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할까봐 걱정 안합니다.

 

 

상대방이 오해할까봐 조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사람 앞에선 다 이해해 줄줄 믿기에

조심성 없이 내 모습, 내 진심 그대로 자연스럽게 말하는게 좋습니다.

 

 

오히려 더 뚜렷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위기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더 뚜렷하게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온갖 허상을 깨트려야

 

 

우리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옛 본능대로 그 현실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쳐 놓은 온갖 허상을 깨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허상들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온전한 기쁨으로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개발하고 사용함에 있어서

그 자체를 온전한 기쁨(pure joy)으로 즐길(enjoy)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르게 초점을 맞추기

 

 

위험 부담이 큰

위기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위에 계신 주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올바르고 일관성있는 판단력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에게

일관성있는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제로 나는 그들에게 충분히 혼동을 줄만한

언행을 하였다.

나는 그것을 어제 주일 가정 모임 및 예배 때

솔직하게 고백을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러한 남편/아버지와 살면서도

아내나 세 자녀들은 각자 나름대로 고민을 하면서

올바른 판단 속에서 행동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엿보인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감사.

옳바른 일이기 때문에

 

 

옳바른 일을 열심히 하는데

자꾸만 일이 안될 때

타협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옳바른 일은 일이 잘되든 안되든을 떠나서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옳은 것인가요?  다른게 있나요?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고 이혼한 형제가

재혼하는데 주례를 부탁 받은 목사가

그 결혼을 주례한다는 것,

옳은 것인가요?

 

옳치 않은 결혼을 주례하는 것과

동성 연예자들의 결혼을 주례하는 것과

다른게 있나요?

 

 

 

 

 

 

왜 그녀는 불안정한 것일까?

 

 

 

왜 그녀는 불안정한 것일까?

왜 그리도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혹시 그녀는 자라나면서

부모님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한

지나친 기대감에 억눌려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한 가운데서 그녀는 아무리 자기 부모님을 만족시켜 드리고자

그리도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그 노력 중에 부모님께 순종하여 원하시는 대학 전공을 택하여 공부 등을 했지만

너무 자신의 적성에 맞지도 않아 너무나 싫었고 해서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닐까?

자기 부모님의 기대에 항상 못미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실망하고 또 실망하여서 불안정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왜 나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용할 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이란 책을 읽으면서)

 

왜 만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슬픔과 아픔과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도 사용하셔서

그 사람의 슬픔과 아픔과 위기를 돌이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치유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시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까?

 

 

왜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배우자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당신이 그들에게 입은 상처(hurts)와

그 상처들을 준 그 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깊은, 큰) 상처를 입혔 때

당신의 마음의 밭에는 쓰라림(bitterness)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쓰라림의 씨앗이 좀 싹이 날 때에 

그를 용서하므로 뿌리채 뽑지않고

오히려 그가 당신에게 입힌 상처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므로 재배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상처에만 오래바라보고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에 쓰라림이 생긴 것입니다.

쓰라림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용서란 당신을 아프게하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사람과 그 상처를 통해서도 역사하시사 영광을 들어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좋은 예가 요셉).

왜 불순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명령을 주시지만

우리는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시험에 드는 것일까요?

 

 

일꾼이 적은 작은 교회에서는

'봉사하세요'하면(봉사할 사람이 없기에)

시험에 들 수가 있는 반면에

 

일꾼이 많은 큰 교회에서는

'그만 봉사하세요'하면(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시험에 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시험에 드는 것일까요?

 

 

 

왜 죄를 미워해야 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죄를 미워하고 미워해야 하는데 ...

 

왜 편법을 ...?

 

 

힘든 상황에 지배를 받는 머리는

편법을 쓰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올바르게 행합니다.

 

 

 

 

왜 피해의식?

 

 

마음에 상처와 아픔이 많기에

피해의식이 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피해의식이 강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선 매우 방어적이면서

상대방에 대해선 공격적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깊은 상처들을

다시금 끄집어 내시는 것일까요?

 

 

 

중학교 때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이민와서 한 1-2년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인 것 같습니다.

롤로 스케이트를 타고 집 앞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오른쪽 무릅을 다쳤었습니다.

그 때 저는 별일 아닌 줄 알고 그냥 다친 무릅을 방치해 놓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었는데 하루, 하루 지나갈 수록 그 다친 무릅이 점점 더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아팠었냐면 학교 친구 둘이 제 양쪽에서 부축을 해줘야 할 정도로

아파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었습니다.

