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할 필요가 있나요? (눅10:29)
만일 우리가 옳바른 성경적인 지식[예: 예수님의 이중 계명 (27절)]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옳바른 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예: 이웃을 사랑하여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것(30-37절)]을 하고 있다면
왜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겠습니까?
옳바른 지식과 옳바른 말만 하는 입술만 있으면 뭐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37절).
왜 책망이나 징계하지 않았을까요?
자식인 암논이 이복 누이인 다말에게
큰 악을 행한 것을 알고도
심히 노하기만 하였지
아무 사랑의 책망이나 징계를 하지 않았던 아버지 다윗으로 말미암아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미워하여
결국 2년 후에는 암논에게 복수하였습니다
(삼하 13:21ff).
왜 다윗은 다말에게 더 큰 악을 범한 암논을 책망도 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다윗 자신이 과거에 유부녀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의 남편을 의도적으로 죽인 큰 죄악 때문이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
불신자 사공들은 불순종하는 요나 선지자보다
더 주님의 뜻을 행하였습니다(욘1:14).
그리고 불신자 사공들은 불순종하는 요나 선지자의 생명을 아꼈지만(13절)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 사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0,000여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4:11).
요나가 아낀 것은 자기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준 박넝쿨(6절),
자기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넝쿨이었습니다(6, 10절).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요나 선지자 한 사람을 아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
인생의 불어오는 큰 바람과 폭풍으로 인하여
내가 사랑하는 가족 식구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므로 말미암아
마음에 큰 상처가운데서(욥 1:19, 9:17)
하나님께 반문할 때 왜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폭풍우 가운데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38:1, 40:6)
왜 하나님께서는 멀리 돌려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레셋 사람의 땅의 가까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멀리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일까요? (출 13:17-18)
저는 그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에서 “그(바로 왕)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고자(14:4),
-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인(34:28) 십게명을 주시고자(20장), 그리고
-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저는 이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멀리 돌려 인도하시는 이유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적용되는 이유를 하나로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6-40)는 명령을 주시고 우리를 겸손케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멀리 돌려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으로 인도하시면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으로 돌려 인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순종하며 살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시민권(빌3:20)이 있는 우리를 천국인으로 만드시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일까?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인데(창22:1-2)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않는지를 알려고 하신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 길로 걷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광야 길로 걷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않는지를 알려고 하신 것이다(신8: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멈추게 하였고(창22:11-12상)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자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우리를 무너트리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언약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이다(첫째 아담).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 목적은 시험을 이기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언약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마지막 아담 예수님).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을 때 도착한 곳은 가나안 땅,
그런데 그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했습니다(창 12:4-5, 10, 히 11:8).
왜 하나님께서는 기근이 심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10절)
풍부한 땅으로 인도해 주시면 안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우리의 생각과 기대한대로 풍부한 땅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박넝쿨"을 예비하시사 우리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크게 기뻐하게 하십니다.
그러시다가 하나님께서는 "벌레"을 예비하시사
우리가 크게 기뻐하는 것을 갉아 먹게도 하십니다.
그러신 후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혼미케 하시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죽기를 구하게 만드실 정도까지 가게 두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크게 기뻐하고 매우 아끼는 것을 가지고 가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욘 4:6-11).
왜 하필이면 …?
왜 하필이면 믿음이 흔들리고 영적으로 퇴보할 때에
재물(수입)이 늘어나는 것일까요? (참고: 시 62:3,4, 10)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게 하다가(마 6:24)
결국에는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미워하고 돈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딤전 6:10, 현대인의 성경).
왜 하필이면 까마귀들과 가난한 과부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먹이게 하셨을뿐만 아니라 사르밧에서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조금 기름밖에 없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아들을 위하여 마지막 한끼 음식을 만들어 먹고
굶어 죽게될 과부에게 명령하여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주게 하셨습니다
(왕상 17:3, 9, 12).
왜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들과 가난한 과부에게 명령하사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주신 것일까요?
왠만해서는
왠만해서는 하나님 앞에 겸비하지 않습니다(출 10:3).
외로움의 기회?
우리가 삶 속에 겪는 외로움은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주님의 공동체를 찾아야 하기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시려고 하시는지도 모릅니다(호 2:14).
