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그리고 능히  이루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하는 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입니다(롬 4:18-21).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다른 교훈"

 

 

우리 성경 교사들은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을 거스르는(딤전 1:10)

"다른 교훈"(false doctrines)을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3절).

만일 우리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면 우리나 우리에게 배우는 교인들은

"헛된 말에 빠져"(6절)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6:3).

그리고 우리는 "경경은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할 것입니다(딤후 3:5).

만일 우리가 "다른 교훈"에 몰두하고(딤전 1:4) 따르면(6:3)

우리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4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1:4).

즉, 우리가 다른 교훈에 몰두하고 따르면 우리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여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부패"해 질 것입니다(6:4-5).

또한 우리는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할 것입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다툼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지금 우리 교회가 그렇지 않나요?

 

우리 성경 교사들은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6:3).

이 교훈은 우리에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입니다(1:11).

그리고 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1:5).

“바른 교훈”을 잘 배우지 못하면 …

 

 

"바른 교훈"을 잘 배우지 못하면(딛 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말"을 하지 못할 것이요(8절)

더 나아가서 "바른 삶"을 살아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른 말을 따르지 않고 있기에 ...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딤전 6:3)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딤후 3:5)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합니다(딤전 6:5).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결단을 내려 행동으로 옮겨야 ...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서로의 양심의 확신을 존중하지 않고

잘못됬다는 식으로 판단하여 업신여기고 비난하며

무책임하다는 식으로 판단하며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어떻게 하면 서로의 다른점들을 극복하여

서로를 섬기고 세워주므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 나아갈 수 있는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결단을 내려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롬 14:13).

바리새인과 같은 나

 

자기 자신은 죄인인 줄 모르면서

상대방은 '죄인’이라고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나,

 

겉으로는 그 '죄인'과 함께 한 공간에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 '죄인'을 멀리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나 (눅 7:36-48).

 

 

박해보다 박수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딤후3:12)

지금 우리는 박해보다 박수 받기를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건져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살 소망까지 끊어진 극심한 고난에서 우리는 건져주셨던 구원의 하나님은

현재 사형 선고 받은 것처럼 생각되는 인생의 최대의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며,

미래에 올 큰 사망과 같은 소망이 없어보이는 극심한 고난에서도 우리를 반드시 건져주실 것입니다

(고후 1:8-10).

 

우리 구원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 13:8).

반드시 낮추실 것입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우리를

반드시 낮추실 것입니다

(참고: 단 4:30, 37).

 

 

 

 

반드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의 자녀들을

약속의 나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참고: 창 31:3; 32:9).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인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눅 1:5,6).

그들은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습니다(6절).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잉태를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이가 많았습니다(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13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사가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의로운 사람들인데, 주님의 모든 계명을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부부였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나이가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 자식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나이가 다 많아져셔야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 때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 25년이 지나서

그가 100세가 되어서야 이삭을 주셨을까요? (창 15:5, 21:2-3)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아직까지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시지 않는 것일까요?

 

2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눅1:13, 18:1).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으라(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현대인의 성경)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자는 정말 행복하다"](눅 1:45).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 교회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서 얼굴을 가리우사

우리를 돌보지 않으실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우리 교회를 치료하시며 고치시며 낫게 하시사

우리에게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우리를 처음과 같이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그 모든 죄에서 정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하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모든 세상 민족들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베푸신 모든 복을 들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며 떨 것입니다

(렘 33:4-9).

 

 

받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제일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을 나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힘듬과 어려움에서 나아졌을 때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배풀어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참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줬다면

그 사람이 그 힘듬과 어려움에서 나아져서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자 애써야 한다 (삼하 19:31-39).

배반감

 

신부가 신랑 외에 다른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

그 신랑은 외도하는 신부로 말미암아 배반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므로

그들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인해 배반감을 느끼셨습니다(겔 14:5).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된 교회가 예수님 외에

재물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것을 보시면서 배반감을 느끼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케 하시사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상을 섬기는 우리 교회의 마음을

다시금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고자 붙잡아 주시고 계십니다(5절).

 

 

 

배반하고 반역하는 교인들

 

 

배반하고 반역하는 교인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을

물리치며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렘 5:23-25).