그 때 제 기억으로는 그 오른쪽 무릎이 곪기 시작해서 노란 것이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미련해서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아픈 것을 참을 수 없어서 한인 타운에 있는 한국 병원에 갔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날 정도입니다 하하).

그 때 의사 선생님이 저의 오른쪽 무릅을 보시더니 빨리 째서 고름을 다 빼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마취도 하지 않으시고 가위로 제 무릅의 피부를 도려내셨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아파서 의사 선생님에게 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함 ㅠ).

그러시고는 두 손으로 제 무릅을 양쪽으로 누루셔서 고름을 계속해서 짜내셨는데

그 때 얼마나 아팠는지 ... 휴... 지금도 그 때 그 생각을 하니 좀 그러네요. ㅎ

 

어쩌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속에 숨겨져 있었던 너무나도 아픈 상처들을 어떠한 계기로 다시금 끄집어 내셔서 그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사 싸매어 주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비록 그 상처들이 다시 표면화되었을 때에는 너무나 마음이 괴롭고 힘들겠지만

마치 살을 도려내는 과정이 없이는 제 무릅에서 고름을 없애고 온전히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괴롭고 힘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호세아 6장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왠만해서는 문 닫지 않습니다.

 

 

우리 동네 중국집,

몇번이고 월요일에 갔다가 문 닫혀 있길래

나는 나 같은 목사처럼 중국집 주인 아저씨도 월요일 날 쉬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월요일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무심코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전화받은 아줌마에게 월요일도 문 여나고 물었더니 문을 연다는고 말하는게 아닌가.

나는 음식을 주만한 후 그 아줌마게 10분에 오라고 해서 음식을 가지고 갔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아서인지 나는 음식 값을 계산하면서

일하는 다른 중국집 아저씨에게 월요일 날 중국집 여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하는 말 '중국집은 왠만해서는 문 안닫습니다.'

그 말이 아직도 내 머림에 맴돌고 있다.

 

'교회도 왠만해서는 문 닫지 말아야 하는데 ...'

 

 

 

 

 

외로운 광야를 하나님의 동산으로 ...

 

 

광야와 같은 곳에서

군중 속에 외로움과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나의 무기력함을 깊이 경험할 때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광야를

하나님의 동산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외로움

 

 

경제적인 궁핍함으로 인한 힘듬보다

속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조차도 없는

외로움이 더 힘들고 더 괴롭습니다.

 

(어느 형제와 마음 문을 열고 대화한 후 적은 글임)

 

 

 

외로움과 고난

 

 

외로움을 통해서라도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요셉을 생각할 때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욕심

 

 

우리 마음에 욕심(탐심)이 있으면 결코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지 못할 죄가 없으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받지 못힐 죄가 없습니다!

 

 

용서하기를 거부?

 

 

만일 우리가 지금 다른 이들을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랑의 눈물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과거의 만남의 추억 속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던 마음이 뭉클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랑을 받은 자와 함께 같이 우는 사랑을 베푼자의 눈물은 소중합니다.

 

 

우둔하길 원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에는 우둔하길 원하며,

주님의 방법에는 민감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을 생각하면서 …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전적인 신뢰를 얻을 정도로

주님의 일을 사랑으로 지혜롭게 하신다.

 

 

우리 남편들은 ...

 

 

우리 남편들은

아내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도

아내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교회가 주님을 신뢰해야 하듯이

남편에게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 만남을 통하여

 

 

마치 다윗으로 하여금 요나단을 만나게 하신 것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의 만남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빚으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빚으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참으로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성도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몇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에

목회자는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낙심하고 심지어 절망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목회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낙심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라보는 목회자가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절망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로 인하여 실망하고 절망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변하되지 않고 변질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하기 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힘들어하고 실망하며 낙심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꾸준히(부지런히)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서 꾸준히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 받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변화시키고 계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꾸준히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변화시키고 계심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길 기원합니다(롬 12:2).

 

 

우리 문제의 원인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에 우리 마음에는 불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불만족이 있기에 우리는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문제의 원인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기에 우리는 불순종, 불만족,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

 

 

우리 부모들은 죽기 전에 우리 자녀들의 심비에 사랑의 추억들을 많이 적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죽어도 우리 자녀들은 그들의 심비에 적힌 그 사랑의 추억들로 인하여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들은 죽을 때까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죽어도 우리 자녀들은 그들의 마음에 담긴 그 예수님의 모습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좇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의 책임

 

 

우리는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 주고자 하고 있지만

그 자녀의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물려주지 말고

우리 세대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우리 사람들의 미련함이 이정도인가요?