외면 당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멀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내 목소리를 듣지도 않으면
외면 당하는 나는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물며 사랑의 주님께서
나를 멀리하시는 것 같고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며
내 신음 소리도 듣지 않고 계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시 22:1)
외식하는 우리들
외식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전통을 강조하면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멉니다(마 15:5-8).
요구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지라도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한 것을 주시지 않으셔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시 106:6).
우리의 조상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주님의 놀라운 일을 깨닫지 못하며
주님께서 수없이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지 않고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되(8절)
홍해를 마르게 하시사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9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적들을 물로 덮으시사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1절).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기다리지 아니하고(13절)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14절).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1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을 쇠약하게 하셨습니다(15절).
회개하지 않은 가운데서 욕심을 품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심이 두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기도 응답이 우리에게 "탐욕의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11:34, 현대인의 성경).
요나가 불순종한 이유?
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갔을까? (욘 1:1-2)
왜 그는 이방인 사공들에게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을까? (12절)
니느웨가 멸망을 당하기를 원하되 요나는 자기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를 통하여 경고를 받지 못하므로 결국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안으므로
하나님께 멸망을 당하기를 죽고 싶을 정도로 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멸망해야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살 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회개하길 원하셨던 것 같다.
(BRYAN D. ESTELLE, "THE GOSPEL ACCORDING TO JONAH:
Salvation Through JUDGMENT AND MERCY"를 읽으면서)
요셉과 예수님?
애굽 왕을 섬겼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 왕에게 죄를 범해서 감옥에 갇혔지만(창40:1)
요셉은 아무 죄가 없는데 감옥에 갇혔습니다(15절, 창39장).
그리고 그 감옥의 간수장은 바로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이 제일 중요한 죄수들이었기에 의로운 요셉으로 하여금 그 두 죄수들을 섬기게 하였습니다(39:23, 40:6ff.).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에 죄의 형벌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시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제일 귀하게 여기시기에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게하시기까지 우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Iain M. Duguid의 "LIVING IN THE LIGHT OF THE INEXTINGUISHABLE HOPE"이란 책을 읽으면서)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1)
형들보다 아버지 야곱에게 더 사랑을 받으므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은 요셉,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하므로 더욱 미움을 받은 요셉(창 37:3-5),
그렇게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고 계셨기에
그를 향하신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과 뜻은 바로 애굽 바로 왕의 신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12-36절).
가족 식구들에게 미움을 받는가운데서도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미움을 받는 가운데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믿을 수 있을까요?
더욱더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겠습니까?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을 믿겠습니까? (롬12:2)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2)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에게 산바 된 요셉,
사랑하는 식구들과 강제로 분리되어 외국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된 요셉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창 39:1-2).
심지어 그의 주인인 불신자 보디발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과
또한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3절).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인 불신자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게 하시므로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게 하셨습니다(4절).
그 결과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불신자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5절).
왜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을까요?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이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을 버린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사 당신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형통케 하십니다.
형통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게 하심을 보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 불신자(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사 당신을 높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그 불신자(들)의 집이나 회사에도 복을 내리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시는 것일까요?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일까요?
그 뜻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
(롬12:2).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3)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던 요셉,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했지만
요셉은 거절하였습니다(창 39:6-8).
그 이유는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이 금한 것은 그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9절).
요셉은 자기의 주인에게 충성했습니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10절).
요셉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절).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요셉이 일하러 그의 주인 집에 갔었을 때
그 집 사람들을 하나도 없고 그 주인의 아내 밖에 없었습니다(11절).
어쩌면 그녀가 요셉과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
어쩌면 그녀는 요셉과 동침하기를 결심하고 그녀의 집 사람들을 ….
그녀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라고 말했을 때
요셉은 자기의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습니다(12-13절).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그녀를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의 유혹도 뿌리치고 도망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애굽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히게 됩니다(20절).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가만 보고만 계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게 갇히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멀리라하는 말씀(욥28:28)에 순종하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이전 보다 더 큰 유혹이 점점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성적 유혹에 시달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을 그 유혹으로부터 멀리도망가고 싶지만
연약한 우리의 육신은 그 유혹으로 자꾸만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인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는데(창39:4)
왜 하나님께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날마다 동침하자고 유혹하는 것을 내버려두셨을까요(유혹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이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번 거짓 증거(14, 17-18절)로 말미암아
결국 요셉으로 하여금 옥게 갇히도록 가만히 계셨을까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그 옥에서 애굽 왕의 술 맡은 자를 만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40:1, 9-15절).
