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죽는 것이 낫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의인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 이유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빌 1:21-23)

그러나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악인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히 죽는 것보다 육신 적으로 살아 있어

혹시나 하나님의 구원을 은총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딤전 2:4).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전한 복음과 복음의 합당한 삶?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롬 1:3-4)

또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고전 15:3-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했습니다(빌 1:27).

 

사도 요한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요(예수님의 신성)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 "이 영원한 생명"(예수님의 인성)이었습니다(요일 1:1-2).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당한 생활이란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나님(5절)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 답게 사는 삶이란

영원한 생명(2절)을 얻는 자로서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행하면서(6절) 형제를 사랑하며(2:9)

악과 불의를 행치 않고 의로운 삶(3:12)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한 사도 베드로(마26:35),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70, 72, 74절).

그리고 그는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75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자신만만해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자만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철저히 무너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만은 철저히 깨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철저히 미워할 필요까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철저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만을 신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잡혀가시던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었던 사도 베드로(눅22:54),

예수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55-60절) 닭이 곧 울었고(60절)

주님께서는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61절).

왜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자기에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니이다"(마26:35)라고

말했던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보셨을까요?

아니면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를 보셨을까요?(4:19)

 

"어부"였던 사도 베드로(18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삼년간 데리고 다니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고자 '제자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삼년간 제자훈련을 받았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요20:6-7)과

제자들 가운데 두 번이나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19-29절)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하고 다시금 본업인 어부로 돌아갔습니다(21:3).

이러한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나타나셔(14절)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15-17절).

사라의 의심, 나의 의심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의심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을 의심했습니다(롬4:18).

 

그녀가 의심하게 된 원인은

그녀는 분명하게 보이는 자신의 현실을

보이지 않는 미래 보다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현실이란

자기의 태가 죽은 것 같다는 것이고

(물론 남편 아브라함도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음)(19절)

보이지 않는 미래란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중 하나님의 때에

그들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때인 25년 후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11년 후인 그의 나이 86세 때

남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녀는 인내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조급해진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라의 의심 속에서

제 의심을 비춰 봅니다.

 

 

(Lydia Brownback, LEGACY OF FAITH: From Women of the Bible to Women of Today"란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 보기에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보기에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 (사 43:4).

 

보배롭고 존귀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우리의 보배로 삼고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눅 18:9, 14).

이 믿음의 근거는 자신의 행함입니다(11-12절).

그 결과 그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9절)

'죄인'으로 여기는 그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둡니다(11절).

그리고 그는 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여

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이 매우 훌륭하다고 자랑합니다 (11절).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14절).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불쌍한 영혼에게 주목합니다(행 3:4).

 

또한 그/녀는 자기 개인의 능력과 경건(신앙)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을 이상히 여깁니다(12절).

오히려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목하게 합니다(4:10-12).

 

또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주님만을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재앙이 없으면 ...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재앙이 없고

오히려 재물이 더욱 불어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 사람의 눈은 솟아나며,

그는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합니다

(시 73:5-8, 12).

 

 

사람을 매수하고 충동시키는 것

 

 

사탄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하게 만들고

또한 사람들을 충동시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행 6:11-14).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고난도 달게 받는 것입니다

(잠 27:7, 박윤선).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삼상 14:6).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습니다.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졌습니다.

양 떼도 피곤합니다

(욜 1:12, 16, 18).

 

 

 

 

사람이 무엇이관대

 

 

햇빛이 비췰 때 보이는 수 많은 먼지들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비췰 때

우리는 먼지보다 많은 우리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우리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사랑은 …

 

 

사랑은 보내는 것입니다(요 3:16; 요일 4:10).

 

 

"사랑의 수고"

 

나 같은 죄인을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의 복음"과 "우리의 목숨까지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살전 1:3, 4; 2:8).

사랑의 징계가 무익한 이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때리시지만

그 때리심이 무익한 이유는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렘 2:30).

 

 

 

사랑이 재물보다 낫습니다.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낫습니다.

