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믿는 자만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창 22:8,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출 39:1, 5, 7, 21, 26, 29, 31, 32, 42; 40:19, 21, 23, 25, 27, 29, 32).

 

"모세가 그 마친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했습니다(43절).

 

  1.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종을 통하여 주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종은 주님의 명령을 주님의 백성에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1.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여 모든 일을 마치면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은

사울 왕에게 좇겨 도망다니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금하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 왕의 옷자락을 벰으로 마음이 찔렸습니다

(삼상 24:4-6).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다니고 있었을 때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신을 저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마땅하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삼하16:5-13, 19:21-23).

그러나 다윗 왕은

시므이를 무죄한 자로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상2:9).

 

 

 

"여호와의 동산" 같으면 뭐합니까?

 

 

우리 눈으로 볼 때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으면 뭐합니까?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

(창 13:10, 벧후 2:7-8)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치고 진영에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머물러 있기도 하고, 행진을 하기도 했으며

또한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습니다

(민 9:18, 19, 20, 22, 23).

 

 

연보를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께 연보를 드림에 있어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마음에 정한 대로 하되 전에 약속한 연보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즐겨 내야 합니다(고후 9:1-7).

 

 

 

연약하고 피곤한 심령을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시며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잠을 주십니다

(렘 31:23-26).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계속해서 꾸준히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가뭄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고: 렘 17:8).

 

 

열매 없는 열심?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 왔는데

열매가 없어 보이면

충분히 낙심할 수 있습니다

(참고: 왕상 19:10, 14).

 

 

 

염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활일지라도

 

 

충분히 염려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막 4:19)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마 6:34, 눅 12:22, 빌 4:6)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벧전 5:7).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날까지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 8:1).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하나님의 법"(7:22, 25), "믿음의 법"(3:27)]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의 법에서(8:2, 참고: 7:23, 25)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8:2).

 

우리는 죄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7:23, 25, 8:2).

우리는 죄에게 종 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었습니다(6:6, 16, 17)

우리는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6:23, 8:2).

 

이젠 우리는 영생(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6:22, 23).

이젠 우리는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18절). 

이젠 우리는 하나님께 종이 되었습니다(22절).

 

그러므로 이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시 40:8).

그러므로 이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마 6:33).

그러므로 이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 답게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눅10:27).

 

우리 모두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날까지(8:21)

참된 자유인 답게 주님의 뜻인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영생과 사랑이 그 속에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나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는 자는

영생과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합니다(요일 3:15, 17).

 

 

영생에 관심만 있는 부자?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기 보다

이 땅에 쌓아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큰 부자들은

영생에 관심은 있지만 그 영생의 삶인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자기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눅 18:18-25).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행 13:46).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39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39절).

그러나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인 이방인들은(48절)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39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찬송했습니다(48절).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착함이나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영생이란?

 

 

영생은 참된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3, 현대인의 성경).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갈 5:22-23).

 

주님 안에 산다는 것은(요일 2:6)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5절).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 안에 사는 것(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영생이란? (2)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영생을 그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 (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이것은 첫째로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도 의미하지만

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에 우리가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요17:3) 나누는 가운데 주시는 내세의 축복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성령님의 성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마나 맛보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의 축복은 평안입니다. 

비록 평화가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부분적으로마나 영생의 축복인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악행이 많고

우리의 죄가 허다하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난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에

인자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렘 30:11-15; 31:2-4).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다가오는 저 세상인 천국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세상에서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이란

천국에서 충분히 누리겠지만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살면서(요일2:6)

주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될 때에(5절)

우리 마음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므로(요 15:11)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죽음??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참고: 요일 1:2)

 

 

 

영적 스펙?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영적 스펙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직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빌 3:8).

 

 

 

 

영적 탐지기?

 

 

건물 안에 연기 탐지기(smoke detectors)가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영적 탐지기(spiritual detectors)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영적 탐지기가 제대로 작동이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 옵 1:7 - 영적 지각).

"영적 혈관"이 막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어제 주일 만난 사람들 중 두 형제님이

혈관에 문제가 있어서 큰 일을 당했었다.

한 분은 혈관에 '피떡'이 있어서 심장 마비(?)가 올 수 있을 정도였던 것 같았고,

또 다른 형제는 실제로 뇌출혈이 작은게 왔었다.

 

오늘 이 아침에 이 두 형제님이 생각났는데

동시에 생각난 말씀이 마태복음 13장 22절이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나는 생각난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영적 혈관"이 막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그 영적 혈관이 막히는 이유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또 듣지만

영적 혈관이 점점 더 막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러다가는 영적 혈곽이 꽉 막히게 되면

주님을 향한 마음 사랑에 심장 마비가 올 수 있지 않을까?