아니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이 있는 왕궁에서 왕의 술 맡은 자를 만나게 하시지
왜 하필이면 옥에서 만나게 하셨는지 우리의 이성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꿈을 꾸어서
형들에게 더욱더 미움을 받은 요셉으로 하여금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케 하셨는지 참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왕의 술 맡은 자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결국에는 꿈을 꾼 애굽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41:9ff.)
근데 왜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과의 만남도 “만 이 년 후에”(1절)
그리하셨는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빨리 좀 만나게 해주셨으면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
에서 2년 동안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술 맡은 자처럼 애굽 왕 바로도 꿈을 꾸게 하시사 (1절)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게 하시고(8절)
오직 요셉으로만 하여금 그 꿈을 해석케 하셨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 놀랍습니다.
이 낮고 낮은 땅에 거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사55:9).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4)
더 이상 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요셉,
큰 소리로 명하여 모든 하인들을 물러가게 하고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렸습니다(창 45:1).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2절).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4-5, 7-8절).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17살 때 꾼 두 번의 꿈(37:6-11)을 39살(30살의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 7년의 풍년 후 + 2년 째 흉년 = 39살)이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왜 그 꿈들을 꾸게 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리도록 허락하셨는지,
왜 억울한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게 하셨는지,
왜 애굽 왕 바로의 신하인 술관원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2년 후 바로 왕의 꿈까지도 해석케 하셨는지,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한 가정인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높이시고,
옥에서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높이시다가
결국에는 한 나라인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형)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였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인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기를 돈 주고 판 형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생명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시며 이 세상에 두시려고
요셉으로 하여금 17살때부터 39살까지 요셉으로 하여금 그 모든 미움과 죽음의 위기와 팔림과 노예 생활 및 감옥 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게 된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8절)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는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형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형들의 생명과 그들의 후손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7살 때 꿈을 꿨지만 그 꿈의 뜻을 몰랐던 요셉,
22년이 지난 39살이 되어서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22년 동안이나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지 못했는데 …
17살 때부터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 동안이나 고난을 당하였는데 …
그 와중에서도 성경에는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셉은 입술로나 행동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요셉은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잠3:5-6).
요셉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십니다.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 (5)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을 130년 보내었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창 47:8-9),
애굽 땅에서 17년을 거주하다가 그의 나이 147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왔을 때(28-29절)
그는 요셉에게 자기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29-30절)고 말합니다.
야곱은 병들었을 때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후(48장)
자기 아들들을 불러 유언을 한후 죽습니다(49장).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맹세한대로 애굽 왕 바로에게 허락을 받고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있는 묘실에 장사합니다(49:4-14).
아버지를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던 요셉(50:10)은
아버지를 장사한 후 자기 형제들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14절).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었음을 보고
요셉이 “혹시” 자기를을 미워하여 자기들이 행한 모든 악을 요셉이 다 갚을까봐(15절) 두려워했습니다(19, 21절).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네 형들이 너에게 악한 짓을 했을지라도 이제 너는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이제 당신도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16-17절, 현대인의 성경).
그 전갈을 받은 요셉은 울었습니다(Joseph wept)(17절).
예수님도 우셨는데 …(Jesus wept) (요11:35).
왜 요셉은 울었을까요? 왜 그는 형제들의 전갈을 받고 울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명령을 하신 적이 없는데
형제들이 말을 만들어 그렇께까지 거짓말하는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와서 울었을까요?
자기를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니 불쌍해서 울었을까요?
이미 자기는 형제들을 마음으로 다 용서했는데
용서를 구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니 슬퍼서 울었을까요?
아버지 야곱을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던 요셉은 그의 형제들로 인하여 다시금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요셉은 울었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시기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로 하여금 큰 고통을 겪게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와 화목하게 지내지 않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 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용서해야 합니다.
요셉은 이미 그의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형제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말하였을 때(18절)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19-21절).
어떻게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시편 34:8).
요셉은 그의 형제들이 자기를 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에
그는 형제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때에 가능합니다.
비록 형제, 자매(부모)가 나를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나에게 상처를 주며 나로 하여금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나에게 선을 이루어 나아가셨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부모)를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에는 소극적 용서(passive forgiveness)와 적극적 용서(active forgiveness)가 있습니다.
소극적 용서는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 용서는
이전 보다 더욱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급하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입니다.
