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성공관?

 

 

성공["형통"(success)이란(창 39:2, 3, 23)]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2, 3, 21, 23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게 하시며(4, 21절),

하나님께서 높이시사 [보디발의 집에서는 가정 총무로(4절),

감옥에서는 제반 사무를 맡은 자로(22절),

애굽(이집트)에서는 총리로(41:41)],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45:5, 7).

 

 

성도는 ...

 

 

  1.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지닌 자입니다 (렘14:9; 15:16).
  2.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시는 것처럼(겔36:21) 성도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아낍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다(39:25).
  4.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사랑을 베풉니다(25절).
  5.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습니다(39:7).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소중하게 보신다"(시116:15, 현대인의 성경).

 

 

성도님들을 섬기는 사람들

 

 

우리는 성도님들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실제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며

그들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시원하게 되므로

우리는 그 섬기는 자들을 알아 주어야 합니다(고전 16:15-18).

성도님들의 마음을 더욱더 강팍하게 만들고 있는 거짓된 목사?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할 성도들에게

평안을 구하고 회개치 않는 죄의 결과인

재난을 구하지 않는 거짓된 목사들이야 말로

그 성도들의 마음을 더욱더 강팍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렘 38:4).

 

 

성도들의 인내

 

 

우리 성도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계시록 15:12).

 

 

성령님은 ...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요14:16),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또 우리 속에 계십니다(17절),

진리의 영이십니다(17절, 15:26),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14:26),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15:26),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16:8),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13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14절).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순종할 때 ...

 

 

우리가 성령님께서 말씀하심 따라

의심하지 말고 순종할 때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행 10:19-20, 34-35).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기에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18).

 

 

성령의 검이 무딘 그리스도인들은 …

 

 

무딘 칼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들 수 밖에 없습니다(전10:10).

이와 같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엡6:17)이 무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에 힘이 더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인드(mind)가 날카롭게 되 있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 사람(육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적 민감함이 둔해져서(spiritual insensitivity)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므로(lack of spiritual discernment) 혼동(confusion) 속에 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갈바를 알지 못해 이리 저리 헤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인드 날카롭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민감함과 영적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예민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어는 문은 닫으시고 어는 문은 열어주시는지 분별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성령의 검이 무딜 때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인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던지

갖추고 있다해도 그 검이 무딜 때(삼상 13:21)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니다.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2) 화평을 깨는 자(peace-breaker), (3) 화평을 지키는 자(peace-keeper).  우리는 화평을 깨는자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화평을 지키는 자가 되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평안(Shalom)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한 일원(지체)으로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해야 합니다(2절).

그리고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2절).

왜 우리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서로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미움과 교만함과 오래참지 못함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화평을 깨는 자들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그리고 온유함으로 서로 용서하며,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셨고 용납해주셨듯이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공동체의 화평을 잘 지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십시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

성령충만한 마음에는 ...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찬송과 감사와 복종이 있습니다

(엡 5:18-21).

 

 

 

성령충만한 자는 말씀충만한 자입니다.

 

 

성령충만한 자는 말씀충만한 자,

말씀 충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집니다(살전1:5)

그리고 성령충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습니다(6절).

그/녀는 하나님의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2:13).

그러므로 그 말씀이 믿는 그/녀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13절).

 

오직 말씀!

 

[개인적으로 볼 때 말씀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의 흡수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성적 유혹

 

한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가 음녀의 집으로 갔을 때

그 “간고한 계집”은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맞이하였습니다(잠 7:7, 8, 10).

그 숨겨진 의도는 “함정”을 놓아 그로 하여금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faithless)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음녀의 숨겨진 참된 의도는

많은 결혼한 남자들로 하여금 결혼할 때에 언약하였던 것을

파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박윤선).

이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그 음녀는 그 어리석은 자를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었습니다(21절).

여기서 ‘꾀다’라는 말은 영어로 “seduce” (유혹)입니다.

이 영어 단어 “seduction”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그 문자적 의미는 “to lead astray” 곧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다,’ ‘미혹시키다’

또는 ‘타락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을시에는

유혹과 꾐이 관련되어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흥분을 일으키게 하여

행동 선택을 하게 만들되 그 행동이 결국에는 그 사람을 타락하게 이끈다는 것입니다(Wikipedia).

그러면 어떻게 음녀가 한 지혜 없는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시켰을까요?

적어도 3가지입니다:

 

  • 음녀는 보이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하였습니다

(10절 –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

  • 음녀는 만지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하였습니다

(13절 – “그 계집이 붙잡고 입을 맞추며 …”).