주님을 알아가는 머리 지식에 영적 뇌출혈이 올 수 있지 않을까 ...?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

(엡 4:14).

영적인 사랑   vs.  육적인 사랑?

 

 

"영을 따르는 자"(롬8:5), 즉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도 사랑합니다.

사랑하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영적인 사랑이지 결코 육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데

그 형제/자매는 나의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받아주지 못하고 육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기쁨, 우리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영혼 구원(복음전파)에 헌신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하므로 죽어가는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때

천국의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것이다.

 

[2016 승리 36주년 말씀집회 첫째날 주신 말씀 묵상]

"영혼의 닻" 같은 "이 소망"

 

 

 

"영혼의 닻" 같은 "이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갑니다(히 6:19).

그 "휘장 안"으로 "앞서 가신 예수"님(20절)은

우리의 "영혼의 닻" 같으신 소망이 되십니다.

이 소망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17절)인 우리에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2:20).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히6:18) 주님이시요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는 주님께서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으므로(17절)

반드시 우리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계22:20).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의 닻"을(19절)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과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내려서

믿음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고 신앙 고백하면서

선장되신 주님의 배를 우리의 "피난처"로 삼아 "큰 안위"를 받으면서(히6:18)

저 천성을 향하여 향해하십시다.

 

<새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3절) "큰 소리로 물결을 명하시면 이 바다는 고요히 잠자리라

저 동녘이 환하게 밝아올 때 나 주 함께 이 바다 건너가리

<후렴>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https://youtu.be/p-Kbz8QjwGQ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요 2:19-21).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한 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텐데 ...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의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므로

사람들이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텐데 ...

(행 26:20-23)

 

 

 

 

예수님과 바울

 

 

로마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해서

"이 사람은 죄가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눅 23:4, 14-15, 22).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했습니다(16, 20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막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21, 23절).

 

로마인은

사도 바울을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반대했습니다(행 28:18-19).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막 8:12).

그 이유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는데(마 16:4)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막8:11).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요나의 표적이(마12:39) 가리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참고: 31절)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잡혀가시던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었던 사도 베드로(눅22:54),

예수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55-60절)

닭이 곧 울었고(60절)

주님께서는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61절).

 

왜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자기에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니이다"라고(마26:35)

말했던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아니면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를 보셨을까요?(마4:19)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 16:16-17).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행 9:5, 20, 22).

예수님을 멀리서 따랐던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

그러므로 잡혀가시던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갔던 그를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보셨습니다

(눅 25:61).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라도 예수님을 좇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미워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참고: 롬 9:13)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핍박을 하던 자가

이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빌 3:10).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1)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2)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

(3)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4)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셨다(중생).

(5) 하나님께서 회심케 하셨다(회개와 신앙).

 

 

 

예수님을 믿지 않는 며느리(사위)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며느리(사위)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창세기 26:35)

내 삶이 싫어졌고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이리이까"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27:46)

 

 

 

예수님을 본 받는 목사님은 …

 

 

예수님을 본 받는 목사님은

불량배 같은 교인들이 멸시를 해도

잠잠히 침묵합니다

(삼상 10:27).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역경 속에 있는 형제, 자매를 위로하며

믿음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형제, 자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나게 해야합니다(고전 4:17, 살전 3:2).

우리는 그 형제, 자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므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빌1:27).

 

 

예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범하므로

예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참고: 롬 2:23).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

 

 

예수님을 안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합니다.

(요일 2:3-6)

예수님의 "강생"과 "강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

 

 

예수님의 "강생"과 예수님의 "강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초림" 때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이 세상에 보내실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보내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예수님의 계명, 바울의 이웃 사랑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2:39)

사도 바울의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가

믿음이 약한 형제를 기쁘게 하되 그 형제의 약점을 담당하고(책임을 지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롬 15:1-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1)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사 53:3).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 53:3).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항상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요 11:42).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기도

 

 

무죄하신 예수님을

(눅23:4, 14-16, 22)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신21:23; 갈3:13)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한 유대인들을 위하여

(눅23:2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34절).

 

 

 

 

 

예수님의 제자는 …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깨닫습니다. 

다 버리고 주님만 따릅니다. 

주님께서 그를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눅 5:1-11).