간곡한 말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천국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의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욕심 가운데 드려진 기도도 들어주시는 하나님??
큰 욕심을 내어 하나님을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십니다(시 106:14-15).
영혼의 건강이 중요하나요 아니면 물질의 풍부함이 중요하나요?
"욕심꾸러기 개처럼"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
"그들은 욕심꾸러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사 56:11, 현대인의 성경).
욕심을 따를 때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를 때 음행합니다(민 15:39).
["안목의 정욕" (요일 2:16)]
욕심이 많은 사람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킵니다(잠 28:25).
욕심이 많은 사람
욕심이 많은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다툼을 일으키지 화목하게 못지냅니다.
그/녀는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한 자입니다(잠 28:25-26).
욕을 받아도 욕하지 말아야 하는데 …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벧전 2:23).
성경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3:9).
예수님처럼 이 말씀을 인간관계에서 순종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요...
상대방이 나에게 무시하는 말을 하든 상처 입히는 말을 하든
다 받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다고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으로라도 복을 빌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 주세요.
욥기 23장 10절 말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 지금이나 앞으로나 나는 내가 가는 길을 (전혀) 모르겠지만 내 주님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에겐 위로가 되며 희망을 줍니다.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고난)은 주님이 나를 단련하고 계시다고 믿으니 인내하며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주님이 고난의 용광로로 나는 단련하신 후에는 나를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하실 것을 생각하니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욥기서의 핵심?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욥기서의 핵심이 욥의 고통(suffering)이 아니라
욥의 의(righteousness)라는 말이 새롭고 흥미롭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죄 때문에 그가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였고
욥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셔서 자신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욥이 고통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셔도 아니고 그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고통을 당한 이유는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현대인의 성경) "욥이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데는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욥1:9)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자녀나 물질의 축복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허락을 받아 사탄은
욥의 자녀들과 물질을 다 쳤지만(그래서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22절).
결국 사탄은 틀렸습니다.
욥은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받은 축복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녀의 축복이나 물질의 축복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John H. Walton & Tremper Longman III의 "How to Read Job"을 읽으면서]
용서해야지 경고하면 어떡합니까?
범한 죄를 회개한 자를
용서를 해야지
세상 사람들처럼 경고하면 어떡합니까?
(눅 17: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사 7:15-1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살전 5:21-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행17: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자들 앞에서 정직하여 허물을 보이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삼상 29:3, 6).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각한 죄
외식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없는 것처럼 꾸며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속이는 심각한 죄입니다
(참고: 마 7:6; 성경해설)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임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임 중에는
유익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로운 모임이 있습니다(고전 11:17).
이러한 모임에는 분쟁과 파당이 있습니다 (18-19절).
우리는 이러한 모임과 아울러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
우리 기독교인들의 심한 패역함
우리 기독교인들의 심한 패역함은
우리의 계획과 일을 하나님께 깊이 숨기려하여
어두운 데에서 행하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하고 있습니다
(사 29:15-16).
우리 남편들은 ...
우리 남편들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지 않고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모르고
그녀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지 않으며
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다른 여자를 연모하며
다른 여자의 가슴을 안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잠 5:18-20).
우리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사람?
우리의 마음을 돌려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불신자 이성이나 배우자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해서는 아니됩니다(왕상 11:1-9).
우리 목사님들은 ...
우리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고 복잡하게 전하지 않고
다만 진리를 분명하게 전함으로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 앞에
거리낌없이 생활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고후 4:2, 현대인의 성경).
우리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아야 ...
우리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고후 2:17).
우리 목회자들의 욕심으로 인하여 …
우리 목회자들의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양 떼들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양 떼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겔 36:20, 39:7, 43:8).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마음에 둬야(명심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의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전 7:2).
우리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드려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든 인생 기차의 종착점에서 내려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주님을 사랑하였던
사도 바울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사도 요한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계22:20).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절).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마라나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 16:22, 계 22:20).
우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성전 문을 닫았으면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헛되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말 1:10).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2절),
주님을 공경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6절),
주님을 더럽게 하는(7절)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을까요?(10절)
"우리가 ..."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개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계셨습니다(요 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5절).
여기서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시는 깨달음은 2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 그 "우리" (5절) 중에 빌립은 "... 부족합니다"(7절)이라고 말했고 안드레는 "...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리" 중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계셨습니다(6절).