  • 음녀는 들리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하였습니다

(21절 – “여러가지 고운 말로 … 입술의 호리는 말로”).

 

지금도 사탄은 어리석은 저를 유혹하여 타락을 시키곤 합니다.

사탄의 저의 취약점인 성적으로 유혹하여

마음으로 간음하게 만들곤 합니다(마 5:28).

그 결과 사탄은 저의 영적 힘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성적 유혹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우리가 성적 유혹을 받고

그 유혹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일수도 ...?

(잠 22:14)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노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 마음에 미련한 것이 얽혀있어서가 아닐까요? (15절)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이상 헛되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우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 1:10).

 

 

세상 끝에는 ...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일과

우리가 "미움"을 받으며

또한 서로 "미워"할 것입니다

(마 24:3-5, 9, 10).       

세상 사람들 보다 더욱 심하게 죄를 짓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세상 사람들 보다 더욱 심하게 죄를 짓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께 매를 맞으므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겸손해진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사 우리를 회복해 주실 때

우리는 그 때서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됩니다(대하 33:9-13).

 

 

세상 사람들 보다 못한 우리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지 못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보다도 못 살고 있습니다(겔 5:7).

 

 

세상과의 화합, 교회 안에서는 불화

 

 

우리가 이 더럽고 추한 죄악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더럽고 추한 모든 모양의 악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해야 하는데 지금 교회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교회는 세상의 풍조에 밀려 더럽고 추한 죄악에 많이 오염되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을 역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한 마디로, 교회가 세상과 분리하고(나뉘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 있지만 지금 교회는 세상과 화합(harmony)하고 교회 안에서는 불화(disharmony)가 끊임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지금 사단은 모든 것을 거꾸로 바꿔 놓고 있는 것(exchanged, 롬1:23)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나뉘게(분리되게, 불화하게) 만들고 세상과는 화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것보다 ...

 

 

 

넓고 좋은 부자 동네에서 한가하고 평화롭게(태평스럽게) 살면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돈이란 우상을 섬기는 것보다

(삿 18:7, 9, 10, 30-31)

좁고 안좋아 보이는 가난한 동네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 세상적으로 이것 저것 부족하면서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시 23:1)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 매우 좋은 것일까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곳인(삿 18:7, 10)

매우 좋은 땅에서(9절) 평온하고 안전하여

염려 없이(7절) 한가히(27절) 거주하면서(7절)

걱정 없이 살다보면(27절)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30-31절).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이이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견고함이 없고

오히려 요동함이 있습니다 (고전 3:1, 11).

세워져야 할 담, 무너져야 할 담

 

 

교회 사방에는 담이 견고히 두텁게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겔 42:20; 43:8). 

교회의 담은 높이 견고히 두텁게 세워져 세상의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못들어 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 담은 많이 허물어져 있는 듯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은 서로에게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복음과 사랑으로 헐어야 합니다(엡 2:13-14).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서로를 향한 미움의 담이든 선입관의 담이든 모든 죄악된 종류의 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 담들은 너무나 높이 견고히 세워져 있는 듯 합니다.

 

 

소나 나귀보다 못한 사람들

 

 

주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소나 나귀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사 1:3).

 

 

소망이 없어진 하나님의 때에

 

 

전능하신 주님은 마음이 초조한 우리로 하여금 전적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인정하게 만드실 정도의 불가능한 상황까지 기다리셨다가[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 바라고 소망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까지(롬 4:18-19);

마르다가 더 이상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살 수 있다는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나사로가 죽은 상태까지(요11:11, 27, 40, 44-45)] 우리가 더 이상 바랄 수 없고

소망이 없어진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시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욱더 믿게하시고 계십니다.

소유물 때문에 하나님을...?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물을 다 사탄의 손에 맡기시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물질의 복인 우리의 모든 소유물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욥 1:10-12)

 

 

소유와 동거의 관계?

 

소유가 많아서 갈라서기 보다 소유가 적더라도 함께 동거하는게 낫습니다(참고: 창 13:6ff).

 

 

속단은 금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가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삼상 16:1),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내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절).

그런데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다도"라고 오판했습니다(6절).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라고 말씀하셨는데(3절)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엘리압이라고 알게 하시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 엘리압이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오판했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을 오판하여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라고 말했습니다(17:28).

사무엘의 오판이나 엘리압의 오판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된 판단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섣불리 상대방에 대해서 함부러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엘리압의 경우는 자기의 막내 동생인 다윗에게 자초지종을 듣지도 않고 속단을 했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말씀(17-18절)에 순종하고 있었던 것인데 말입니다.

