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른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  (막 8:34).

 

 

자기 부인 안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어야 했는데(막 8:33-34)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바깥 뜰에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 26:47-75).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제자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 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막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요(33절)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라 생각합니다(35절).

자기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혜를 사모하지 않고 지혜 얻기를 게을리 하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잠 19:8).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의 열심은 위험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은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롬 10:2-3).

 

 

자기를 높이는 자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를 높이는 자입니다(눅 18:9, 14).

 

 

 

자기를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

 

 

자기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삿 8:1) 나에게 와서 분노하는 사람(3절),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사람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선

내가 그 사람을 나와 비교도 되지 않게

높여주고 인정해 주면 되지 않을까요?(2, 3절)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과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23절)

여기서 "사람의 일"은 적어도 사도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21절)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22절).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었습니다(21절).

 

우리가 많은 때에 육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가 많치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펴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살펴 아는 명철한 자는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잠 28:11).

 

 

자기만 아는 마음의 고통

 

겉으로는 밝게 웃지만 마음에는 슬픔이 있습니다(잠 14:13).

보기에는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마음에는 근심으로 인하여 번뇌하고 있습니다(13절, 12:25).

마음에 자기만 알고 있는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14:10).

자녀 농사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자녀로 인하여 부모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고

오히려 그 자녀가 부모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부모가 그 자녀를 곱게 양육하고자 좋은 말로만 하고

사랑으로 징계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진정 사랑하고 있다면 부모는 그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들고 꾸짖어야 합니다

(잠 29:15, 17, 19, 21).

 

 

 

자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주는 부모?

 

 

사울 왕은 자기 군복을 골리앗과 싸우려는 다윗에게 주었지만

다윗은 익숙하지 못하므로 그 군복을 벗었습니다(삼상 17:38-39).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도

다윗에게 자기 군복을 주었습니다(18:4).

그 이유는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1절).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한답시고

충분히 그 자식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군복"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 부모는 자기 자식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요

또한 그만큼 자식의 입장에서 사랑하기 보다 자기 입장에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들 솔로몬 왕이 자기 아버지 다윗을 생각할 때

주님께서 자기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대하 1:8).

그 "큰 은혜"란 하나님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것입니다(삼하 7:8).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아들 솔로몬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 다윗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것이

큰 은혜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 솔로몬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 아버지 다윗은 자기 어머니 밧세바를 동침하고 임신케 하고 그 사실을 덮으려고

그녀의 전 남편인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죽여서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아들 솔로몬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자격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부모로서 우리 자녀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완전한(?) 부모가 되려고 하기보다 얼마나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큰 죄인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깨달아 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 앞에서도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죄 등을 인정하고 고백하는데서 끝나지 말고

그러한 이 아빠, 엄마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녀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자식을 금하지 않는 부모?

 

부모가 주님 보다 자식을 더 존중히 여기면(삼상 2:29, 30)

그 자식이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는 심히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17절)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주를 자청하는 그 자식을 금하지 않습니다(3:13).

자신을 팔은 아합

 

 

“더 아름다운 포도원”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그리도 원했는지(왕상 21:1-2),

그는 돈으로 값을 내서 다른 포도원을 살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나봇의 포도원을 그리도 원했는지(2절),

그 이유가 다만 나봇의 포도원이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기 때문이라니(1-2절)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분명히 나봇은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시기에(3절)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4절, 참고: 6절)

이스라엘 아합 왕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였습니다(4절).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5절)라고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물었을 때 아합 왕은 그녀에게 다 보고(?) 합니다(6절).

그 때 오죽 했으면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겠습니까: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7절)

[(현대인의 성경) “이래서야 어떻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마치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이끌기 보다 그녀에게 이끌려서

선악과을 같이 먹은 것처럼(창3:6),

또한 마치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그녀의 여종인 하갈에게 들어간 것처럼(16:1-2),

아합은 자기 아내 이세벨을 이끌기보다 그녀에게 끌려 다니면서

결국에는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욕심인 나봇의 포도원을 얻게 됩니다

(왕상21:15).