 

 

 

 

 

배우 조정자의 꾀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텐데 ...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브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그녀들과 함께 그녀들의 신들에게 절하는 우상숭배의 악한 죄를 범한 이야기만 보면

민수기 22-24장에 나오는

발람하고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민수기 3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브올의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게 한 사람들이

미디안 여자들이요 그 여자들이 "발람은 꾀"을 따랐다고 모세는 말했다(31:15-16).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14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계 2:14). 

 

브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브올의 사건 뒤에는

발람의 꾀와 가르침이 있었다.  발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걸림돌이었다. 

그가 배우 조정자였다. 

 

결국 발람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명령하신대로

칼로 죽임을 당했다

(민 31:2, 7-8).

 

 

 

 

 

 

 

배우자를 버려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우리 배우자를 버려서는 아니됩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악이요 고통인 줄 알"아야 합니다(렘 2:19).

 

 

 

버리시는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리심을 받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우리)로 하여금 성부 하나님의 마음과 성자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알게 하시사 주님의 마음을 본받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버림받으시면서도 ...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다스릴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버림을 받으셨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삼상 8:5-9).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면서도(마 27:46)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으셨습니다(빌 2:8).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데로(눅 23:23)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생각)이 들 때에는

 

 

태어나서 자라날 때

제일 중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은 고통,

장성하여 결혼했는데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버림을 받은 고통,

노년기 때

사랑하는 자식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

이 땅에서의 삶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도

견디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텐데

하물며 사랑의 주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생각)이 들 때에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삿 6:3; 시 22:1).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들을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렘 33:22).

 

그런데 지금 우리가 번성할 수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되게 하고 계십니다

(호 4:6-7).

번성하고 증식되고 풍부할 때

 

가나안 땅은 "아름다운 땅"이요(신8:7)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요(9절) "옥토"입니다(10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면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9절)

거기서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12절). 

그리고 거기서 그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것입니다(13절).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나님은 염려하셨습니다(14절).

어쩌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가(15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성하고 증식되고 풍부할 때 우리 마음이 교만해지기가 참 쉬운 것 같습니다.

 

 

번성할 수록 가득해지는 죄악?

 

 

교회 안에 세상적인 교인들이 많이지면 많아 질수록

그들의 죄악 또한 교회와 세상에 가득할 것입니다(참고: 창 6:1, 5).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우리 "입의 부끄러운 말"

및 "거짓말"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골 3:5-9).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변해서는 아니됩니다(갈 1:7).

그러나 그 복음의 합당하지 못한 우리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빌 1:27).

 

 

변하지 않은 사나운 얼굴

 

얼굴의 사나운 것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미련 때문입니다(전 8:1).

 

 

변화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때에(마 16:24)

우리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빌 1:8).

 

 

병 치유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

 

오래된 병을 치유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병에 걸린 원인인 내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병 나음을 받은 후에도 계속 같은 죄를 범하면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요 5:14).

병든 우리들은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긍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하는 것은 예배("제사")입니다(마9:13).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없는 예배요(삼상15: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긍휼"이 없는 예배입니다

(마9:13).

 

긍휼이 없는 우리의 삶은 바리새인의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2절).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있습니다(갈5:4). 

그러기에 우리는 "의사"이신 예수님이 쓸 데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마9:12).

그래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잡수"시는지(10절)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11절). 

그 이유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믿고 있으며(눅18:11)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면서(14절)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우리 마음으로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절).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마9:10)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우리야 말로 예수님이 필요한 "병든 자"들입니다(12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병든 자"요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12절).

 

 

 

 

 

"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8:1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고 그 명령에 불순종합니다(1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9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참으시고

우리를 멸절하지 않으십니다(9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며 범죄하며 회개치 아니하는 우리를

고난의 불로 시험하시사 우리를 연단하십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11절).

 

 

 

 

보시고, 들으시고,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분명히 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근심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시사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출 3:7-8).

 

보아스와 같은 마음을 가진 한 사람

 

 

룻을 향한 보아스의 마음,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3:18).

 

보아스와 같은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을 주님 안에서 친구로 얻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보이기 시작한 인위적인 방법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더 이상 믿음으로 인내하며 붙잡지 못할 때에

나는 내 눈으로 보이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내 문제를 자꾸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참고: 창 16:1-2).

 

 

 

 

 

 

 

 

 

 

보이는 것으로 말고 믿음으로 사십시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면(고후 5:7, 현대인의 성경)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4:16).