그 이유는 재물은 다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시 52:1, 7,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

 

 

말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 4:8).

 

사모님에게 그리하는 것은 곧 목사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목회자를 향한 불만 등을

목회자의 아내에게 쏟아낸다는 것은

곧 그녀의 남편인 목회자에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리하는 것은

목회자의 마음을 매우 분노케 할 수 있습니다

(참고: 행 26:14-15).

 

 

 

사무엘도 자녀 농사가 그의 마음대로 잘 안된 듯 ...

 

 

그리도 훌륭한 주님의 종인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에게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삼상 8:3).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5절).

 

"사무엘"이란 이름의 뜻대로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인데(1:20),

젖을 뗀후 어린 아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라났던 사무엘인데(22-28절)

분명히 자기 두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그 두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을텐데 ...

 

사무엘도 자녀 농사가 마음대로 안된 듯 해보입니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자는

자기를 근심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고후 2:5-11).

 

 

 

사탄은 …

 

사탄은

우리가 들은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빼앗아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눅 8:12).

 

사탄은

우리가 기쁨으로 받은 말씀의 뿌리가

우리 마음에 깊이 내리지 못하게 하므로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게 만듭니다(13절).

 

사탄은

말씀을 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14절).

 

그러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게 하여

인내로 결실케 하십니다(15절).

 

사탄은 …

 

사탄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각을 못하게 하고

사람의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마 16:23).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속에 가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령님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게 만들었습니다

(행 5:1-3).

 

 

 

 

사탄은 우리 마음을 미혹합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을 미혹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마음이

진실되지 않고 거짓되게,

깨끗하지 않고 더럽히게 만들고자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고후 11:3).

 

 

 

 

 

 

사탄의 역사 vs. 주님의 역사?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로 하여금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며,

시련을 통하여 배반하게 만들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으로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들은 말씀을 지키게 하여서

인내로 결실케 하고 계십니다

(눅 8:12-15).

 

 

사탄의 유혹

 

 

구속자(Redeemer)로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에게 시험 당히신 예수님께서는(눅4:1-13)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므로(신8:3; 6:13; 6:16)

그 3가지 유혹들을 뿌리치셨습니다(눅4:3, 7, 9-11).

그러자 사탄은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떠나 있다가(13절)

사역을 끝내(완성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또 다시 3번 '스스로 구원하라'(그 목적은 구속자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해)고 유혹했습니다(23:35, 37, 39).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끝에는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C. D. "Jimmy" AGAN III의 "The IMITATION of CHRIST in the GOSPEL of LUKE"을 읽으면서)

사탄의 전략은 우리를 애워싸고 갇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를 에워싸는 것입니다

(삼상 23:8; 24:26).

사탄은 우리를 갇히게 만듭니다

(23:7; 참고: 출 14:3).

사탄은 요셉을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창 39:20)

베드로(행 12:4, 5)와 바울과 실라도 깊은 옥에 갇히게 만들었습니다(16:23, 24).

 

비록 사탄은 우리를 갇히게 만들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 갇힌바 된 상황에서 건져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떄문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어도

 

 

"...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케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기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고후 1:9-10).

삭도 같은 혀

 

날카로운 삭도 같은 간사한 혀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합니다

(시 52:2, 4).

 

 

 

 

삯군 목사 아닌가요?

 

 

미신적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고용을 받아

그 사람의 목사가 된 사람(삿 18:4),

그 사람에게 돈을 지불 받고(17:10)

또한 그 사람에게 아들처럼 여김을 받는 목사(11절),

그렇다고 그 사람과 함께 목회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하는 목사(11절),

이러한 목사는 더 큰 교회의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한 사람의 목사가 되어 작은 교회에서 일하는 것과

자기들과 함께 가서 더 큰 교회에서 목사가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낫겠느냐는 말에 솔깃하여(18:19)

마음에 기뻐서 우상을 가지고 그 교회에 들어갑니다(20절).