 

 

참 답답합니다.

왜 이리 고집스러우십니까?  왜 이리 충고를 받지 않으십니까?

뻔히 '구덩이'에 빠지는 길인데 왜 그 길을 고집피고 가십니까?

구덩이에 빠져 보셔야 당신이 선택하신 길이 잘 못된 길이었는지 그 때서야 깨닫으시겠습니까?

이미 한번 비슷한 구덩이에 빠져 보시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겠습니까?

왜 또 이리 행하십니까?  우리 사람들의 미련함이 이정도인가요?

우리 서로 …

 

 

우리 서로 한 발 자국 뒤로 물러나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살펴 보십시다.

과연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 각자 하나님 아버지게 나아가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시길 ...

 

우리 서로 한 발 자국 서로에게 다가가십시다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고,

먼저 진심으로 용서하고,

먼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꺼예요.

 

 

 

우리 인생의 퍼즐들을 맞춰가시는 하나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든

우리 인생의 퍼즐들을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셔서

하나씩 하나씩 맞춰가시는 모습을

우리가 엿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퍼즐들을 이미 맞춰놓으시고 앞으로도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그 모든 퍼즐들을 맞춰가실 것이라는믿음이 생깁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

 

 

우리 하나님은

슬픔 중에 있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크게 보이다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동일하신 하나님이 작게 보이고

오히려 우리의 고난이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기도응답?

 

 

우리 기도의 응답이

우리 기대대로 현실화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현실화는

우리가 기도한 내용대로,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드리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기도하는 것이 더 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난관을 만났을 때

 

 

우리가 난관을 만났을 때 우리의 눈이 주님께 향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의 영적 저항력이 없어서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하기가 쉽습니다.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난관 속에서 영적으로 더 단련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지

아니면 영적으로 취약해져서 하나님께 범죄하던지...

 

 

우리가 당면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상황을 연단의 기회로도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 요동함이 없이 견고해야 합니다(시편 26:1-2).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있다는 증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영광"입니다. ㅠ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 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더 알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할 때 결코 우리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John Frame 교수님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영안이 열리지 않고서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으며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탕감)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원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빚진자 사상이 결핍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 수록 우리는 빚진자 사상이 더욱더 뚜렷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우리의 죄가 더욱더 들춰질 것이요, 우리의 죄가 들춰지면 들춰질 수록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필요성을 더욱더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으면 받을 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의 빚진 자 사상은 더욱더 뚜렷해질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찬송가410장, 1절)라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은혜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기에 우리의 빚진 자 사상이 부족하고,

이 빚진 자 사상이 부족하므로 우리는 ‘그래도 내가 좀 쓸모가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 쓸데 없고 쓸모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전적인 은혜로 사용하시고 계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더욱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빚을 얼마나 탕감해 주셨는지를 더욱더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빚진 자 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격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이성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우리는 감정(feeling)보다 사실(fact),

즉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the Word-driven)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삶이란

한 마디로 믿음의 삶(life of faith)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자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사(군사)들로서 영적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 되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이 말씀을 잘 다루는 용사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영적 싸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다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자들이 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

 

 

우리는

세속화 되지 말고

성경 인격화 되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우리의 불성실함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감사할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할지라도

내게는 평생에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영원히 감사할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조건은 구원이다.

그 조건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감사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살기로

다시금 헌신한다.

 

 

 

 

우리의 교만함과 위선만 더욱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ㅠ

 

 

만일 우리 목사들이

구속사적 성경 해석(Redemptive-historical interpretation)과

그리스도 중심된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정의 부부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Christ-like life)이 결핍되어

아내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 영광을 받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결핍된

구속사적 성경 해석과

그리스도 중심된 설교는

우리 목사들의 교만함과 위선만

더욱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ㅠ

 

 

 

 

우리의 도움이 필요없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해 나아가십니다.

 

[Iain M. Duguid, "Living n the Gap between Promise and Reality"을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빚으시는 하나님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케 하시고자

우리의 마음을 빚으시는 아버지 하나님 ...

 

 

 

우리의 미련함?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내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나의 미련함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

 

 

우리의 연약함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할 것입니다 ...

