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골 골짜기”
"아골 골짜기"(수 7:24, 26),
그 의미는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다음 성인 아이 성에서는 전쟁에서 패하므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 원인은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받쳤어야 했는데(6:17)
온전히 바친 물건을 "탐내어"(7:21) 그것을 가져가고 도둑질하여 속이고 그것을
자기 소유물 가운데 숨겨두었기 때문입니다(1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이요(11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범죄한 것입니다(1, 11절).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6:18)
아간이 "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져가 숨기므로 말미암아(7: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고(12절)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12, 13절)
아이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패하여(4-5절)
마음이 놀아 물 같이 되었고(5절)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25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2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13절).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아간(15, 18절)과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24절)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르 크게 쌓았"습니다(25-26절). 그리했을 때에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쳤습니다(26절).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새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2절)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아끼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 아끼는 마음이 없이
반드시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신 15:10).
하나님께서는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더 이상 아끼는 마음이 없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롬 8:32).
그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아끼십니다.
아내가 불평을 할 때에 ...
아내가 불평을 할 때에
주로 남편의 반응은 또 불평을 한다는 생각 속에서
아내의 불평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논리적인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
내 아내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남편들은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또 불평한다'고
아내에게 짜증 뿐만 아니라 화까지 내기도 합니다.
무엇을 더 어떻게 하라고 저리 불평하는지
낙심까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남편들이 아내의 불평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외면하다보면 아내의 마음에는 불만족이 더욱더 쌓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남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남편들이여!
아내의 원망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출 16:9, 12).
그리고 우리 남편들은 아내의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통해
아내의 마음의 불만족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참고: 12절ff.).
“아니오”와 “예”를 분명히 해야 …
NO 탐심, YES 열심 (행 20:33-34).
아름다우므로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참고: 겔 28:17).
아무 것도 아닌데 ...
우리는 우리가 뭔가 된 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3:7).
아무 공의가 없는 자이기에
아무리 누군가 나를 모함하여
내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
나를 오해하고 나에게 뭐라 말씀을 한다 할찌라도
그 분이 나 같이 아무 공의가 없는 부족한 죄인에게
배풀어 주신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나는 그 분에게 아무 할말이 없이
그 분의 처분대로 따라야 한다
(참고: 삼하 19:24-30).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사 16:6) ...
피곤하도록 봉사하는 것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2절).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12절).
자랑하는 것 헛됩니다(6절).
주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를 그치게 하십니다(10절).
그리고 주님은 그 즐거움과 기쁨을 돌이켜
슬픔과 근심(7절)과 눈물과 울음으로(9절) 바꾸십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데 ...
아무 유익이 없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목숨을 돈과 바꾸고 있습니다
(막 8:36-37).
아버지 다윗
오늘 아버지 주일을 맞이하여 역대상 28장9-10절 중심으로
아버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아버지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어떠한 삶의 본을 보여 줘야 하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라’고 말했습니다(9절).
다윗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아들 솔로몬에게 전승시키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 은 바로 ‘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하나님께 형통의 복을 받길 원했습니다(왕상2:3).
둘째로,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고 말했습니다(대상28:9).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께 형통의 복을 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받은 형통의 복을 지키길 원했습니다.
그 비결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를 택하여 거룩한 성전을 건축케 하신 하나님의 일을 담대하게 행하라’고 말했습니다(10절).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담대하게 주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행하라고 말씀한 이유는
아버지 다윗이 생각하기엔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은 큰 일인데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연약했기 때문입니다(29:1).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섬김은 ...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섬김은
주님을 섬기되(요12:26)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행 20:24).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
나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 (애3:33),
내가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하고 있을 때(1절),
내가 "어둠 안(속)에서" 걸으며 또한 살아가고 있을 때(3, 6절),
나를 "고통과 수고"로 포위하시며(5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을 때(7절), "내 길들을 막으"셨을 때(9절),
내 마음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셨을 때(17절) ...
내 "스스로" 내 자신에게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8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54절)라고 말할 때에
바로 그 때에 그래도 나는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55절).
그런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물리치"셨다.(8절).
이렇게까지 나에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 (33절).
독생자 예수님에게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받아야 할 모든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받으시고 고난 당하고 계셨던 예수님,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기도를 물리치신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마음?
자기 딸 디나가 세겜 땅의 추장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창 34:1-5)
세겜이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에게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고 말했습니다(11절).
그 때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자기 자신이 형 에서에게 은혜를 입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33:8, 10, 15)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34:14-17).