이러한 목사가 참 목자입니까? 삯군이 아닌가요?

 

 

 

 

 

 

 

 

삯군 목사에게 상담을 받는 교인?

 

 

삯군 목사에게 상담을 받는 교인,

그 목사에게 자기가 가는 길이 성공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교인(삿 18:5, 현대인의 성경),

그 목사가 자기에게 '평안히 가라

너가 가는 길은 하나님 앞에 있다'라는 말(6절)을 듣고 그리했을 때

자기가 생각하는 성공관대로 보기에 너무나 좋은 곳(9절),

한가롭고 평화롭게(7절) 그리고 태평스럽(10절, 현대인의 성경) 살 수 있는 곳이요

또한 아주 넓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부를 누리는 곳(7, 10절),

그 곳으로 인도함을 받았다고 "이렇게 좋은 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교인(10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야 말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요? (마 15:14)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황은 ...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이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후 1:8-9).

 

 

 

살 소망이 끊어졌을 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때,

내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뜻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고자 함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큰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처럼

현재에도 큰 위기 가운데 건져주실 것이며

미래에도 건져주실 줄 믿어야 한다(고후 1:8-10).

 

 

살 소망이 끊어졌을 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을 때

이것은 우리로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고후 1:8-9).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되 과거에도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건지실 것이고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믿음으로 바라고 소망해야 합니다(10절).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만한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와 달라고 기도 요청을 해야 합니다(11절).

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행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입을 크게 열고 헐떡여야 합니다. 

시편 119편 13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이것은 사람이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죽겠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면 죽을 줄 알고 사모하였습니다(박윤선). 

그만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입을 열고 좀 헐떡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먹지 않고는 죽는다는 사실을 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살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 생존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살인적 질투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삼상 18:9) 그는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12절).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하여금 자기 곁에서 떠나게 했습니다(13절).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보고

사울 왕은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14-15절).

특히 온 이스라엘과 유다와(16절) 심지어 자기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20, 28절)

사울 왕은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서 평생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그래서 사울 왕은 아들 요나단이 보기에도

"까닭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리려고 했습니다(19:5).

질투는 까닭없이 상대방을  

싫어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어

멀리하게 만들며 심지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만들어

살인을 시도하게까지 만듭니다.

그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적 질투'입니다.

상당한 값을 치뤄야 하는데 … ㅠ

 

 

하나님이 주신 신적 권위를

자기 자신을 위해 남용하는 권위주의적 목사는

성도님들이 '목사님께 드립니다'라고 할 때에

그것을 성도들에게서 내가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신적 권위를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양 떼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겸손한 목사님은

성도님이 '목사님께 다 드립니다'라고 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상당한 값을 치뤄서라도 드리려는 마음 가짐으로

양 떼들을 위하여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참고: 대상 21:18-27).

 

 

 

 

 

 

 

 

 

 

 

 

 

 

 

 

상황, 반응, 사실

 

 

  1. 상황: 지금 당신이 접한 상황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유다 백성들이 접한 상황은

            "가뭄"과 대적의 "칼", "전염병" (예레미야 14:1, 12, 15-16, 18),

            "고난"당함(8절), "큰 파멸, 중한 상처"(17절)

 

  1. 반응: 지금 그 상황을 접한 당신의 반응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유다 백성들의 반응은

            "슬퍼하며,(2, 13절)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림(17절),

            "피곤하여" "애통하니" 부르짖음"(2절), "부끄럽고"(낙심하고)(3, 4절),

"근심하여"(3절),"두려움만 보"이고(19절) ...

 

            그런데 주님은 관심도 없으신고 같고(8절), 건져주시지도 않으시는 것 같고(9절),

            나를 버리신 것 같고(9, 19절), 나를 싫어하시는 것 같고(19절)

            나를 징계하신 후 치료도 안해주시는 것 같고(19절),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고(21절) ...

 

  1. 사실(진리): 지금 당신이 믿음으로 붙잡고 있는 진리는?