그 이유는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참고: 5:1, 4).

만일 우리가 보이는 것에만 주목한다면(18절) 우리가 받는 고난으로 인해(17절, 현대인의 성경)

"짐진 것 같이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5:2, 4).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4:16, 현대인의 성경).

또한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 육체의 집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5:1,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4:18,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5:2,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늘의 몸을 입어서 죽을 몸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5절).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확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확신하고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사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8-9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 모두 보이는 것을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사십시다(7절, 현대인의 성경).

 

 

보지도 말고 빼앗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유부녀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삼하 11:2).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3절).

그녀를 그녀의 남편에게서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12:9).

복 있는 사람은 …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시 1:2). 

그의 즐거움은 아침에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143:8).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며(130:5) 또한 그 말씀을 향하여 달려갑니다(119:32).

그리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의인의 길을 걸으면서 떨며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4:4).

그는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므로 죄를 범하기 않고 자기의 행실을 깨끗케 합니다(119:9, 11).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소유’로 삼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떠한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는 두려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를 도울 수 없을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62:5). 

그는 자기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건지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긴급한 기도를 드립니다(70:12). 

그는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고백하면서 또한 자기의 소원을 주님께 겸손히 아룁니다(109:4).

그러면서 그는 “나는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기도에 헌신합니다(57:8; 108:2).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그는 항상 주님께 소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39:7).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66:19). 

그러므로 그는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결심합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며 큰 죄 가운데서도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복 있는 사람은 평생 기도에 헌신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전심으로 주님께 감사합니다(9:1; 11:1; 138:1). 

그는 자기 마음의 소원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시고 겸손히 자의 소원을 들으시사(10:17) 자기를 건지시사 자기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머리를 드시고(3:3; 110:7)

자기의 의를 따라 상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8:20).  

그는 자기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주님께 감사드립니다(68:35). 

그가 그리도 주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 때문입니다(136:8, 9, 14, 15, 16). 

그는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이 셀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40:5). 

고난을 통해서도 자기에게 유익되게 하시며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의 강하심을 경험케 하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에 그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54:4; 119:116). 

이렇게 주님께 감사하는 복 있는 사람은

자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잊을 수도 없습니다(103:2).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극락의 하나님”입니다(43:4). 

그는 극락의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자기를 세상의 으뜸으로 삼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18:43).

그는 자기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주님의 생각과

자기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자기의 길을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자기를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죽을 때까지 자기를 인도하시는(48:14)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데 헌신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50:6).

 

 

 

 

복보다 재앙

 

 

 

하나님께 재앙을 받는 것이(욥 2:10)

사단에게 (변장된) 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복음 전파자의 자격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열한 제자들을

꾸짖으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막 16:14-15).

 

복음 전파자의 자격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고후 3:5).

 

 

 

 

 

"복음의 소망" & "영광의 소망"

 

 

우리는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과 "영광의 소망"이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골 1:23, 27).

 

 

 

 

 

 

 

 

복이 있는 사람?

 

 

마리아는 복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눅 1:45).

 

주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처녀인 마리아가(27절)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31절).

남자를 알지 못하는 그녀가

성령님이 그녀에게 임하사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덮으시므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35절).

그 아들의 이름은 "예수"고,

그는 큰 자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요,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윗의 왕위를  주시사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 무궁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2-33절).

마리아는 능하지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이뤄지길 믿음으로(45절) 기원하였습니다(38절).

 

과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복있는 사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 1:2).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1절).

 

복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으며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3절).

 

 

 

"본보기"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우리를 깨우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5, 6, 11).

 

우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7절).

우리는 음행하지 말아야 합니다(8절).

우리는 주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9절).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본보기가 필요하지만

멸망의 본보기도 필요합니다

(고전 10:5-11).

 

 

 

부드러운 말씀, 부드러운 마음?

 

 

하나님은 사랑의 징계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부드러운 말씀으로 타이르십니다(호 2:14,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통곡하며 회개해야 합니다(왕하 22:19).

 

 

부득이하여 범죄하는 이유는?

 

 

우리가 "부득이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은(삼상 13:12-23)

우리의 "성렴의 검"이(엡 6:17) 

"무딜 때"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3:21).