 

아내 이세벨을 통하여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15절)라는 말을 듣고(16절)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간 아합(16절),

참으로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 아합은 자기 자신을 팔아(20, 25절)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20절).

그와 같이 그 자신을 팔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었습니다(25절).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습니다(26절).

 

그런데 이러한 자도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그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내리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29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자신의 몸을 너무나 피곤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너무나 피곤하게 만들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깨어 근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때

졸고 있다면,

그 결과 시험에 든다면 ...

(참고: 마 26:41, 막 14:38).

자신의 죄가 많음을 깨달아 가는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자신의 죄가 많음을 깨달아 가는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그 복이란

죄를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많고 넓은지를 알게 되므로

더욱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5:20; 눅 7:47).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줄을 압니다.

또한 그/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압니다

(딤전 6:6-8).

 

 

작게 만드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할 때(고후 5: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을 작게 만드십니다(겔 29:15-16).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나쁜 소문

 

 

사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한 후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저 추측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함부러 하므로

공동체 안에서 잘못된 나쁜 소문이 나돈다면,

그 결과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면 ... ㅠ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사람들은 그것을 삼키기 좋아한다"(잠 26:22, 현대인의 성경).

 

 

 

잘못된 사람  or  행복한 사람?

 

 

잘못된 충고를 받아들여서

잘못된 길로 걸으면

잘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야훼가 당신의 하나님이고

당신이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순종하기를 기뻐하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 1:1).

 

(Mark Futato 교수님의 "The Book of Psalms" 주석을 읽으면서)

 

 

잘못된 축복관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모든 신령한 복을(엡1:3)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에

모든 물질적인 축복 받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악한 눈을 가진 자  vs.  선한 눈을 가진 자

 

 

"악한 눈"은 '

탐심을 품은 자의 눈"을 가리킵니다(잠 28:22, 박윤선).

탐심을 품은 자의 눈은

결코 가난한 자를 쳐다 보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못 본체 합니다(27절).

그는 가난한 자의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27절, MacArthur).

오히려 그는 자기보다 부한 자를 바라보고

그의 재물을 탐합니다.

 

그러나 "선한 눈을 가진 자"(22:9)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깁니다(28:27).

가난한 자를 불쌍이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입니다(14:31, 현대인의 성경).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잠을 푹자는 것이

돈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먹을 것과 돈이 많고 적음 보다 잠을 달게 자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전 5:12).

잠잠하지 마소서.

 

주님을 미워하는 주님의 원수들이 교만하게 떠들며

주님의 백성들을 치려고 서로 동맹하여

한 마음으로 서로 의논하며 간계를 꾀할 때에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5).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트리고 떨어트리며 흔들려고 꾀하고 공격하는

사단과 그의 세상 무리들 (시 62:3-4),

그 무리들은 입으로는 우리를 축복하지만 속으로는 우리를 저주하고 있습니다(4절).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8절).

결코 우리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10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토해야 합니다(8절).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1, 5절).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 만이 "나의 구원"이요 "나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1, 5절).

 

 

장성한 자가 되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에 단계를 넘어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가 되야 합니다.

그래서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히 5:12-14).

재물을 잃는게 더 낫습니다.

 

건강을 잃는 것보다

재물을 잃는게 더 낫습니다(전 5:13, 14).

 

 

재물의 한계

 

재물이 많은 여러분,

재물의 한계가 옵니다(렘 51:13).

 

 

재물이 없어지게 하셔서라도 …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없어지게 하시므로

재물의 유혹으로 인하여 말씀의 결실을 못하는데서(막 4:19) 건져주시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눅 16:9).

 

 

재앙을 만나 두려울 때

 

 

우리가 재앙을 만나 우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어리석음과

기뻐하는 거만함과 지식을 미워하는데서 돌이키지 않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잠 1:22-26).