 

            그러나 사실(진리)는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의 소망'이시요(8절),

             당신이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이시며(8절),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7절).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하나님을 소망(앙망)해야 합니다(22절).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당신은 그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는 발걸음을 멈춰야 합니다(10절).  

당신은 당신의 많은 "타락함"과 "범죄"를 인정하고(20절) 자복해야 합니다(7절).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15:7).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께 금식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14:12, 참고: 15:11).

당신은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21절)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당신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16:15)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상황보다 말씀에 …

 

상황에 영향을 받기보다 하나니의 말씀에 영향을 받게 하시고,

상황에 끌려가기 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게 하소서

(참고: 수 14:6-15).

 

 

상황이 점점 더 안좋아지는 것을 볼 때에 …

 

 

상황이 점점 더 안좋아지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충분히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요즘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로마서 4장 18-21절 말씀으로 하여금

제 영혼에게 말씀하도록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즉, 저는 하나님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구하고 있습니다(18절).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18절).

제가 보기에 인간적 소망은 다 끝어졌다 할찌라도

저는 "나의 소망"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망하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19-20절).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처럼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과 요한복음 6장 1-15절을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신다는 말씀에 충분히 설득을 당하게 하옵소서'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롬4:2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해 2019년 들어와서 네 분의 장례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교훈

 

 

(1) 고 유정숙 권사님: 은혜 (Grace)

 

고 유권사님이 좋아하시던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생각할 때

고인은 "잃었던 생명"이셨는데 여기 우리 교회에 나오시면서 예수님을 믿어 새생명을 얻으셨다.

그 구원의 은혜의 깊이가 크기와 넓이와 높이를 아셨던 분이시다.

그래서 그 분은 양로원에 계셨을 때에도 그리도 주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셨다.

나는 고 유정숙 권사님을 생각할 때 "은혜"라는 단어와 함께 고린도전서 15장10절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 고 오뎍겸 장로님: 평강 (Peace)

 

고 오 장로님, 나의 장인 어르신은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런데 나는 지난 주 금요일 새벽기도회 때에서야 처음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아니, 어떻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질병으로 그리도(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시고 계셨는데 그 찬송가 1절 가사처럼 "내 평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을 늘 편한다"라는 고백을 찬양으로 하실 수 있으셨을까?'

어떻게 그 고통의 길이 순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고통 중에 "늘 잔잔한 강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 어려우셨는데 어떻게 "나의 영혼을 늘 편한다"라고 찬양을 즐겨하실 수 있으셨을까??

나는 평화롭게 잠드신 장인 어르신을 생각할 때 "평강"이란 단어와 함께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이 생각났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 중학교 친구 목사인 Rubin 선교사의 어머님 권사님과 몽골 참사랑 교회의 나르만다흐 전도사님: 사랑 (Love)

나는 새해 들어서 1월 4일 금요일에 고 유정숙 권사님의 하관 예배를 인도한 후

그 다음 날 토요일 같은 시간에 장인 어르신의 하관 예배를 인도한 후

1월 7일 오후에 Rubin 목사의 어머님 권사님의 장례식에 다른 중학교 친구 인규 집사하고

같이 참석했다.

교회 본당 의자에 인규랑 둘이 앉아 있는데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인규를 생각할 때 그는 작년 어머님과 그가 그리도 사랑하던 15살 밖에 안된 막내 아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는데, 그리고 나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시던 교회 유권사님과 장인 어르신을 떠나 보냈는데 ... .

이렇게 우리 둘이 앉아서 Rubin 목사가 그리도 사랑하던 어머님 권사님의 장례 예배를 참석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받은 귀한 은혜는 친구의 어머님 권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지 방 벽에 고린도전서 13장과 손주들의 사진을 붙혀놓으시고 기도를 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도전을 받았다.