즉, 나는 할 수가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작은 깨달음입니다.
- 비록 나는 할 수가 없고 주님은 하실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안드레가 찾아서 데리고 온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시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저에게 주는 교훈은 나는 가진 것도 별로 없고 할줄 하는 것도 별로 없고 등등 그러할지라도 내게 있는 것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사용안하셔도 충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아이를 안드레가 남자만 5,000명이나 모인데서 찾아서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미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기에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0:13).
우리가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에(수 1:3),
-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히시기에(5절),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하셨기에(9절).
우리가 놀래야 할 점은 …
우리가 놀래야 할 점은 우리의 삶 속에 예상하지 못한 역경과 고통이 아니라
그 역경과 고통으로도 우리 자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학 2:17).
[Iain M. Duguid & Matthew P. Harmon, "Zephaniah, Haggai, Malachi"을 읽으면서]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계획하고 있으면 …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계획하고 있으면(꾀하고 있으면)(미 2: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릴 "재앙"을 계획하고 계십니다(3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
우리 사람들은 교회 건물의 "아름다운 돌과 선물로 꾸민 것을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기에
그것보다 우리가 가짜 예수를 따를 까봐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눅 21:5-9).
우리가 받길 원하는 큰 축복과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큰 축복
보통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풍족한 물질의 축복을(눅 5: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축복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축복 중에
지극히 작은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물질의 축복보다는 "재물 얻을 능력"의 축복이 더 큰 축복입니다(신 8:18).
물질의 축복은 더 큰 축복을 받는 도구일 뿐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큰 축복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으므로 회개하는 것입니다(눅5:8).
[어느 누가 회개의 축복을 물질의 축복보다 더 크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제일 큰 축복은
우리를 부르시사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10절).
[이 축복이 풍족한 물질의 축복보다 더 크고
더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쁜 곳”과 아주 ‘좋은 것’
우리가 보기에 "나쁜 곳"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없고" 없고" "없도다"입니다(민 20:5).
즉, 우리가 보기에 나쁜 곳은 우리가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나쁜 곳"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6절).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나쁜 곳"에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7-8절).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합니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쁜 곳"에서
우리의 원망의 소리도 들으시사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11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기에 "나쁜 곳"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은(사사기 18:9, 현대인의 성경)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번영을 누리"는 곳이요(7절, 현대인의 성경)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10절).
우리가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은 우리가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곳입니다(27절).
그러기에 우리는 그 아주 '좋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국에 가서는 우리는 그 아주 '좋은 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합니다(30절).
우리가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은 하나님께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빠 보일지라도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쁜 곳으로" 인도하신 것 같을 때 (민 20:5)
우리는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6절).
그리할 때 하나님깨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7-8절).
우리가 그 말씀에 믿음으로 겸손히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나빠보이는 곳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으로 바꾸실 것입니다(11절).
우리가 보기엔 참 딱한 사정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참 딱한 사정입니다(창40:14, 현대인의 성경).
요셉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바 되었으니 말입니다(39:11-23).
우리가 보기엔 분노할 만한 사정입니다
요셉이 옥에서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후
그에게 해몽되로 관직이 회복되면
분명히 자기의 사정을 바로 왕에게 아뢰달라고 부탁했는데 (40:1-22)
그가 2년 동안이나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40:23-41:1).
우리가 보기엔 낙심할 만한 사정입니다.
요셉이 2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있었으니 말입니다.
2년이란 세월을 허송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4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2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었던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2년을 결코 허송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 및 후손들을 구원하시어
이 땅에 두시고자 요셉의 삶 속에 섭리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45:7-8; 50:20-21).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은 시험이나 연단을 통하여
그/녀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고: 빌 2:22).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한 3가지를 점검해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 나는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있다(혹은 있는 것 같다)(엡 4:19).
나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롬5:13).
- 나는 점점 더 공로의식에 매여 있다 (눅18:11-12).
나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보다
내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마25:44).
- 나는 점점 더 교만해 지고 있다(잠21:4, 겔 28:5).
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길 좋아한다(요12:43).
우리가 아끼는 사람, 하나님께서 아끼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우 아끼는 것이나
매우 사랑하는 사람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롬 8:32)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 알기 원하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아끼는 그 것이나 사랑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에 하나님께 겸손히 믿음으로 받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아끼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뢰하는 것을 끊으시는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끊으시사
우리로 하여금 부족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근심하며 두려워 떨며
우리 죄악 중에서 쇠퇴하게 하십니다
(겔 4:16-17).