그 때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자기 자신이 형 에서의 축복을 대신 받고자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27장)
야곱의 아들들이 거짓말로 속여 할례를 행하게 만들었을 때
세겜은 야곱의 딸인 디나를 사랑했기에
할례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했습니다(34:19).
그 때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지난 날에 자신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녀를 얻고자 일한
세월 7년을 불과 며칠처럼 여겼던(29:20)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의 형 에서가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33:5).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이여야 합니다.
아비멜렉 왕 vs. 다윗 왕?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창문으로 보고
"그녀가 분명히 당신의 아내인데도
어째서 당신은 그녀를 누이동생이라고 하였소? ...
당신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였소?
하마터면 내 백성 중 하나가 당신 아내를 가까이하여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을 뻔하였소'라고 말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은 반면에(창 26:8-10)
다윗 왕은
저녁 때에 자신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충실한 군인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고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 여인과 동침하고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까지 죽이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11장).
아비멜렉 왕과 바로 왕?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된 이삭에게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한 것처럼
(창26:12-16)
애굽 왕 바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반드시 알아야 될 일이 있다.
네 후손들이 외국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400년 동안 종살이하며 학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벌할 것이니
그 후에 네 후손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올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대로(창15:13-14)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출1:7)
애굽 사람들에게 400년 동안 종살이하며 학대를 받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10번째 재앙으로 인하여
애굽 나라에 모든 장남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이 모조리 죽은 후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너희와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은 일어나 즉시 내 백성을 떠나라”고 말하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빨리 그 땅을 떠나라고 재촉했습니다
(12:29, 31, 33).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막 8:17, 21).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16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고(마16:12)
"경고"하신 것인데(막8:15)
우리는 마음이 둔하여(17절)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 21절).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와
사두개인들처럼 세속주의 및 물질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는 것은
지금 우리에겐 회개의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스 10:2-3).
아첨하는 것은 그물을 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이웃이 죄를 범하고 있는데
내가 그 이웃을 사랑으로 책망하기 보다
오히려 그 이웃에게 아첨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이웃의 발 앞에 그물을 치므로
스스로 올무에 빠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잠 29:5, 6).
아첨하는 사탄
우리가 환난과 역경 중에 있을 때
사탄은 마치 개가 꼬리를 치듯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타협하여
편한 길로 가도록 아첨합니다(박윤선)(살전 3:3).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지금 오는 주일 교회 주보를 작성하고 있는데
성경문답 부분을 하다가 시편 143편 8절 말씀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저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새벽기도회는 큰 도움과 힘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 때 묵상하고 전하고 다시 묵상하면서
말씀 묵상 글을 쓰는게 저에겐 큰 힘과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 묵상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저로 하여금 주님을 의뢰케 하실 뿐만 아니라
제가 다닐 길을 알려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순간에도
이 시편 143편 8절의 귀한 말씀을 받고 주님께 제 영혼을 드립니다.
아픈 책망도
주님 안에서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아픈 책망도 겸허히 받는 것입니다(잠 27:6).
아픔 속에서의 기쁨?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은
고통스러운 일 때문이기 보다
그 고통스러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려 보고 계시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아픈 가운데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믿음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13편)
(Mark D. Futato 교수님의 "The Book of Psalms" 주석을 읽으면서)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
"망령되고 헛된 말"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말로써
유익이 하나도 없고
다툼만 일으키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트리며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딤후 2:14, 16-18).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옛 속담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삼상 24:13).
다윗은 사울 왕을 선대했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학대했습니다(17절).
다윗은 불량하고(25:17) 미련한 (25절)
나발에게 선을 행했지만
나발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21절).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고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습니다
(렘 4:22).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고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악인의 마음
남의 재앙을 원하는 악인의 마음은
은혜를 배풀 줄을 모릅니다(잠 21:10).
악인의 소득은 ...
악인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재물은 더욱 불어나지만(시 73:7, 12)
그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고(잠 10:2)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릅니다(16절).
악인의 형통, 의인의 고통?
악인이 형통한 것은 죄입니다(잠 21:4).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은혜입니다(빌 1:29).
악인이 형통한 것은 죄입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은 죄입니다(잠 21:4).
그러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투하는 것은? (시 73:3)
악평하여 원망하게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지 않고 악평하므로
온 교회 회중으로 하여금
주님의 종을 원망하게 한 사람(들)은
재앙을 만날 것입니다
(참고: 민 14:36-37).
악한 눈이 있는 자 vs. 선한 눈을 가진 자
하나님 보시기에 인색한 사람(a stingy man)은 "악한 눈이 있는 자"입니다(잠 23:6).
그 이유는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기 때문입니다(28:22).
우리는 이러한 자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23:6).