안그래도 금년 교회 표어가 "서로 사랑하라"(요 15:12)이고 헌금송을 복음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를 부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권사님의 살아 생전에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벽에 붙혀놓으시고 기도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 또한 적어도 "사랑은 오래참고"란 복음성가를 주일 헌금 때뿐만 아니라 삶 속에 외워서 부르면서 마음으로라고 기도하면서 가정에서부터 실천에 옮겨야 겠다고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지난 주 월요일 운동을 하다가 몽골 참사랑 교회 페이스북에 올라온 나르만다흐 전도사님(25살)의 사진과 참사랑 교회 사모님이 쓴 몽골어를 "Translation"(번역)을 눌러서 영문을 잃어보니까 "eternal country"란 말을 보고 혹시나 전도사님이 영원한 나라로 갔다라는 생각이 들어 좀 놀랬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약 4년 전에 몽골에 갔었을 때 세미나 때랑 농구할 때랑 식사 등등 본 기억이 나는 전도사님인데 .. 확인해 보니 교회 연합 세미나 도중 쉬는 시간에 소파에 앉아 있다가 쓰러져 이 세상을 떠났다는게 아닌가. ㅠㅠ 그래서 나는 지난 주 한주간 동안 매일 자주 몽골 참사랑 교회 페이스북에 들어가 올라오는 글들과 사진과 동영상을 계속 보았다. 장례 예배 후 고인의 무덤을 보니까 마음이 슬펐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과 온 교우 식구들은 얼마나 마음이 힘들고 슬플까 라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고 나르만다흐 전도사님을 통해 주시는 마음은

그 분이 우리 교회에 쓴 기도 편지에 부탁한 3 가지 기도 제목 중 첫번째 기도 제목은 전도사님이

이젠 이 세상에 없기에 더 이상 기도를 할 수가 없고,

두 번째 기도 제목인 친척 전도(전도사님은 고아로서 친척 분들을 전도하고 싶어 그 친척 집에 거하면서 참사랑 교회를 섬겼다고 함)를 위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가 권면했다.

세 번째 기도 제목은 몽골 참사랑 교회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참 생각케 만든 것은 고인에 대한 참사랑 교회 사모님과 지체들의 글들을 보면서

나르만다흐 전도사님에 대한 추억이 일관된 면이 있다는 것을 엿보았다.

그 일관된 면이란 고인을 통하여 사랑을 느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주는 도전은 과연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슨 일관된 기억이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남은 인생을 주님 앞에서 이웃을 사랑하면 살아야 함을 도전받았다.

나는 Rubin 목사의 어머님 권사님과 몽골 참사랑 교회 나르만다흐 전도사님을 통해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에서 각각 3가지 씩 6개 교훈을 받았다:

 

  1. 사랑은 오래참고 (4절)
  2.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내 마음/생각 속에 기록해 놓치 않고) (5절)

3..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니라 (7절)

  1. 사랑은 온유하며 (4절)
  2.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고) (5절)
  3. 사랑은 항상 소망하느니라 (7절)

 

 

 

 

 

 

 

 

 

 

 

 

 

 

 

 

 

생각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자(롬 12:3).

 

 

 

생각(기대)하지도 못했는데

 

 

아버지 야곱은 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22년 동안이나(요셉이 17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에 보디발에게 팔린 후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39살에 흉년 2년 째 되는 해에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나기에).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그의 아들들에게 접해 들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창 45:28).

 

그리고 나서 야곱은 직접 요셉을 만나고 나서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46:30).

 

그렇게 말했던 야곱이 야곱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기 전에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48:11).

 

에베소서 3장 2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생각의 결과"

 

 

주님께서 "그리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선한 길"을 걸어가면 심령이 평강을 얻을텐데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거절하는

교인들의 "생각의 결과"는

그들 앞에 장애물이 놓이는 것이며

또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렘 6:16-21).

 

 

생각의 속도를 줄이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은

생각의 속도를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잠잠히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사 30:15).

 

 

생각지도 못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일을 행하시되

넘치도록 행하십니다

(창 48:11).

생명을 속량하는 값

 

 

아무리 재물이 많은 부자라 할찌라도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 엄청나서

그는 영원히 마련하지 못합니다(시 49:6-8).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15절).