우리가 점점 더 약해져 갈 때에 …
우리가 점점 더 연약해져 갈 때에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것은 내 책임이 크다. 내 잘못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충분히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시편 109편 4절 하반절 말씀을 붙잡습니다:
"... 나는 기도할 뿐이라"(but I am a man of prayer).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에
엎드려 무릅끓고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겸손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운동력있는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사 그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낙심한 마음에 역사하시어
우리의 영혼을 다시금 소성케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요 12:26).
우리가 지혜롭게 행하면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지혜롭게 행하면 우리는 사람에게도 높임을 받고
또한 모든 사람들도 우리가 높임을 받는 것을 합당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질투하며 두려워하고 우리의 평생에 대적이 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삼상 18:5, 9, 12-16, 20, 28-30).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대하는 구원(건지심)은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대하는 구원(건지심)은 더 나은 상황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건지심)은 우리가 보기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스스로 구원할 수(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케 하시고자 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달아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고자 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케 하시고자 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경원 목사님의 "하나님의 길, 요나의 길" 주일 설교를 들으면서 요나 선지자가 바다에 던져진바 되었을 때(욘1:15) 어쩌면 그가 기대했던 구원은 큰 물로기 뱃속이 아니라(17절-2:9)
곧장 육지로 건짐을 받는 것(2:10)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대하 20:19)
우리 삶에 아무 문제가 없고 고통도 없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고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큰 어려움과 힘든 일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그 큰 어려움과 힘든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경험하고 있기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21절).
어떻게 그 큰 어려움과 힘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그 큰 어려움과 힘든 일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무능력함과 어찌할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12절)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말씀을 받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찬양의 능력과 역사는
우리가 믿음으로(20절) 하나님께 노래와 찬송을 시작할 때에(2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도 응답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22-24절). 할렐루야!
우리가 해야 할 기도와 고백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시115:1).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눅17:10).
우리가 행진하기 위해선 ...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기 위해선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알아야 합니다(민 10:29, 3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처를 향하여
우리가 행진하기 위해선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안식일에 안식을 해야할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주님이 안써주셔도 감사, 써주셔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도구로써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구로서 주님께 쓰임 받은 후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 감사해야합니다.
그저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눅17:10).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레 18:30).
우리는 마음과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우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우리는 마음과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수 23:14).
우리는 미리 걱정, 하나님은 먼저 해결
우리는 미리 걱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미리 해결해 놓으십니다
(참고: 신 1:30, 33).
우리는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가증한 일들로 인해
근심 중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스 9:4-6).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고 계십니다(요 17:16-17).
우리는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계속해서 악을 행하여 우리의 욕심을 이루고 있습니다(렘 3:4-5).
그러면서도 우리는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창녀의 낯"을 가졌기 때문입니다(3절).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식구조가 너무나 빨리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변화되어가도 있되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눅17:3).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롬12:21).
우리는 악을 행하기보다 선을 행하므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벧전 3:17).
비록 우리는 선을 행하나 상대방이 악으로 갚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외롭지만(시35:12)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살후 3:13).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시34:14).
우리는 어떠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본보기입니까(고전11:1) 아니면
악(우상숭배, 음행, 주님 시험, 원망)을 즐겨하는 자들의 본보기입니까?(10:5-11)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기 아내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서
그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려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창 12:1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과 짝지어 혼합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호 7:8),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는 우리들(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은 교만한 우리들(10절),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우리들(11절),
이렇게 범죄하는 우리들을 그래도 건져주려고 하시는 하나님(13절),
우리들을 힘있게 하시는 하나님(15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시 106:7).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잊어버렸습니다(51:12).
우리는 첫 사랑을 버렸습니다(계 2:4).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렸습니다(시106:13).
오히려 우리는 욕심을 내어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14절).
그 결과 우리의 영혼은 쇠약하게 되었습니다(15절).
결국에 가서 우리는 구원자 하나님까지 잊어버렸습니다(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45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옵소서'(4절).
우리는 자만해서는 아니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니아다"라고 말한 사도 베드로(마26:35),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70, 72, 74절).
그리고 그는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75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자신만만해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자만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철철히 무너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만은 철철히 깨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철철히 미워할 필요까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철철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만을 신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