속단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속히

 

 

다투기를 속히하기보다(잠 20:3), 용서하기를 속히하길 원합니다(19:11).

 

 

속히 망하는 방법?

 

 

속히 망하는 방법은(수 23:16)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8절)

우리 중에 거하는 불신자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고(12절)

또한 그들의 신들을 이름을 부르고

그신들을 가리켜 맹세하며 그신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므로(7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는 것입니다(16절).

 

 

 

손해도 구분해야

 

 

나에게 유익된 손해가 있다.

그것은 재물의 손해를 통해서라도 영적인 재산을 되찾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해를 돌이켜

도리어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룻기 4장).

 

그러나 나에게 무익한 손해도 있다.

그것은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가담하므로 보는 불필요한 또는 쓸데 없는 손해이다(잠 26:17).

 

손해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겠다.

순전한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사48:10)

내 안에 모든 불순물을 제하시사 순수하게 만들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합니다.

 

순수하게 만들어 주시되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연단하여 주시사(잠17:3)

내 마음의 모든 불순한 것(마15:18-19)을 제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순전한 마음을 사모합니다.

 

주님께서 찌끼와 혼잡물과 같은 나의 미음(사1:25)을

고난의 용광로를 통하여 정화시키시사 순금같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순금같은 믿음, 순전한 믿음을 갇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나를 깨끗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잠30:5; 참고: 시12:6).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께서 쓰시는 합당한 도구가 되길 기원합니다(딤후2:21).

 

 

 

 

 

 

 

 

 

 

 

 

순종의 길

 

 

순종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그 길을 걸어가는 당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 친척 식구들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명하시고 뜻하신 길이기에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당신은 끝까지 묵묵히 주님만 바라보면서

그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창22:1-3).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모리아 산으로 3일 동안 걸어갔었을 뿐만 아니라(3-4절)

심지어 그는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기까지(10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부인 사라가 알고 있었을까요?

만일 그녀가 알고 있었다면

그녀의 남편인 아브라함의 순종함을 자신의 명철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자신의 명철을 의지했었더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명철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아들 이삭은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

그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그런데 어째서 내 아버지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나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

을 내밀어 칼을 잡고 나를 잡으려고 하시는 것일까요?(9-10절)

아들 이삭의 입장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겲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명철로 하늘의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어서

우리의 본능은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에게 이해를 받고 싶어하겠지만

이해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를 받는다 할찌라도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예수님도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여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8).

순종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영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요1:11)

오히려 배척을 당하셨습니다(마 13:57).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요 19:6)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히 5:8)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눅9:23).

이 주님의 말씀에 당신은 믿음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주님 가신 십자가의 순종의 길을 주님만 바라보면서 묵묵히 걸어가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식구들에게조차 이해를 받기보다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그 외로운 길을

당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끝까지 걸어가시겠습니까?

 

 

 

 

 

 

순종의 길

 

 

요나 선지자는

자기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욥바로 내려갔고,

배로 내려갔으며, 배 밑으로 내려갔고, 심지어 큰 물고기 안에서

바다 깊은 곳까지 내렸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내려오셨고,

육신의 몸까지 입으실 정도로 내려오셨고,

종의 형제를 입으시기까지 내려오셨으며,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내려오셨다가,

결국에는 음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읽으면서)

 

 

순종할 때 축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 말씀이 출애굽기 39-40장에 18번이나 나옴)

모든 역사를 마쳤을 때 모세는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출 39:42-43).

 

나는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고

불순종할 때가 수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8).

순종할 수 있었을까?

 

 

야곱과 그의 아들들 때부터

약 400년 동안 살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광야에 있었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레 18:3)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마음으로

스스로 더럽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30절)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명하셨는데(4절)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을까?

 

 

 

 

 

 

 

 

 

 

 

 

 

 

순종함에 있어서의 시험?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인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창 31:3)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함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상황들 중에 두개의 큰 두려운 상황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상황은, 자기를 쫓아온 외삼촌 라반입니다(23절).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외삼촌의 딸들이 레아와 라헬을 자기에게서 억지로 빼앗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31절).

그 두려움 속에서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않은 라반이 안색을 본 야곱은(2, 5절)

외삼촌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습니다(20절).

그 사실을 "삼 일 만에" 알게된 라반은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좇아가"

야곱에게 왔습니다(22-23절).

그는 충분히 야곱을 해할 만한 능력이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29절).

이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밤에 라반에게 현몽하여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24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3절)

그 두려운 상황에서 야곱에게 함께계시사(5, 42절)

라반을 막으시고 그로하여금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7절).