 

 

 

 

우리의 우상?

 

 

물질(wealth)과

높아지고 하는 욕망(desire for status)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fear of man) 및

자기-의(self-righteousness)는

우리의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C. D. "Jimmy" Agan III의 "The Imitation of Christ in the Gospel of Luke"를 읽으면서]

 

 

우리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닐 때에도 ...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진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우선순위에 두시고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준비, 하나님의 준비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하십니다.

우상화한 결과?

 

 

만일 우리 마음에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나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나 그것을

우상화하여 살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제일주의와 하나님 중심된 삶을

어떻게 사는지 그 skills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것이다.

 

(Edward T. Welch, "ADDICTIONS - A Banquet in the Grave"를 읽으면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시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여 받은 축복을 최우선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축복을 우상화 할 위험이 많습니다.

 

 

 

우월감을 가진 마음

 

 

 

우월감을 가진 마음으로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체휼할 수가 없습니다.

운전 하다가 4거리 신호등에서 든 생각 및 적용

 

 

오늘 운전하다가 4거리 신호등에서 빨간 불이래서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녹색 불에 양쪽 반대 방향으로 서로 지나가는 두 차 중

한 차는 좌회전 신호를 주고 좌회전을 하는데

직진하는 차가 빵!하고 크락션을 누르면서

좌회전 하는 차의 운전사를 째려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직진하는 차가 화날 만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으로 지나가는 그 직진 차를 자세히 보니까 좌회선 신호가 켜 있는게 아닌가...

아... 그래서 아마도 좌회전했던 차가 반대 반향에서 오는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좌회전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빵!하고 크락션을 누른 차의 운전사는 자기 차에 좌회전 신호가 켜 있는 것도 모르고

상대 방 차가 그 신호를 보고 먼저 좌회전을 한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생각을 우리 인간 관계에 적용해 보았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가끔 또는 종종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어쩌면 상대방의 문제이기 보다 우리 자신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직진하던 차가 자기 차의 죄회전 신호가 켜 있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상대방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고 '직진'하므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마찰이 일어나던지 또는 일어날 뻔하므로 

기분이 상하고 상대방에게 화를 낼 때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먼저 나 자신을 뒤돌아 보는 습관을 갖아야 겠다.

 

 

울고 웃었습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는

마음이 뭉클해서 눈물을 흘렸는데

점심에는 나를 사랑해주시는 동문 목사님들을 만나서 실컷 웃었습니다.

울을 필요가 있습니다.

 

 

 

울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것 엉엉 코눈물 흘리면서

울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다 쏟아내어 버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울을 필요가 있습니다.

 

 

 

 

웃을 필요가 있습니다!

 

 

 

웃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 것 신나게 웃는 순간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모든 무거운 것들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큰 웃음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원하는 것, 필요한 것?

 

기독교 동아리의 목적이 미션(mission)인데

그 동아리에 있는 많은 지체들이 교제(fellowship)를 더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아리 지도부 지체들이 쉽지 않지만

그 동아리의 목적인 미션에 초점을 맞추고자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달 말에 제가 졸업한 대학에 한 40명 정도가

2박 3일인가 가서 캠프스에서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자는 것은 캠프스 주위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슬링핑배그를 깔고 잔다고 함).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체가 목적에 이끌림을 받기가 힘들 정도로 지체들이 다른 것을 더 원할 때에

지도자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들이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것을 주시므로(고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믿음, 순종)을 주시고자 하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 사랑하는 아들을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 주면서 아들을 통해 배우면서)

 

 

 

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구하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기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길 원합니다.

 

 

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들어야 …

 

내가 듣길 원하는 설교를 듣기보다

내가 들을 필요가 있는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크게 웃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로 하여금 크게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기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위기 의식과 변화

 

 

위기 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기 가운데서 필요한 변화를 주님께서 일으키셔야 한다는 생각보다

내(우리)가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

 

 

위기는 변화의 기회임을 잊지 말자!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썩어가고 있는 살을 도려낼 수 있는 기회,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들이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위기는 기회이다.

 

 

위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는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을 들어야 한다.

 

위기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더 큰 위기에 있는 영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위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위기는 기회이다?

 

 

우리가 보기에 위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위기를 무슨 기회로 삼아야 할까요?

 

 

 

위로의 사역

 

 

다가가기

경청하기

기도하기

말씀 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