하나님 보시기에 너그러운 사람(a generous man)은 "선한 눈을 가진 자"입니다.
그 이유는 선한 눈을 가진 자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기 때문입니다(22:9).
우리는 이러한 자와 식탁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악한 부자는 …
악한 부자는
자기 것은 아끼면서
가난한 자의 것은 아끼지 않습니다(삼하 12:4).
악한 생각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을 부지런히 듣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옛 본능대로 죄를 지을 악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악한 생각이 우리 속에 오래 머물어 있을 때에
그 악한 생각의 결과는 재앙입니다
(렘 4:14).
악한 자
악한 자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봅니다(시 10:8).
악한 자는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합니다(2절).
악한 자는 은밀한 곳에 엎드려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습니다(9절).
악한 자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집니다(10절).
악한 자는 자기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립니다(3절).
악한 자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진행할 죄악이 있습니다(7절).
악한 자는 그의 교만한 얼굴로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4절).
악한 자는 자기 마음에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합니다(11절).
악한 자는 자기의 마음에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6절).
안심할 수 있는 이유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는
위태한 상황으로 인하여(행 27:9-10)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을 때(20절)
사도 바울이 안심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안심하라 ..."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22, 25절)
그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24-25절).
알면서도 평안히 죽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서 객이 되어 그 나라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은 내 400년 동안 내 후손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징벌하신 후
내 후손들이 큰 재물로 이끌고 나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면
나는 그 말씀을 알면서도 평안히 죽을 수 있을까? (창 15:13-15)
애통하는 그리스도인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그리스도인은 ...
-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합니다(욜2:12).
하나님과의 일대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들춰질 때에 그/녀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합니다(마12:41; 롬2:4; 고후7:10).
- 자신의 가정(욥1:5)과 교회의 죄(계2:5, 22; 3:3)로 인하여 애통합니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가정과 교회, 주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주님의 말씀의 권위에 불복종하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정과
교회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죄로 인하여 애통합니다(겔18:30; 마12:41; 행13:24).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반앙하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는 성령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Iain M. Duguid, "Hero of Heroes"란 책을 읽으면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부지런하라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게으르지 말라
믿으라
오래 참으라
그리하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히 6:11-12).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주의 날"이란?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주의 날"이란
결코 피할 수 없는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는
멸망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전 5:2-4).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나의 탓이로다"라고 아비아달에게 말했던 다윗(삼상 22:22),
자기 때문에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제사장들(11절)
85명이나 죽임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18절)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시 52:9).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허덕일텐데,
어떻게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그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8절).
또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8절).
어떻게 결실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결실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아
사탄이 즉시 뿌려진 말씀을 뺏앗아 가지 못하도록
그 속에 뿌리가 깊이 박혀져서
말씀으로 인한 어떠한 환난과 박해 가운데
오래 견디며
또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므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막 4:15-20).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지배를 받기보다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아야 하며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기보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대하 20:18-21).
어떻게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 1:8)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억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3절).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선
우리 육신의 눈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보기보다
[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잠 17:9)]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역사)을 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살전 1:3).
어떻게 꾐에 넘어갔을까요?
어떻게 삼손히 들릴라의 꾐에 넘어갔을까를 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삿16장):
- 먼저 삼손은 들릴라의 배후 인물을 물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들릴라 뒤에 블레셋 다섯 지방의 통치자들이
그녀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해서 자기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능히 결박하고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들릴라에게 시켰는지를 몰랐습니다.
- 그리고 삼손은 들릴라에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면서 세 번째 거짓말에 가서는
자기의 머리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6-17절)
점점 더 그는 자기의 힘이 근원이 머리카락에가 가까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 그러다가 들릴라가 날마다 삼손을 재촉하여 조르니까
삼손은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을 볼 때에
요셉을 날마다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요셉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그녀와 동침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는데(창39:10)
삼손은 들릴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잤습니다(삿16:18-19).
자기 머리를 밀면 자기의 힘이 떠난나도 다 말해 놓고
들릴라의 무릅을 베고 잠을 잔다니
‘나를 잡아 먹으세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야곱의 딸 하나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한 후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말로 위로" 할 수 있었을까요?
(창 34:2-3)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탐심 속에서 유부녀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인하여
그녀를 도둑질하여
자기의 아내로 삼아 낳은 아들 솔로몬을
사랑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
(삼하 12:24-25)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의 자세로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그 음성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참고: 요 7:17).