부모님의 유산 가지고 싸우는 자녀들에게

 

 

자녀들끼리 부모님의 유산 가지고 싸울 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3-15).

 

 

부모의 마음

 

 

부모의 마음은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재난이 미칠까봐 두려워 합니다

(창 42:4).

 

 

 

 

 

 

 

 

 

 

 

 

 

 

 

부부 싸움은 ...

 

 

부부 싸움은

극히 사소한 일로 인하여 시작하여

점점 더 커지게 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습니다'

(잠 17:14).

 

둑에서 물이 새기 시작할 때

속히 물이 새는 둑을 막아야 합니다.

 

부부 싸움도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쳐야 합니다

(14절).

 

왜 시비를 그치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싸우는 정욕" 때문입니다

(약 4:1).

 

이 싸우는 정욕에는

우리 각자의 "욕심"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2절).

 

그 욕심이 만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불만과 불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정의 화평을 깨는 자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정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부부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들이요 "죄과를 좋아하는 자"들 입니다

(잠 17:19).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부부는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남편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사랑스럽지 않고,

심지어 밉고 싫어도 ...

 

아내는 주님을 존경하기에

남편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존경스럽지 않고,

심지어 너무나 밉고 보기 싫어도 ...

(엡 5:33)

 

 

 

부심

 

부심의 내어주심 (롬8:32)

 

 

 

 

부자가 되기를 애쓰기 보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애쓰기 보다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 합니다

(잠 19:1, 28:6).

 

 

 

부족하고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뿐입니다.

 

 

계산적으로 생각해보니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결코 이뤄질 수가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우리의 능력으로 가능케하기엔 필수적인 것이

부족하고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 뿐입니다(민 11:21-22).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의 손이 짧은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23절).

 

 

 

부족함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 사사기 18장에 나오는 "라이스"란 곳,

그 곳에 사는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부를 누"렸습니다(7절).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10절).

그러나 그 땅에서 단 지파 자손들이 신상을 세워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30절).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

 

 

부하려 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욕심이 해롭다는 것과

탐심은 미혹을 받게 만는다는 것을 알고 돈이 (잘) 벌릴 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오히려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딤전 6:6-10).

분노를 다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노를 억제합니다

(잠 29:11).

 

 

분노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

 

분노를 다 드러내므로

자신의 미련함을 드러내기 보다

분노를 억제하는 지혜를 나타내는게 더 낫습니다(잠 29:11).

 

 

분명한 목적을 주의하여 명백하게 말해야 ...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의하여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같은 식구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식구에게

우리의 분명한 목적을 주의하여

명백하게 말하되

그 식구가 우리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수 22:24-30).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

 

 

지금 많은 우리 목회자들이

분별하지 못하고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창 27:23)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자.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자(고후 10:13, 15).

주 안에서 자랑하자(17절).

나 자신을 칭찬하기 보다(12, 18절)

오직 주님께서 칭찬하는 자가 되자(18절).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고,

분수에 넘치게 말하며,

분수에 넘치게 행동하면 아니될텐데 ...

(민 16:3, 7)

 

 

 

분수에 지나치지 말아야 할텐데 ...

 

 

자기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높이고자

자신이 분수에 지나치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상대방이 분수에 지나치다고 말하고 있으니 ... ㅠ (민 16:3, 7)

 

 

 

분쟁의 발단이 될 수 있는 것을 …

 

 

분쟁의 발단이 될 수 있는 것을

오히려 주님 안에서 화합과 일치의 기회로 삼자.

(여호수아 22장을 묵상하면서)

 

 

불륜의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해야 합니다(잠5:8).

특히 우리 부부 관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그 다른 이성을 말입니다.

우리는 탐심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출20:17).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우리는 우리 배우자의 품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잠5:19)

분수에 넘치게 다른 이성을 쳐다보고(전1:8) 생각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에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골3:13).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는 우리 배우자를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만일 서로 용서하지 않고 우리 배우자를 향한 불만을 쌓이고 쌓이면

서로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가운데 우리 부부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될 것이고

그러다 결국 우리는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갇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

우리는 부부 문제와 갈등을 주님 안에서 해결해 나아가려는 힘든 노력보다

문제와 갈등이 곪도록 그냥 넘어가든지 내버려 두는 편한한 길을 선택하면 아니됩니다.

