 이 계명을 순종할 때에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이 계명을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천국화 이루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천국화 이뤄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주님의 증인 공동체로 사용하시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가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증거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요(마18:4),

또한 섬기는 사람입니다(20:26).

 

 

17년과 마지막 17년

 

요셉은 자기의 인생의 첫 17년을 아버지 야곱과 같이 살았고(창37:2),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여러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던 요셉(3절)과

자기의 인생 마지막 1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47:28).

 

 

청함을 받았지만

 

 

천국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청함을 받았지만(마 22:2, 4)

"다 일치하게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눅 14:18).

그 이유는 그들은 천국 잔치에 왕이신(마 22:2)

주님보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목숨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14:26).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27절).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33절).

한 마디로,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26, 27, 33절).

그 이유는 그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마 22:14).

축복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항상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왕상 10:8).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지혜가 부족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후히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것은 은혜입니다.

 

지혜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약 1:5).

 

 

 

 

 

 

충돌질 하는 이세벨

 

 

남편의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어 식사를 안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더니(왕상21:4,5)

고작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포도원을 자기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 때문임을 알고(6절)

왕후 이세벨은 아합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이래서야 어떻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7절).

 

그리고는 그녀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냅니다(8절). 

그 편지 내용의 핵심은 나봇을 모함하여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여

나봇을 돌려 쳐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9-10절).

참으로 “술수”가 많은(왕하9:22) 간악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은 그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의 지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왕상21:11)

결국 나봇은 성읍 밖으로 끌려 나가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13절).

 

다윗이 요압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납니다.

유부녀 밧세바와 동침하여 임신케 한 사실을(삼하11:2-5) 두 번이나 덮으려고 시도했다가(8-13절) 안되닌까 결국에는 편지를 써서 밧세바의 남편인 충성된 군인 우리아의 손에 그 편지를 들려

요압에게 보냈습니다(14절). 

그 편지 내용의 핵심은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였습니다(15절).

요압 장군은 다윗의 명령대로 행하여 결국 우리아가 죽습니다(17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인데(고후3:3),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자들인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인데(2:15),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고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엡5:2),

아합처럼 이웃의 소유를 탐하던지(눅11:39, 마23:25, 민11:4, 고전5:11, 출20:17, 엡5:3),

이세벨처럼 남편의 (혹은 자신의?) 탐심을 충족시켜주고자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하여(딤전3:11, 딤후3:3)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악한 죄(약5:6, 사29:21현대인의 성경)까지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 이세벨은 자기의 남편에게 약속한 것처럼(왕상 21:7)

아합이 원하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합니다(15절). 

그녀는 나봇을 죽여서라도(14, 15, 16절) 그의 포도원을 뺴앗아 아합에게 준 것입니다.

그녀가 바로 아합을 배후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바로 아합을 충동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게 한 자입니다(25절).

그녀가 바로 아합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게 만든 사람입니다(26절).

그러한 이세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였습니다: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23절).

 

사탄은 충동합니다(대상21:1). 

그는 심지어 하나님도 충동합니다(욥2:3).

그래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사단의 사람들도

지금도 교회 안에서도 모인 교인들을 “충동”질합니다(행21:27, 14:19, 대상21:1).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소동”을 일으키며(행21:30),

“소문”(악성루머)을 퍼트리며(31절) 결국에는 “폭행”(35절)까지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충분히 원망스러운 상황인데 …

 

 

안 그래도 충분히 원망스러운 상황인데(수 9:18),

그 상황이 더 악화되고(10장),

더욱더 악화되어

충분히 크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할지라도(11장),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10:8, 11:6)

그 상황들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사(롬8:28)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십니다.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그리스도인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또한 그 말씀을 잘못 받아들여 적용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며 왜곡하므로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잠26:9).

그런데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입을 열어 왜곡된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므로 그들에게도 신앙생활의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민간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간함을 더욱더 말씀과 기도로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미련한 자의 잠언과 지혜로운 자의 잠언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녀야 합니다(13:20,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더욱 지혜로와 질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9:9).

치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선

불신자들의 신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수 24:14).

 

 

 

침묵으로 고난에 동참해야

 

 

마땅히 형벌 받을 자는 나인데(사 53:8)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고(6절)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7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침묵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침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침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왕하 7:9).

 

침상에서 우리는 …

 

 

침상에서 우리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시 63:6).

우리는 침상에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6:6).

우리는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해야 합니다(149:5).

결코 우리는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36:4).

 

 

 

 

 

칭찬 받을 만한 성도

 

 

오래도록 공동체(교회)를 떠나지 않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신실하게 지키는 성도는 칭찬 받을만 합니다

(수 22:3).

 

[여기서 "그 책임"이란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