저주를 돌이켜 복을 주시는 하나님

 

 

레위는 저주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죽기 전에 유언하면서

레위와 그의 형제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끓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창 49:5-7).

레위와 시므온이 이렇게 저주를 받은 이유는

그들의 여동생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욕을 당했을 때(34:2)

하물과 세겜을 속여(13절) 할례를 행하게하므로(24절) 그들이 아파할 때

레위와 시므온이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기습하여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 및 그들의 성읍에 모든 남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25-26절).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저주 받은 레위의 후손들인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출 32:29).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제사장이 됩니다.

그것도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3,000명 가량을 칼로 죽이고 나서 말입니다(8, 26-28절).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돌이켜 복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저주를 받았던 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돌이켜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행복자들입니다(신 33:29).

 

(Tremper Longman III의 "IMMANUEL IN OUR PLACE"를 읽으면서)

성적 만족감을 누리고 즐겨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성적 의무를 다하여

함께 성적 만족감을 누리고 즐겨야 합니다(고전 7:2-5).

 

 

"전에 하던 대로"

 

 

내 자신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다니엘과 같은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단 6:10).

 

 

절망 속에서도

 

절망 속에서도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님을 더욱 더욱 찬송하겠습니다'라고 헌신 및 결심합니다(시 71:14).

 

 

절제 할 수 없으면 결혼해야 합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 합니다(고전 7:1).

부부의 의무는 서로의 성적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3절). 

그러기 위해서라도 부부는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5절).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절제 못하므로 말미암아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성적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5절).

그러므로 만일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해야 합니다.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9절).

점 밖에 되지 않는 인생일진데 …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이 아무리 100년을 산들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으로 볼 때

점 밖에 되지 않을진대

그리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왜 이리도 걱정, 근심, 두려움 속에서

좀 먹는 헛된 영화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지 ...

(시 39:11)

 

 

 

 

정의 보다 뇌물을 좋아하는 지도자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기 보다

시민들에게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잠 29:4)

 

 

 

 

 

 

 

 

 

정조를 잃은 교회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정조를 지키고 있지 않고 사생아를 낳고 있습니다(호 5:7)..

지금 신부된 교회는 신랑되신 주님께 정조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서

"사생아" 같은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빌 1:8)이 아니라

"음란한 마음"(a spirit of prostitution)이 있습니다(호 5:4).

그 결과 우리의 행위가 우리로 우리 주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4절). 

더 나아가서, 우리 속에 음란한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교만해져 있습니다(5절).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 우리는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6절)

매 주일 예배당에 나아와 하나님께 그것들을 받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무수한 제물"은 아무 유익도 없고

기뻐하시지도 아니하시는데 말입니다(사 1:11).

그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는 것인데 말입니다(12절).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예배당만 밟을 뿐인데 말입니다(12절).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헌금인데 말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말입니다(13절).

그 모든 받침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인데 말입니다(14절).

이렇게 받치면서 하나님을 찾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호 5:6).

지금 우리는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벌하실 것입니다(1, 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징벌을 통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15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계십니다(엡 5:26-27).

그러므로 결국 신랑되신 주님께서는  신부된 우리 교회를 준비시키시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계 19:9).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호 6:1).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절).

"정죄"라는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죄"라는 돌로

나 자신을 쳐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요 8:3-11).

이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으므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36절, 현대인의 성경).

 

 

정직한 자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며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집니다(잠 11:3, 6).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민 14:8).

그러나 모세를 거스렸던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인 다단과 아비람(16:1-2)은

애굽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13절).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정한 가나안 땅인 천국을 싫어하고(14:31)

오히려 이 세상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주님께 구하고 있는 5가지의 힘

 

 

여러분, 힘들고 지쳐 낙심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께 구하는 5가지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힘’, ‘사랑의 힘’, ‘말씀의 힘’, ‘기도의 힘’ 그리고 ‘성령님의 힘’입니다.  제가 이 5가지 힘을 구하는 이유는 그 힘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구하는 이유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아가면 갈 수록 저는 그 은혜의 힘으로 감사하면서

더욱더 주님의 일을 수고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또한 제가 주님께 사랑의 힘을 구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힘으로는 제 아내조차도 사랑할 수 없음을 점점 더 깊이 그리고 많이 깨달아 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힘으로만 제 아내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물댄 동산이 되어서(렘31:12) 나 같은 죄인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많이, 넓게, 높게 깨달아 알아갈 때에만이(엡3:19) 그 주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마22:37-39). 