 

두 번째 상황은, 자기에게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형 에서였습니다(32:6).

야곱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심히 두려고 답답"했습니다(7절).

그는 형 에서가 와서 자기와 자기 처자들과 칠까 겁이 났습니다(11절).

그래서 야곱은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11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고난과 그의 손의 수고를 보시고(31:42)

야곱을 에서에게서 건져주셨습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너는 ... 가"라 명하셨을 때

그는 불순종했습니다(욘 1:2-3).

그 이유는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4:11).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순종했습니다(호세아 1:2-3).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영적으로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시고자

그리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교회를 신부로 삼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2:8)

 

우리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서 '음란한 배우자, 음란한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숨을 좀 돌릴만 하면 …

 

숨을 좀 돌릴만 하면

다시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원 ...

(참고: 출8:15)

 

 

숭배자들  vs  예배자들

 

우상 숭배자들(idol worshipers)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호흡처럼 속이 없어지고 텅빈 것처럼

헛된 것을 섬기며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God worshipers)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언약적 사랑(히비리어: '헤세드') 가운데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마음에 잘 간직하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하므로 예배를 드립니다(욘 2:8-9).

 

 

스스로 덮으려고 하기 보다 …

 

내가 범한 죄를

스스로 덮으려고 하기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죽으심을 의지하여

회개하므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덮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참고: 다윗).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아야 하는데 ...

 

스스로 주님 앞에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려 자백해야 하는데 ...

(눅 8:47)

 

 

 

스스로 자신을 속인 것이다.

 

 

입술로는

참으로 맞는 말은 하였는데

행함으로는

그 맞는 말대로 하지 않았으니

결국 스스로 자신을 속인 것이다

(렘 42:6, 20, 21).

 

 

 

스스로 자초한 결과?

 

 

물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빌 1:29)

무의미한 고난을 스스로 자초하면서까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음 속에서

자초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잠 22:3).

 

스스로 조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수 23:1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6절).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놓아서는 안됩니다(12-13절).

오직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8절).

 

 

스스로 조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

그들과 짝지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올무와 덫과 옆구리에 채찍과

눈에 가시가 되어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수 23:11-13).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수 23:11).

즉,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8절)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힘써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6절).

만일 우리가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께 범죄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미련한 자

 

 

미련한 자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그/녀의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잠 26:5, 12).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는 자는(잠 3:7, 26:12)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는 좋아하지만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롬 2:21).

이러한 자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잠26:12).

 

 

스스로 천하게 보일정도로 낮아져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은

스스로 천하게 보일정도로

우리 자신을 더 낮아지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며

힘을 다하여 춤을 추게 합니다

(삼하 6:12-22).

 

스스로 해하지 말아야 할텐데 … ㅠ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를 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민 16:38).

 

 

시기와 미움

 

 

시기하면 다툽니다(창 26:14, 20).

미워하면 떠나게 만듭니다(27절).

심지어 미워하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27:41).

 

 

시내산과 갈보리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림하시고자

그들에게 성결을 명하셨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까봐

경계를 정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출 19:10, 12).

 

갈보리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시고자

자신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경계벽을 무너트리셨습니다

(히 9:22; 엡 2:14).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으신데(사 53:2, 현대인의 성경)

 

지금 주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그들처럼 매력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으니

교회 안에 세상적인 사람들로

가득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나중은 미약했던 솔로몬 왕?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 구절 중 하나는

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리도 지혜로왔다는 솔로몬 왕을 생각하면 그의 시작은 심히 창대했지만

그의 나중은 미약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시작에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여디디야"란 이름(뜻: 주님께 사랑 받은 자)도 받고(삼하 12:25), 지혜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을 다 받았지만(왕상 3:12-13)

그의 나중에 나이가 많을 때에는 애굽 왕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사랑하여 그 여인들이 하여금 자기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랐습니다(왕상 11:1-4).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도를 지키지 않고(11절) 하나님을 떠나(9절)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5-6절).

 

어떻게 시작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따르던 자가

나중엔 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여

그녀들의 우상들을 따를 수 있나요?

시험을 시련으로

 

 

"여러 가지 시험"을

나의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여서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만 있다면 ... 

(약 1:1-4)

 

 

시험을 통해서라도 순종을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어려운 시험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순종의 삶을 살게하고 계십니다

(창 22장, 잠3:5-6).

 

 

신뢰와 묵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고: 시편 1편, 예레미야 17장)

신뢰의 침묵으로 묵묵히 걸어가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에 있어서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신뢰의 침묵으로

영원한 약속의 하늘 나라를 향하여

나는 오늘도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전진해 나아가리라.