속량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그 엄청난 생명을 속량하는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골1:14).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마 6:24)

어떻게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과 재물을 함께 중히여기며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생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생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원한 기업(재산)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 119:109-111).

 

 

 

생존의 비결

 

 

생존의 비결은

주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민 14:24, 38).

 

 

생활의 염려로

 

생활의 염려로 우리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습니다(눅 21:34).

 

 

 

서로 사귐이 있기 위해선 ...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기 위해선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둠에 행하면

서로 사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 1:6-7).

 

 

서로 죄를 고백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약 5:16상).

 

  1. 과연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1. 어떻게 이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

 

  1. 만일 공동체 안에서 죄를 고백했을 때 다른 지체가 시험에 들던지 덕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서로 화목하기 위해선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막 9:50).

우리가 서로 화목하기 위해선 ... 있어야 합니다:

 

  1. 자기 희생 (막 9:50)
  2. 마치 소금이 녹아야 하듯이

 

  1. 자기 부인 (8:34)
  2.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1. 겸손 (9:34-37)
  2. 교만한 사람은 서로 화목할 수가 없음

 

  1. 섬김 (9:41)
  2.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이웃을 섬기되 작은 일에 충성

 

섞어야 할 것과 섞지 말아야 할 것?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 들은 말씀을

믿음과 섞지(mix)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 4:2).

 

성도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서로 섞이지(mingle) 말아야 하는데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스 9:2).

 

 

 

섞이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과

분리하고(떠나고)

섞이지 말아야 하는데 ...

(스 9:1-2)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다.

 

 

선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좋은 소리 못듣고

오히려 오해를 받고 심지어 비판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이해를 받고 칭찬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출어 주신 은혜와

행하신 선한 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감사와 사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살후 3:13).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양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

오직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만 듣습니다

(요 10:3, 4).

 

예수님의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뒤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알아보고

동산지기로만 알고 있었다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까

그 때서야 그 분이 예수님("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20:11-16).

 

선한 손, 선한 일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힘을 내어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느 2:18).

 

 

선한 영향력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영향력이란 겸손함(출18:11, 민12:3)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진실함입니다(출18:21).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는

양가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제 아내와 자녀들에게

이러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기원하였습니다.

 

 

 

선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악한 자인 이스라엘 왕 아합과 함께하여 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역대하 18장; 19:2, 11; 참고: 20:35).

 

섬기다가 죽으면 된다.

 

 

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면 된다(행 13:36).

 

 

성경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성경에도 '너희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23:5, 현대인의 성경).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성공)의 비결은 ...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창 39:2, 3,21, 23)

 

  1.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수 1:8, 왕상2:3)

 

  1. 하나님을 찾는 것(대하26:5)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성공)이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성공)이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 많은 역경과 고통을 통해서도(창39장)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 45:4-8; 50:20; 롬8:28, 12:2).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저주하며,

우리를 모욕하며,

우리의 빰을 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며,

우리를 모욕하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의 빰을 치는 원수에게 다른 빰도 돌려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 6:27-29).

 

 

 

성경을 연구는하지만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 속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영광을 취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습니다

(요 5:39-44).

 

 

 

성경을 읽다가 비슷한 말씀이 나올 때 …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함께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창 13:6).

그래서 롯은 가나안 땅을 떠났습니다(9-11절).

 

야곱과 에서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함께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풍부하여

그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36:7).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났습니다(6절).

 

성경을 읽다보면 비슷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리할 때 그 말씀들을 연관해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에 두 말씀들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왜 롯과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나고

아브람과 야곱은 그 땅에 남아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든 생각은 창세기 12장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라고 명하시고 보여주신 땅입니다(12:1).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7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신 아브람과 그의 후손인 야곱으로 하여금

그 가나안 땅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롯과 에서를 풍부하게 축복하신 후 그 가나안 땅을 떠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택한 백성인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약속의 땅인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에 두시려고

우리는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