이렇게 저는 주님께 5가지 힘을 구하곤 하는데 문제는

사탄은 이 5가지의 힘과 정반대로 저의 삶 속에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탄은 제가 주님께 은혜의 힘을 구할 때

제 생각에 은혜 의식 보다 공로 의식을 자꾸만 심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다 행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저는 제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데(눅17:10)

사탄은 제 자신을 우쭐되게 자극하며 또한 디오드레베와 같이

교회 사람들 중에서 으뜸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요삼1:9). 

결국 사탄은 저로 하여금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라는 고백(고전15:10)이 아닌

‘나의 나 된 것은 내 힘(능력)으로 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을 제 머리에 주입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업을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사탄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신8:17).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네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것인데도 말입니다(18절). 

또한 사탄은 제가 주님께 사랑의 힘을 구할 때 제 마음에 미움을 싹트게 하여

제 아내조차도 미워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일3:15)

사탄은 저와 주님 안에서 한 몸인 제 아내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로

오히려 그녀는 미워하고 또 미워하게 부단히 제 삶 속에 일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주님께 말씀의 힘을 구할 때 사탄은 저로 하여금 성경책을 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지 못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지켜 행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저의 마음을 저의 형제, 자매들 위에 교만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신17:19-20). 

그 뿐만 아니라 사탄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히 하려고 노력하면

 진리 그 자체보다 그 진리의 말씀에 추가하던지 빼던지 하게 거짓말을 제 귀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저로 하여금 기도의 힘을 얻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제가 기도를 하려고 하면 자꾸만 졸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마26:41)

사탄의 목적은 저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기에 자꾸만 기도할 때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졸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무릅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의 자세와 기도의 습관을 길러야 하는데 저로 하여금 서서 제 힘과 능력과 경험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계속해서 충돌질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령님의 힘을 구할 때 사탄은 죄악된 육신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저를 부축이고 있습니다.  즉, 사탄은 저로 하여금 성령님을 거스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일을 하게 만들려고 계속해서 유인하고 있습니다(갈5:16-21). 

이렇게 사탄은 제가 주님께 구하고 있는 5가지 힘과 정반대로 제 삶에 부지런히 일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탄은 이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으로 부터 저를 멀어지게 만들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그 주님을 향한 저의 믿음을 공격하여 자꾸만 제 생각의 영역에서 의문을 던지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제 마음의 의심을 품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저로 하여금 힘의 근원이 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데서(히12:2) 제 시선을 자꾸만 돌려 주님을 보고 믿음으로 걷는 저로 하여금 “바람을 보”게 하고 제 마음을 두렵게 하므로(마14:30) 두려운 상황에 이끌림을 받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어하시는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제어하시는 은혜를 우리에게서

거두어버리시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를 ... 내버려두신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상실한 마음대로(롬 1:24, 26, 28).

 

 

제일 힘들 때가 하나님께 부르짖기엔 제일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원통함과 우환이 있으므로

우리의 영이 우리 속에서 상할 때에

제일 힘든 것은 우리를 돕고나 보호하는 자나

우리를 보살펴 주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제일 힘들 때가

하나님께 부르짖기엔 제일 좋은 기회입니다(시 142:1-4).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선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선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 때에 가능합니다

(약 1:2-4).

조금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겔 14:3)

거짓 선지자들/거짓 목사들

거짓 예언/거짓 점괘/거짓 복음(13:1-9)

유혹(10절)

거짓말(22절)

우상(14:3)

죄악의 걸림돌(3절).