불순종을 합리화시키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었던 요나 선지자가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는 것은(욘1:2-3)

충분히 자기의 불순종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까지 합리화시킬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불순종하고 있는 목사님 보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더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요나 선지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알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욘 1:3, 10).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순종하는 자가 되야 ...

 

주님께 순종하는 자는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요 또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익숙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마 27:39, 44).

불신자를 통해서도 말씀을 더 확실히 갖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불신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확실히 갖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삿 6:16).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36절).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7).

 

그런데도 기드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10-11절)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부하 부라와 함께 적군 미디안 진영에 내려가서

어떠한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말한 꿈 이야기와

그 친구의 꿈 해몽을 듣고 나서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승리(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13-15절).

 

[불신자 이방 선장을 통해서도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신 하나님이 생각납니다(욘 1:2, 6)].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은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서 …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충성된 군인 우리아)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면서(삼하 12:6)

내 자식이 심히 앓으닌까(15절) (다윗의 범죄로 인한 결과)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금식하고 울며 간구하였던 다윗(22절)처럼

 

지금 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고 계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내가 아프다고, 내 자식이 아프다고, 내가 사랑하는 식구들이 아프다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면서 간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사

십자가에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고 계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 1:8)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싶습니다(롬12:15).

한 영혼을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거짓 목사

 

"불의의 삯"을 사랑한

거짓 선지자 발람(벧후 2:15),

 

"불의의 삯"을 받고 예수님을 판

거짓 사도 가룟 유다(행 1:18),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주님의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마 21:13; 막 11:17; 눅 19:46)

거짓 목사

불편하다고 불평?

 

 

내가

불편하다고 하여(욘 4:6 - discomfort)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닌 듯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에게까지

분노 해서는 아니 됩니다(9절).

 

                                             

 

 

비대해지고 윤택하게 되면 ...?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우리가 살찌고 비대해지며 윤택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반석을 없신여길 것입니다

(신 32:15).

 

 

 

 

 

 

 

 

 

 

 

 

비록 나무에 잎사귀와 열매가 없을지라도 ...

 

 

장인 어르신이 걸을 좀 걸을실 수 있으셨을 때

집 뒷 뜰에 있는 한 나무에다가 물을 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 때 저는 장인 어르신의 뒤에서 물호수를 들고 장인 어르신을 따라

그 한 나무에 물을 주시는데 보조했습니다.

근데 그 한 나무는 열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지에 잎사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장인 어르신을 그 나무에 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열매없고 잎사귀 없는 그 나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지금도 저에게 사랑의 물을 계속해서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새벽에 묵상한 히브리서 12장 2-3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성자 예수님(빌2:8)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12:2).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영접을 받지 못하시고(요1:11)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크게 소리 질렀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들을(19:6)

십자가게 못박히셔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눅23:24).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실 수있으셨을까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히12:2).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분이 장차 누릴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사 창세 전에 선택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엡1:4)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엡 1:7)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골 3:13)

하나님과 원수였던 죄인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롬 5:10; 8:21)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하박국 3장 17-1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비록 내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할찌라도 …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 믿는 것이다(롬12:2).

 

비록 내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할찌라도

내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사람

 

 

쉽게 분노를 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잠12:16).

오랫 동안 삐뚤어진 생각으로 분노를 품는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삼하13장).

분노할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아예 만나지도 말아야 합니다(잠17:12).

 

 

빛의 자녀는 ...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빛의 자녀는 빛 가운데 행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행합니다(요일 1:5-7).

 

 

 

빛이신 하나님은 ...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어둠에 행할 때 우리의 죄를 들춰내십니다.

 

그 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또한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5-9).

빼앗은 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면 아니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으로 자기 집을 채우는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길에 다니지도 말고

우리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잠 1:13, 15).

도둑질한 물이 달듯이(9:17)

남의 것을 빼앗자는 사탄의 꾐을

우리는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1:10).

 

사탄의 꾐은 다른 교회 교인을 도둑질하여

내 교회당을 채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의 교인을 빼앗는 것으로

주님의 예배당을 채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교인-도둑질하는 목사님들과

함께 다니지 말아야 한다.

 

 

 

 

삐뚤어진 세대의 어리석은 사람들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입니다 (신 32:5).

어리석고 지혜 없는 사람들입니다(6절).

모략이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28절).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지 못합니다(2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