어떻게, 왜 앞서 보내신 것일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으로 앞서 보내셨습니까?(시105:17)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과
요셉을 미워하는 요셉의 형들을 사용하셔서?(창 37:3-4)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두 개의 꿈을 꾸게 하시사(5-12절)
그 결과 요셉을 더욱더 미워하는 요셉의 형들을 사용하셔서?(8절)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과
우리에게 주신 꿈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우리 인간의 죄악된 자유 의지의 선택의 결과도 사용하십니다
(참고: 롬 8:28).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으로 앞서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명("우리 가족을")을 구원하시려고
(창45:5,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요셉의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그리하셨습니다(7절, 50:20).
우리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빌1:6).
어떻게 자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까요?
자녀가 성공하기를 원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중요한 것은
우리 부모가 성경적인 성공의 비결을 알고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성공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창39:2, 3, 21, 23; 대상22:11)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수1:7-9).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중요한 것은
왜 우리 자녀가 성공을 해야 하는지
성공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공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창45:5, 7).
즉, 우리가 우리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
우리는 성경적인 성공의 비결과 성공의 목적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칭찬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 사울 왕은
아들 요나단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했는데(삼상19:1)
요나단은 그 명령을 내린 자기 아버지 사울 왕 앞에서
자기가 심히 좋아하는(1절) 다윗을 "칭찬"했습니다(4절).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레위기 1-5장에 나오는 5가지 번제를 통해서 얻는 교훈:
-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케 하시고자(출애굽기)
- 주일 예배당 문에 들어올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어올 것(시편)
- 몽땅 다 받치는 헌신의 자세로 예배를 드릴 것(번제, 레1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영적인 축복을 이미 주셨기에)
-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결심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릴 것 (소제, 레2장)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빌1:29)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수직적인 관계) 및
인간과 인간의 관계(수평적인 관계)가 회복되고 화목케 되었기에
우리는 화목케 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예배를 드릴 것 (화목제, 레3장)
(우리는 화평케 하는자, 화평을 지키는 자들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배상할 수 없는
모든 죄들을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를 구하면서 예배를 드릴 것 (속죄제, 레4장)
-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죄를 용서를 구하되
그들에게 배상을 한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 (속건제, 레5장)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본받게 하실까요?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고난 중에서도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또한
그 말씀을 순종케 하시므로
주님을 본받게 하십니다
(살전 1:6).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귀를 기울여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잠 22:17)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보전할 때(18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19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보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3:22).
어려움에서 더 큰 어려움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 어려움을 없애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기도 응답으로 그렇게 되길 기대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움에서 더 큰 어려움이 생기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했던 기도 응답이 아닌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더 심화되고 악화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한 위기에서 더 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는 위기까지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위기와 더 큰 위기 가운데서
우리의 연약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함을 철저히 깨닫게 하시고
인정케 만드시사 그 위기와 더 큰 위기 가운데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약속의 말씀)를 듣고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주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요 승리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시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리 인도하시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참고: 수 10: 8, 11:6과 문맥).
어려움에서 더 큰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친다 하여도 …
현재 어려움에서 더 큰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친다 하여도
하나님의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 두려워하지 말라 ..."(수 10:8, 11:6).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려움들 속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 11장).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는 이유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미 있는 것을 족한 줄 모르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마음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탐심 속에서 돈을 사랑하여 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딤전 6:6-10).
어리석은 길에서 돌이켜야 하는데 …
하나님께서는
내가 걷던 어리석은 길에서 돌이켜
지혜의 길을 걷기를 원하시지만
사탄은
내게 계속해서 어리석은 길로 걸으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길로 바로 가고 있는 자에게도 돌이켜
어리석은 길을 걸으라고 미혹하고 있습니다(잠 9:13-18).
어리석은 자이기에
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여인을
심히 간교한 친구로 말미암아 강제로/억지로 동침하여
그녀를 욕되게 한 남자는 어리석은 자로서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어리석은 일은 한 것입니다(삼하 13:1-14).
어리석은 젊은이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듯(잠 7:23)
어리석은 젊은이는(7절)
깊은 밤 흑암 중에(9절)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녀의 집쪽으로 가서(8절)
간교한 여인(10절)의 여러 가지 꾀는 말에 유혹 받아 (21절)
곧 그녀를 따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22절).
어린 아이들과 같은 신앙인
"어린 아이들"과 같이(마 11:25)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젓"(벧전 2:2)인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자들입니다(3절).
그러므로 그들의 입술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한 나이는 성인인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아니됩니다.
우리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고전 13:11).
어쩌면 내가 선택한 길이 …
보기에 풍성하게 할 것 같아 선택한 그 길이
어쩌면 궁핍케 하는 지름길일 수도 ... (참고: 창 13:10)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어찌하여 나는 원하지 않는 ...