 

 

 

조급 말고 갈급!

 

 

조급해 하지 말고(잠29:20, 딤후3:4) 갈급해 하자(시42:1).

 

 

조심해야 할 거짓 목사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거짓 목사들은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참고: 마 7:15).

 

 

족한 은혜를 누리는 기회?

 

 

"육체의 가시"와 같은(고후 12:7)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주님의 족한 은혜를(9절)

충분히 누릴 수만 있다면야 ...

존경심이 들지 않는 지도자의 말을 …

 

 

존경심이 들지 않는 지도자의 말은

귀에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의 말은

그 사람들을 설득시킵니다(행 5:34-40).

 

 

존귀히 여겨야 할 사람들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 ...  (빌 2:25-30)        

 

 

좀 단속해야 합니다.

 

본래 나쁜 버릇이 있는 자녀는 경고를 하고 단속해야 합니다(참고: 출 21:29, 36).

 

좀 약해질 필요가?

 

주님께 받은 축복이 너무 크면 우리는 너무 자만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각자만의 "육체의 가시"입니다.

우리는 그 "육체의 가시"로 인해

좀 약해질 필요가 있습니다(고후 12:7, 9).

좁은 문,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마16:24; 막8:34; 눅9:23)

비록 좁은 문으로 들어가(마7:13) 좁은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다(시84:5).

 

 

종일  ...  의지

 

 

사람들에게 "종일" 시달리며 "종일" 괴롭힘을 당하며

"종일" 내 말을 곡해당할지라도 나는 주님 만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찬송합니다(참고: 시편 56편).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자기의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께 떠난 사람은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렘 17:5, 6).

 

 

죄가 많으므로

 

우리의 죄가 많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곤고하게 하시고

우리의 원수들은 형통하게 하셨습니다(애 1:5).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나히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무엇이 은혜입니까?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18, 22절).

사망의 열매를 맺던 우리가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하나님의 은사(선물)인 영생입니다(22, 23절).

 

 

죄란?

 

  1. 죄는 불법입니다(요일 3:4).
  2.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불신)입니다(요 16:9).
  3. 죄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약 4:17).
  4. 죄는 믿음으로 따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롬 14:23).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되는데 .. ㅠ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자신이 범한 죄를 심상히 여기지만(잠14:2, 9)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여깁니다.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하는 자들은

영적 행음함인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죄를

가볍게 여기므로 하나님을 반역합니다(렘 3:6-10).

죄를 뉘우치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가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수의 손에 넘기시사

지금 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회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게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약속을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시사

세상에 사로잡힌 교회를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복의 사랑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우리의 더러움과 범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품고 하나님께 범한 죄를 뉘우치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겔 39:23-26).

 

 

 

죄를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면

죄를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창 4:5-7).

 

 

죄를 짊어진채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직분을 맡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죄를 짊어진채 죽지" 않겠하고자 구체적으로 제사장의 옷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출 28:31-43, 특히 43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신 죄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에게(히 3:1, 고후 5:21)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진채 죽게하시고자(벧전2:24)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창3:15, 사53, 시22).

죄악된 감사 기도

 

 

 

마치 예수님께 치유 받은 10명의 나병 환자들 중 1 명의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돌아와

그 분의 발 앞에 앞드리어 감사하였던 것처럼(눅17:16)

우리 그리스도인들 10명 중에 1명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셨는데(살전5:18),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이리 불평과 불만과 비판의 소리가 많이 나오는지,

왜 이리 걱정과 불안과 염려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지,

우리 마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받은 죄 사함과 구원과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감사하는 마음이 결핍되 있는 것 같습니다(엡1:3).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치유받은 나병환자였던 사마리아인처럼 감사를 하지 않으면서

지금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이(저) 아무개(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눅 18:11)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과 손으로 쓰는 글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수 없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보면

왠지 우리는 그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는 것을 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9절).