 

(2017. 6.30., 첫째날 말씀집회 때 받은 교훈)

 

 

 

 

 

예수님이 드리셨던 특별 기도

 

 

예수님이 드리셨던 특별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몹시 괴로워하시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특별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특별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막 14:32-36).

 

제가 "아빠 아버지께"(36절) 드리고 싶은 특별 기도가 있습니다.

그 특별 기도는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제 생명이 요구되는 때에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

주님께서 제 생명을 받치는 특별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는

특별 기도를 아빠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어 사역 금요 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을 통하여 설교 말씀을 듣고 기도한 후

영어 사역 금요 기도회를 마친 후 두 지도자 형제들과 찬양과 기도를 드린 후]

 

 

오늘 아침에 받는 4가지 교훈

 

 

  1. 당장 분노를 내지 말고 참고 또 참자(잠 12:16).
  2. 함부로 이웃에 대하여 헌담하지 말고 입술을 절제하자(잠잠하자)(11:12-13).
  3. 마음에 미움이 있지 않나 점검하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10:12, 18).
  4. 상대방의 책망도 나에게 유익되게 하자(9:7-9).

오랫동안 품고 있는 악한 생각

 

 

표출된 행동의 죄, 사람들은 알고 있는데 나는 모르고 있는 죄,

표출된 행동의 죄, 사람들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죄,

숨기고 싶은 행동의 죄, 나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길 원하는 죄,

숨겨진 행동의 죄,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죄,

숨겨진 생각의 죄, 생각의 영역에서 내가 수 없이 범하고 있는 죄,

악한 생각의 죄, 생각의 영역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범하고 있는 악한 죄,

악한 생각의 죄, 생각의 영역에서 내가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품고 있는 죄.

 

오늘 주님께서는 나에게

"네가 악한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렘 4장 14절, 현대인의 성경).

 

이 악한 생각을 오랫동안 품고 있다보면

"악을 행하기에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합니다(22절).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더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5장 21절).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22절).

"고집세고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주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23절).

나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복"을 빼앗겼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속에 없는

"바람"과 같은 거짓 목사들(13절)의 거짓 복음

["다른 복음"(고후 11:4; 갈 1:6-9)]과

그들의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을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렘 5장 31절).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런 일을 보고서도 어찌 그들을 벌하지 않으며

이런 민족에게 보복하지 않겠느냐?"(9, 29절).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 보이길 원합니다(눅 9:36).

 

 

 

오히려 악을 만들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그들의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그들을 향한 분노를 그치고 버려야 합니다.

안그러면 오히려 악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시 37:7-8).

 

 

 

오히려 지금 우리는 …

 

 

우리는 죄악을 떠나 주님의 진리에 초점을 맞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떠나 우리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단 9:5, 13).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

 

 

담대히 나갔던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 뒤에 애굽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던 것을 보면 그들은 광야에서 애굽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만큼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출 14:8-12).

 

그런데 그들은 신광야에서 고기 때문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16: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심히 두려워 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나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

 

  1.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자신을 알아갑니다.
  2.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3. 겸손합니다.
  4. 비판을 받되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5.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과 잘못을 속히 인정합니다.
  6. 잘못을 보면 담대하게 마주칩니다.
  7.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알되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다.
  8.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임한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합니다.

 

 

온전하고자 하는 자

 

온전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이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지 압니다(마 19:20, 21).

옳바른 가치관을 가진 현숙한 부모는 ...

 

 

현숙한 부모는 옳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진주보다 더 값진 현숙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조금 전 수요기도회 때 "현숙한 여인"인 룻에 대해서(룻 3:11) 묵상하면서

적용하되 현숙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한 가지만 설교한 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 한 가지란 현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이다.

룻이란 모압 여인이 보아스라는 유대인 남자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2:10).

그리고 룻은 보아스에게 "내 주여 내가 당신케 은혜 입기를 원하니이다"라고 말했다(13절).

룻은 보아스에게 그가 베풀어 준 은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그 은혜에 감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보아스에게 더욱더 은혜 입기를 사모했다.

이것이 바로 현숙한 여인이다, 은혜를 사모하는 여자.

나는 현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사모하고 싶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겸손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큰 죄인이어늘 어찌하여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저를 돌보시나이까'라며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내 마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자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듯이(롬 5:20)

신앙 생활의 여정에 내 죄를 더욱더 깊이 많이 깨달아 가면 갈 수록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에게(딤전 1:15)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쳐날 수 밖에 없다.

그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싶다.