 

[2019 가을 말씀 집회 첫째날 강사 목사님을 통하여

여호수아 6장 8-14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신뢰하는 가까운 친구도

 

내가 신뢰하여

내 마음과 삶을 나눈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나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나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시기에

나에게 은혜를 배푸사

나를 일으켜 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41:9-12).

 

신뢰하라!

 

큰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는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면

우리는 형통할 것입니다

(대하 20:20).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재물과 권력에 굶주려 있는 사람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참고: 잠 28:20).

 

(George M. Schwab의 "The Book of Proverbs"를 읽으면서)

 

 

신부된 교회는 정결한 처녀가 되야 합니다.

 

 

신부된 교회는

"한 남편인" 신랑되신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할

"정결한 처녀"가 되야 합니다(고후 11:2).

정결한 처녀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진실하고 깨끗해야 합니다(3절).

그러나 사탄은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들려고 미혹하고 있습니다(3절).

사탄은 우리에게 "다른 예수"를 전파하며,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받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4절).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내 행위를 뒤돌아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멀어져 있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말씀들을 향하여 내 발걸음을 돌이켜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시 119:59-60).

 

 

신앙생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 의식이 더 많아지고

공로의식이 없어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고전 15:10; 눅 17:10).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겸손히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십시오:

  1.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 (고전 15:9)
  2.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엡 3:8)
  3. “…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딤전 1:15).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

 

  1. 나는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있다(혹은 있는 것 같다)(엡 4:19).

나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롬 5:13).

  1. 나는 점점 더 공로의식에 매여 있다(눅 18:11-12). 나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보다 내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마25:44).
  2. 나는 점점 더 교만해 지고 있다(잠 21:4; 겔 28:5). 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길 좋아한다(요 12:43).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한 가지 일

 

 

신앙 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한 가지 일,

우리가 완전히 몰입해 있을 정도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조급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두르지 말도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시 1:3).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의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1)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딤전 1:15).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2)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 의식이 더 많아지고 공로의식이 없어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고전 15:10; 눅 17:10).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3)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겸손히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십시오:

  1.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 (고전 15:9)
  2.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 (엡 3:8)
  3. “…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딤전 1:15).

신앙의 게으름

 

신앙의 게으름은 마음에 문제이다.

그 마음의 문제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참고: 잠 24:30).

 

(George M. Schwab의 "The Book of Proverbs"를 읽으면서)

 

 

신앙의 내리막길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94:18-19).

 

신앙의 미끌럼틀에서 올라기보다 내려가고 있을 때,

마음에 근심이 많을 때,

어느 누구의 위로도 내 영혼이 거절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 때,

주님의 영원한 사랑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깊이 경험하며,

주님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케 하시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할 수 밖에 ....

 

 

신앙이란?

 

 

신앙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견고함 가운데서 마음의 평안함을 누리는 것입니다(사 26:3).

실제 삶은 …

 

 

입술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가길 원한다고 하지만(마 16:24)

실제 삶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고 있습니다(눅 22:54).

 

 

실족함이 없는 의인의 걸음

 

의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녀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며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 37:30-31).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지 않을 때

의로운 심령들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으며 또한 마음이 찢기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 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교회를 책망하며 경고하시며

사랑으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 징계를 받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책망과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

 

  1.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압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갑니다.

 

  1. 자기 자신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녀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선행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1.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1.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늘 기도합니다.

 

  1. 겸손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Iain M. Duguid, "Hero of Heroes"란 책을 읽으면서]

 

 

 

 

 

심지가 견고한 그리스도인

 

심지가 견고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신뢰하되 영원히 신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영원한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십니다

(사 26:3-4).

 

 

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의인

 

 

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의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충분히 오만한 자를 질투할 수 있습니다

(시 73:3, 14, 16).

 

 

심한 고통이 될 정도로 생각하는 것?

 

 

우리 각자에게

심한 고통이 될 정도로

생각하며 고민하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기자 아삽은

의인은 고통을 당하는데

왜 악인은 형통한가 라는 질문이

그에게는 심한 고통이 되었습니다(시 73:16).

그러한 질문의 해답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깨닫게 됩니다(17절).

"십자가의 걸림돌"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고

그리 전하는 것은

"삽자가의 걸림돌"입니다(갈 5:4, 11).

 

 

 

“쓸 만한 그릇”  … “고난의 풀무 불”

 

 

주님은 우리를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려고(잠 25:4)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십니다(사 4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