그것도 우리는 알지 못하고 매 주일 예배당에 올라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바리새인의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실지  ...

혹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감사 기도'가 '죄악된 감사 기도'는 아닌 것인지 ... ㅠㅠ 

 

 

 

 

 

죄악을 찾으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찾으시면 ... (창 44:16)

 

 

죄악의 징검다리

 

 

의의 징검다리가 되야 할 하나님의 물질의 축복이 오히려 죄악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겔 7:19).

 

 

죄에 중독된 사람

 

 

죄악된 생각이 머리 속에 드는 것을 절제 할 수 없을 정도로 죄에 중독된 사람은

죄악된 행동의 쓴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한 것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창 6:5).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영혼은 ...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영혼은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짖눌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죄에 매여 있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참고: 시 32:3-4).

 

 

죄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고 있지 않기에 …

 

내가 죄를 범하는데 담대한 이유는 죄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전 8:11).

주님 보시기에 “악한 종”은 …

 

 

우리 보기엔 아닐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악한 종”은 … (마 24:48-49)

 

  1.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 잘못된 생각이란 주님이 더더 오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48절).

만일 지금 우리가 주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고(혹은 아예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악한 종”입니다.

 

  1.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잘못된 생각에서는 잘못된 행동이 나올 수 밖에요.

그 잘못된 행동이란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49절).

만일 지금 우리가 노아의 때에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37-39절)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악한 종”입니다.

 

  1. 외식하는 자(위선자)입니다(51절).

그는 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눅12:56).

그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멉니다(막7:6).

그는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봅니다(마7:5).

그는 겉은 깨끗히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합니다(23:25).

그는 회칠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27절).

그는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좋아합니다(6:2).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합니다(5절).

그는 헌금과 십일조 등을 철처히 받치지만 더 중요한 정의과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23:23).

 

주님은 우리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24:45).

 

  1. 그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과 같이 주님을 재림을 준비합니다(25:4, 8, 9, 13).

그는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는 자입니다(계 22:20).

 

  1. 그는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받아 “바로 가서” 그것을 사용하여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마25:16, 17).

 

  1. 그는 진실한 자입니다(계17:14).

그는 진실한 마음(벧후3:1)과 진실한 입술(잠12:19)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청지기입니다(눅12:42).

그는 진실한 일꾼입니다(엡6:21).

그는 진실한 증인입니다(잠14:25).

그는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입니다(시145:18).

 

우리 모두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회계”를 할 것입니다(마18:23, 24, 25:19).

회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둘 중에 한 마디를 하실 것입니다(25:14-30):

 

“착하고 충성된 종아”(21, 23절)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주님 안에서 약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약해야 하며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을

자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고후 12:5, 9-10, 13:4).

 

 

주님 앞에 큰 자

 

 

주님 앞에 큰 자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 입니다

(눅 1:15-16).

주님, 어떻게 저를 사랑하셨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거만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아버지께 묻고 있습니다(말 1:2,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묻는 이유는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3:18,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있습니다(말 1:6).

오히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실 때).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절, 현대인의 성경)(우리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 볼 때).

 

지금 우리는 "눈멀고 병들고 저는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악을 행하므로(8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상을 경멸하며 더러운 음식을 내(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렵혔습니까?"하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지금 우리는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17).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13).

 

우리의 완악한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소용없는 일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우리 죄를 슬퍼하며 탄식해 봐야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보기에는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되며

하나님을 시험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모든 악을 회개하고 버리고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해야 합니다(18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16절).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며 또한 아끼십니다(17절).

주님, 이러한 교회로 세워주세요.

 

 

신랑되신 주님께서

신부된 주님의 교회를 세워주시되

현숙한 여인과 같은 교회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잠 31:10).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교회(30절)와

선한 일을 행하는 선한 교회(12절),

그리고 신실한 교회로(12절)

세워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께 간절히 쓰임받기를 원하기보다 …

 

 

주님께 간절히 쓰임받기를 원하기보다

주님의 손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길 원합니다(요 6:11).