비록 그 은혜의 바다의 표면에는

풍랑과 파도라는 위험과 위기과 고통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은혜의 바다 깊은 속에서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가고 있듯이

내 삶의 현실에 어떠한 풍랑과 파도가 있다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는 진주보다 귀한 예수님의 마음(심장)으로 변화되길 기원한다(빌 1:8).

그러므로 나 또한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 은혜의 힘으로 다른 지체들보다 더 주님의 일에 수고하고 싶다(고전15:10).

그러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시길 기원한다(갈2:20).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주님이 명하신 일을 다 마친 후에 이렇게 겸손히 고백하고 싶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저는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내가 먼저 이러한 현숙한 그리스도인 되고 싶다.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이러한 현숙한 그리스도인되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우리 자녀가 현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움 받길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 자녀가 현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자기를 위한 현숙한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찾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현숙한 배우자는 진주보다 더욱더 값지기 때문이다(잠 31:10).

 

 

 

 

 

옳바른 판단 .. 결심 .. 실행

 

 

성경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옳바른 판단을 내린 후 실행으로 옮기려고 결심을 했다면

그대로 해야합니다.

사람들의 큰 소리로 하여금 이기도록 내버려두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그들의 뜻대로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참고: 눅 23:4, 15, 22-25).

 

완고한 마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거든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히 3:7-8).

 

완고한 마음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된 마음으로서(13절),

하나님을 시험하며(8, 9절)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며(15절),

미혹되는 마음으로서 주님의 길을 알지 못하며(10절),

하나님을 믿지 않고(12, 19절) 순종하지 않는(18절; 4:6)

악한 마음입니다(3:12).

 

 

 

왜 결과가 내가 기도하고 기대한대로 되지 않은 것일까?

 

 

 

왜 결과는 내가 기도하고 기대한대로 되지 않은 것일까?

 

나는 내 기도의 열매(마7:17)를 통해 내 마음을 뒤돌아 보아야겠다.

 

내가 기도하고 기대한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나는 하나님께 잘못 구하였기 때문이다(약 4:3).

 

나는 내가 접한 상황의 반응인 두려움(출 1:10)과 근심(12절)가운데서

내가 지혜롭게(10절) 구한답시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구한게 아니다.

나는 주님의 원하시는대로가 아닌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께 구했다(참고: 마26:39).

왜 결실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만

사탄이 즉시 와서 뿌려진 말씀을 뺏앗아 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기에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막 4:14-19).

 

 

왜 그런 남자랑 결혼을 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잘 이해가 안됩니다.

왜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 아비가일이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미련한 부자 나발하고 결혼을 했는지 ...?

(삼상 25:2-3, 25)

 

 

왜 그리 빨리 잊어버리고 속히 떠나는 것일까?

 

 

예배를 드리고 뒤돌아 서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예배당을 떠나서 가정과 세상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빨리) 떠나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참고: 신 9:12, 16).

왜 그리도 열심히 ...?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행 26:7)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9절)

우리 인간의 노력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과

그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기에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주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것일까?

 

 

왜 나는 주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것일까? (요 6:6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나의 불신앙 때문이다.

 

(존 맥아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교회를 복음화해야 할 것인가"

in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를 읽으면서)

 

 

 

 

 

 

왜 나오미는 그리도 괴로웠을까?

 

 

성경 룻기서에 나오는 나오미가

자기 고향 유다 여인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뜻: "나의 즐거움")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뜻: "쓰다")라고 불러달라 한 이유는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에 풍부했지만

모압 땅에서 다시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는

빈손이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룻 1:20-21)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겠지만 (3, 5절)

어쩌면 그 궁극적인 이유는 그녀는

자기 남편의 대를 이을 손자가 없어서

자기를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라고 말한 후(4:14-15)

그 아기에게  "오벳"아라고 이름을 지어주면서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17절)

(오벳은 그녀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됩니다(16절).

 

 

 

 

 

 

 

 

 

 

 

왜 내 뜻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욘 3:10).

니느웨 백성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0절).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4:1). 

그는 죽고 싶을 정도로(3절)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기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였습니다(3:4). 

그래서 그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내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4:5). 

그가 기대한 "무슨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니느웨 성읍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3:4). 

왜 우리는 입술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내 뜻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다른 여자의 가슴을 안으려는 것일까요?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고

그녀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해야 하는데

왜 "음녀를 연모하"며

왜 다른 여자의 가슴을 안으려는 것일까요?

(잠 5:18-20)

 

 

 

왜 마음에 시기가 가득한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종교적 예식에 익숙한 사람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합니다

(행 5:17).