주님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야하는데(시119:77)
어찌하여 나는 원하지 않는 죄악을(롬7:19) 즐거워하고 있는 것인가?
어처구니 없는 미신적 신앙?
절대적인 신앙의 원칙인 진리를
자기 생각의 좋을 대로 해석해서 적용하면서도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삿 17장)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미신적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답시고
그 성경 말씀을 억지로 풀어서(벧후 3:16)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을 볼 때
성경을 보는 틀(frame)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틀은 바른 교훈(sound doctrine)으로서
제 개인적으로는 개혁신학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틀안에 박혀 있는 것도 위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열려있지 않는 상태)
그 틀밖에서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얻기 위해서 버려야
최고의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빌 3:7-8).
얻기 위해서는 …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빌 3:8).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욕심이요 교만입니다.
얼굴엔 수심, 마음엔 근심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당한 곤경을 보고
우리 마음엔 근심이 있으므로
우리 얼굴에 수심이 있어야 합니다
(느 2:2, 3, 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경험해야 합니다
(4-5, 8, 18절).
얼굴이 뻔뻔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역한 우리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이마와 마음이 굳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겔 2:3-4, 7).
얼마나 큰 은혜인지 ...
우리는 우리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죄의 결과만 알고 있기에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째서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습니다
(삿 6:13,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못깨닫고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적어도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징벌을 받는 죄를 범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계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어린 아이와 같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며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18:6, 10).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주신 하나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왕상18:1)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엘리야(2, 15절),
오바댜를 통하여 아합을 만났을 때(16절) 아합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17절).
그 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18-19절).
그랬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36-37절)라고 간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38절).
그 때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던(21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핧은”것을(38절) 보고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39절).
엘리야는 그 모든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한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다 잡으라고 하여
그들을 잡아다가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다 죽였습니다(40절).
그런데 이스라엘 왕후 이세벨이 사신을 통하여 엘리야에게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는 말을 듣고 (19:2)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했습니다(3절).
그는 “광야로 들어가”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4절),
그리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였던 엘리야였는데(10, 14절),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므로(10, 14절)
엘리야는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3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8절).
호렙 산 굴에 들어가 머물러 있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9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굴 밖으로 나가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11-12절).
그리곤 엘리야는 다시금 하나님께 사명을 받습니다(15-17절).
선지자들이 다 죽고 오직 자기만 남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엘리야는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7,000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기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받았습니다(18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하였고. 육신적으로 심히 지쳐있었고,
죽기를 간구했던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되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케 하시므로 그를 다시금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21:17-18)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고 내려간(18절) 아합을 만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20절).
그 때 엘리야는 그에게 이렇게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20-24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금 일으켜 주시사
그로 하여금 아합 왕에에 다시금 담대히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자포자기할 정도로 절망하고 있는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마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갔던 것처럼(마14:30)
엘리야도 "이 형편(왕상19:2)을 보고" 두려워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갔습니다(3절).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비도 이슬도 있지 않는 상황이므로(17:1)
"얼마 후에" 시냇가의 물이 마를텐데도(4, 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단 앞 그릿 시냇가(3절)로 "곧" 갔던 엘리야였는데(5절),
떡이 없고 가루 한 운큼과 병에 기름 조금으로 음식을 만들어
자기 아들하고 마직막 식사를 하는(12절)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엘리야였는데(10절),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증하다가 숨이 끊어"졌을 때에도(17절)
하나님께 부를짖으므로(21절) 하나님께서 그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신 기적도 목격한 엘리야였는데(22절),
자기를 찾아 죽이려는 아합 왕 앞에서도(18:10)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였다고 담대히 말해던 엘리야였는데(18절),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한 엘리야였는데(20-40절),
갈멜산 꼭대기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신의 얼굴을 무릅사이에 넣고 (42절)
끈기있게 하나님께 간구하므로(43절) 큰 비가 내리는 것을 경험한 엘리야였는데(45절),
그는 왕후 이세벨의 말을 듣고 도망갔습니다 (19:2-3).
그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 후(4절) 잠이 듭니다(5절).
그 때에 천사가 두번이나 엘리야에게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음식을) 먹으라"고 말합니다(5, 7절).
그리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염려합니다(7절).
엘리야는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8절).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9-18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주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15-18절).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쓰러질 때
다시금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택하신 주님의 종을 통하여 뜻하신 바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에셀, 에벤에셀
"엘리에셀"(뜻: 하나님의 도우심)(출18:4),
"에벤에셀"(뜻: 도움의 돌)(삼상7:12).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사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야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선
우리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전 9:20-22).
우리는 물과 같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물은 어느 모양의 컵에게 부어져도
각각 그 컵의 모양을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