 

 

주님께 생명을 맡긴다?

 

 

야곱: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 43:14)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

 

주님께 순종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돈을 사랑?

 

 

"브올의 아들 발람"(민 22:5),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12-13, 18, 34, 20-21, 38; 23:12, 26; 24:12-13절)

모압 왕 발락이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고 하니까(22:17; 24:11)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라고 답변을 했다(22:18; 24:13).

모압 왕 발락은 바람을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발람은 가득한 은금을 언급했다.

발람은 왜 이리 엉뚱하게 답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벧후 2:15).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마음으로는 돈을 사랑하는 자이다(마 6:24; 딤후 6:9-10).

 

 

주님께만 엎드려 절하며 섬겨야 …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했던 바베론 왕 느부갓네살은(단 2:46) 금신상을 만들어(3:1)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엎드려 절하게 만들었습니다(5절). 

그는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6절). 

그 때 다들 금신상에게 엎드려 절했는데(7절)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을 높이지도 않고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12, 18절). 

그 결과 그들은 심히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지만(19-23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28절). 

그 이유를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자기를(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28절).

우리가 엎드려 절하며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게 하실 때에

 

주님께서 기도 가운데 서로를 만나게 하실 때에 아무 의심 말고 만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당신을 사용하시사

당신이 만나는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10:20-48; 11:12-17).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은(마 7:10; 눅 7:9) 주님의 말씀으로만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 8:8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눅 7:7 - "말씀만 하사").

 

주님은 선하사 선을 행하십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 (시 119:68).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우리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우리고 고난 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십니다(67, 71절).

과연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71절).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함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히 5:8).

그것은 우리에게 "지식"(바른 판단력)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시 119:66).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65절).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인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인 것을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일(우리의 기도를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참고: 행 9:11 및 문맥).

주님은 우리의 만남을 결코 허비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남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만남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주시는 만남이나 허락하시는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우리가 보기엔 그럴 수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롬 12:2).

그 모든 만남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삼상 22:3).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

 

나로 하여금 사울 왕에게서 도망다니고 있었던 다윗처럼

"고통을 당하는 자와 빚진 자와 불만을 가진 자들"을 만나게 하시사

그들 가운데 지도자로 세우시고자 하실 뿐만 아니라(삼상 22:2)

그들의 고통과 연약함 등을 체휼케 하시고자 일 수도(히 4:15),

 

욥처럼 고통 당하고 있는 나에게 위로한답시고 온 친구들(심지어 가족들 조차도)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욥 16:2, 개역한글)

또는 "오히려 나를 괴롭히려고 온 자들"(현대인의 성경)임을 깨닫게 하시사(2절)

오직 나의 참된 위로자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자 일 수도(요 14:16),

 

한나처럼 남편 엘가나에겐 사랑을 갑절로 받지만(삼상 1:5)

그로 인해 그의 아내 브닌나에게 몹시 괴로힘과 업신과 비웃음과 조롱과 학대를 당하므로

(6-7절 현대인의 성경) 울며 식사를 하지 않을 때가 보통인데(7절, 현대인의 성경)

거기에다가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10절)

엘리 제사장에게 "악한 여자로 여"김을 받기까지 했지만(14-16절)

그 와중에서도 자기의 슬픔과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계기로 만드신 것처럼

(15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만남과 목사님과의 만남 속에서

괴로움과 오해로 인한 상처까지 받음을 통해서라도

나로 하여금 하니님께 내 심정을 통하고 다 쏟아내게 하시는 것일 수도,

 

기드온처럼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적군들의 꿈과 꿈 해몽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승리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처럼(삿 7:9-15)

하나님께서는 내 원수와의 만남을 통해서도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주시므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경배케하시고자 일 수도,

 

요나처럼 불순종하고 있는 나에게 불신자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욘1:6)

내 죄를 책망하시고 (7-10절) 회개의 결단을 내리게 하시고자 일 수도(12절),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처럼 심히 괴로움을 겪고 있었지만 (룻 1:20)