 

 

 

왜 믿음이 견고하지 않은 것인가?

 

 

나의 믿음이 자라나 믿음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 신앙에 유익한 고난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시 119:67, 71).

 

 

왜 번제물의 가죽을 벗겨 태우지 않고 제사장에게 주었을까?

(레위기 1:6, 7:8)

 

 

 

어쩌면 그 이유는 …

 

  1. 죄인을 심판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2. 이스라엘/유다가 이방인 적군들에게 침략을 당하였을 때(‘벗기다’라는 단어의 또 한가지 의미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복을 벗겼음(겔16:39, 23:26; 미2:8)
  3.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채색옷을 벗김(창37:23);
  4. 아론이 죽기 전에 그의 옷을 벗김(이스라엘의 과거의 죄로 인하여)(민20:26, 28).
  • 진정한 아론이 되시는 의로우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심?

 

  1. 죄와의 싸움에 승리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2.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죽은 자 또는 죽임을 당한 자를 벗겼음(삼상 31:8; 대상10:8)
  •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드려진바 되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

 

  1. 죄인을 사랑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2. 요나단이 자기 생명보다 사랑했던 다윗에게 자기가 입고 있었던 겉옷을 벗어 주었음(삼상18:4)
  • 의로우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셨음.

 

  1. 흥미로운 관찰: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다가(마27:28) 회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혔음(31절).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눴음(35절).

 

 

 

 

왜 사람이 변질되는 것일까요?

 

 

왜 사람은 변질되는 것일까요?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은 처음에는 베푸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순종했었습니다(창24:31-34, 50-51).

그런데 야곱의 장인인 라반은 나중에는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31:7, 14-16, 41-43).

 

그 원인이 뭘까요?

저는 그 원인을 창세기 30장 27, 30절이라 생각합니다:

"라반이 그(야곱)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  내가(야곱이) 오기 전에는 외삼촌(라반)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

즉, 라반이 변질된 원인은 소유가 번성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는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말미암아 주신 물질의 복을 겸손히 누릴 수 있는

신앙과 성품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안에서 꾸준히 변화되지 않는 자는

재물의 풍부함으로 말미암아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사탄은 우리를 막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습니다

(살전 2:17).

그러나 사탄이 바울을 막았습니다(18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바울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1:6)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 때(2:14)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눅 8:12-14).

 

 

 

"왜 여러분 자신을 가르치지 못합니까?"

 

 

“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여러분이 도둑질하고”(롬 2:21, 현대인의 성경).

 

가르치는 자세보다 배우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성도님들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적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자아반영, 자아성찰).

잘 배우는 자가 잘 가르치는 자입니다.

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끊으시는 것일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도(신6:3; 11:9; 26:9, 15; etc.)

기근이 들게 하시사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습니다(시105:16).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신 것일까요?

 

오직 하나님만 의지케 하시고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이루시고자?(창 12:7)

애굽으로 이주케 하시사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번성케 하시고자? (출1:7, 12, 20)

그러므로 결국에 가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해 주시고자?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런 저런 "기근"이 들게 하시사

우리가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시는 이유는 ...?

 

 

 

 

 

 

 

 

 

왜 이런 괴로운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

 

 

왜 이런 괴로운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삼상 22:3)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주신 일들이든지

아니면 허락하신 일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나에게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일도 보이는데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고후 5:7, 현대인의 성경).

 

 

 

 

 

 

 

 

 

 

 

 

 

 

 

 

 

왜 이리 사람들이 변한 것일까요?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은

하나님께서 조카 야곱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복 주신 줄을 깨달았습니다(창 30:27).

조카인 야곱도

자기가 외삼촌 라반은 집에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었지만

자기가 라반은 집에 온 후로는 번성하여 떼를 이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이유가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30절).

 

그런데 야곱이 라반의 집에 있는지 20년이 되었을 때(31:41) 자기 외삼촌 라반은 안색을 보니까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2절).

그리고 라반은 아들들도 야곱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였습니다(1절).

 

왜 이리 사람들이 변한 것일까요?

왜 라반은 야곱을 전과 같이 대하지 못한 것일까요?

왜 그는 야곱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도 복 주신것을 알면서도

야곱을 전과 같이 대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왜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으로 인해 자기 아버지 라반이 하나님께 복 받은 생각은 하지 않고

야곱이 자기 아버지 라반은 소유를 다 빼앗았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야곱이 "매우 번성하여 양 때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아져서 그랬던 것일까요?(30:43)

 

제 생각엔 이 모든 것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31:3, 참고: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