며느리 룻과의 만남으로 인해 결국에 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을 맛본 것처럼 (4:13-17)

하나님께서는 내 사위, 며느리, 자녀와 같은 가족으로 인해

나의 괴로움을 돌이켜 즐거움을 주시고자 하실 수도,

 

아버지 야곱에겐 사랑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형들에게 미움을 받은 요셉이(창37:4)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까지 하다가(20절)

결국에는 애굽에 이끌려 가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서(39:1)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욱한 누명을 받아 옥에 갇히는 일까지 겪지만(14-20절)

그 옥에서 바로 왕의 슬 맡은 관원장을 만나 그의 꿈을 해석해 주고(40장)

결국에 가서는 바로 왕의 꿈까지 해서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41장)

자기 가족을 다 구원한 것처럼 (45:5) 하나님께서는 내 형제들과의 만남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만남으로 극심한 고통과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사 그 형제들을 용서하고 돌보게 하시고자 일 수도(50:21),

등등 ...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 지는 모든 만남들을

하나님을 결코 허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을 근심케하는 그리스도인들 …

 

주님을 근심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

마음이 완악합니다.  주님을 시험합니다.

마음이 미혹되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모릅니다(시편 95편).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내 자신도 바라보지 마십시다.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시 123:1).

우리의 소망과 구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애굽 사람들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건져내셨는데(출 3:1, 9-10, 12)

건짐을 받아 홍해 바다 앞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말했습니다

(14:10-12).

 

하나님께서 우리을 구원해 주시사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우리가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옛 사람의 삶으로 돌아가 세상을 섬기면서

죄의 노예 생활을 하겠다고 말한다면?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들로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텐데 ...

 

주님을 '안다'는 의미?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로 목사님의 수요기도회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한 점)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자와 따르는 자의 차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자(민 32:11):

불신  à  불만족 à  불평  à  불순종  à  불의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12절):

믿음  à  자족  à  감사  à  순종  à  의.

 

 

 

 

주님을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 수록 의지할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주님의 기적을 제일 먼저 안 사람들

 

 

갈리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또한 그 물을 연회장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연회장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몰랐지만

그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제일 먼저 목격하였습니다(요 2:1-11).

 

주님의 종으로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주님의 영광을 제일 먼저 목격할 것입니다.

 

 

 

 

 

주님의 눈에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이다.

 

내 눈이

나를 어떻게 보든,

 

주위 사람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던,

 

주님의 눈에는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이다

(사 43:4).

 

 

주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는 ...

 

주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는

자기를 위하여

장수나

부나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자는

겸손합니다

(왕상 3:7-11).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다 이루소서

(행 13:22).

 

 

주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목사

 

 

주님의 종인 목사인 내가

주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실 때에는

크게 기뻐하면서

한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에는

매우 싫어하고 성낸다면

과연 나는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마음을 품은

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욘 4:1, 6; 요 10:11, 15)

 

 

주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 목사?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명령 따라 가는 사역자가

주님이 보시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주님이 들으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고,

주님이 아시는 그들의 근심을 모른다면 ...

(출 3:7, 9)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

 

 

모세: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이사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나에게 희망을 주며,

나의 고난 중에 위로며, 나를 살리십니다

(시 119:49, 50).

 

 

주님의 인자와 긍휼 따라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며 덮어주며 지워주며 기억지 아니하는 것은

주님의 인자와 긍휼 따라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시 51:1).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

 

먼저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하시사

우리를 위안해 주십니다(시 119:76).

 

첫째 아기 주영이를 떠나보낸 날 아침에

주님께서는 저에게 시편 63편 3절로 말씀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기의 뼈가루를 물에 뿌린 후

주님의 놀랍고 굉장한 구원의 사랑(인자하심)을 찬양케 하시사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119:76).

그리고 주님의 긍휼하심에 제게 임하므로 제가 살았습니다(7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