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 싫은 비판적인 사람?

 

 

자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만 비판하는 것보다 나은 듯 ...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배우는 자 앞에서 겸손히 인정할 줄 아는 인품이 없다면

그는 그 배우는 자에게 자기의 많은 지식은 자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배우는 자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하는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가르치려고 하기 보다 배우자

 

 

상대방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기 보다

상대방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자.

 

 

가식

 

 

인간관계에서 가식이 심하게 느껴지는 사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이 좋지 않습니까?

가식적인 눈물?

 

 

어쩌면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안수 집사님들 중에서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흘리는 눈물을

가식적인 눈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 세우기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세우길 원하시므로

우리는 가정 세우기에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 세우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선

겸손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특히 가정의 가장인 우리 남편/아버지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입술로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우리 남편/아버지들은

우리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남편/아버지들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죄요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사랑의 굶주려 있는 듯 하다.  

 

 

 

가정

 

 

가정... 마음에 미소와 푸근함을 준다 ... 

가정에서 죄가 제일 많이 들춰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가 가정에서 제일 많이 들춰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많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짓고 있습니다.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없다는 것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없다는 것,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장의 역활을 해야 한다는 것,

어깨의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스스로 감당하다가

이젠 심신히 너무나 지쳐 삶의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싶을 정도로 하루 살이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니 ... ㅠㅠ

 

 

가정의 고충과 고통

 

만일 내 사랑하는 딸이 미혼모라면, 그래서 내가 손주를 돌봐야 한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

두 배로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사랑하는 딸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고,

사랑하는 손주를 생각할 때도 마음이 아플테니 ...

만일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동성을 데리고 온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

이러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이 현실을 나는 부모로서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가정의 위기를 통해서라도

 

 

가정의 위기를 통해서라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그 가정의 고통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화평이 참 중요합니다.

 

 

가정의 화평이 참 중요합니다.

물론 부부 관계에서 갈등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그 갈등 속에서도 화목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부부 관계를 해치는

모든 제 3자 관계를 막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 제 3자가 사랑하는 자녀이든 부모님이든 간에

부부 관계의 화목을 깨트리는 위험이 있다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가족 관계에서 오는 행복보다 스트레스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제거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가족, 감사하십시다.

 

 

가족, 감사하십시다.

은혜입니다.

배우자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자녀(들)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감사하십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의 암도 감사해야지요.

그 이유는 "암"이란 포장된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을 어제 주일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축복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은 사촌 동생이 자기 남편과 다섯 딸 앞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식구들 앞에서 하나님은 "My Father and my salvation"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요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등등...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가족 관계에서 건강한 마음은?

 

 

자식이 질병이나 정신 질환 등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향하여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심지어 죄책감까지 들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녀 또한 부모님이 다투고나 싸우면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싸운다고 생각속에서 자책까지 합니다.

가족 관계에서 건강한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요?

갈등을 통한 배움

 

 

인간관계...  갈등...

갈등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과 죄가 들춰진다.

마음의 무거움과 죄책감 속에서 나는 허덕인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내 마음에 다가오셔서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 결과 주님께서는 나의 죄를 자백케 하시사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므로

내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해주신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사모케 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넘쳐 흘러 그 지체를 더욱더 사랑케 만들고 계신다.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로 쓰임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갈등을 통해서 배우는 중이다.

 

 

갈등의 유익?

 

 

가족 식구들끼리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어떤 때는 갈등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갈등을 통해서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으며

또한 서로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눈물

 

 

짧은 만남 속에서 마음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 눈물은 마음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부어주신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감사하고 싶었던 진심을 표현

 

 

감사하고 싶었던 대학원생 자매에게

오늘 오전에 기회가 주어져서

그 자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지금 이 밤에 오늘 하루를 뒤돌아 볼 때

오전에 그 자매와의 만남 속에서

내 감사하고 싶었던 진심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새벽에

생각이 나서 웃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하는 이유

 

 

무엇을 얻어서 감사하기 보다

무엇을 잃지 않아서 감사할 필요도 있습니다.

감사하며 기쁨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의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엿보니

감사하며 기쁨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

 

 

인간의 눈으로 그 힘든 상황을 바라볼 때에는 감사할 수 없겠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할 수 없어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점점 11월의 추수감사절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감사하기 힘든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감당하기가 벅차고 힘들 정도로 몇 가지 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힘든 상황들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그 중에 한 방법은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철저히 여러모로 지쳐있으므로 말미암아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을 의지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없어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감탄에서 한탄으로 ... ㅠ

 

 

하루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감탄으로 시작했건만

나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한탄으로 반나절을 지냈으니 .. .ㅠ

 

 

 

 

 

 

값진 댓가를 치뤄서라도 …

 

 

값진 댓가를 치뤄서라도

교훈을 받아

그 교훈대로만 살 수 있다면 ...

강요 보다 필요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나의 비전이나 목표 등을

상대방에게 강요(impose)해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상대방의 필요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겸손히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강점이 약점이 될 수도 …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강점을

약점으로 만들려고 오늘도 끊잉없이 다가와

우리 마음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단의 공격에 너무나 노출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강점을 약화시키는 사단의 공격에 양보하므로

말미암아 너무나 약해져 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자신의 강하심(능력)을 나타내시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같이가 함께가 아닐 수도

 

 

주님의 일을 같이 한다고 하여

꼭 함께 한다고는 볼 수 없을 수 있다.

거대한 실용주의적 압력에 굴복?

 

 

지금 우리 교회는 교리를 최소화하려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실용주의적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듯 하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진리의 영웅들"을 읽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은 …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지 않은 나의 오래된 지극히 작은 죄도 들춰내시고 깨닫게 하시사

나의 죄를 자백하며 회개케 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지극히 작은 일들도 깨닫게 하시사

하나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뢰 관계에 금을 가게 만드는

질투하는 가까운 다른 사람의 그럴싸한 속삭임을

마음으로 듣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거스를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도자가 물에 술탄듯, 술에 물탄듯 우유부단하여서

좇는 자들이 잘 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거스르지 못한다면

이것은 지도자라기 보다 끌려가는 자입니다. 

지도자로서 좇는 자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야지

잘못된 길로 이끌려 가서는 아니되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거짓 목사

 

 

거짓 목사는

무슨 일이든지 다 괜찮다고 현재의 상황을 축복하면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도전하거나 폭로하지 않고

그들이 그냥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거짓말하는 자들을 통한 마음의 연단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로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연단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있는 불순물인 거짓을 다 제거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진실되게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음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다.

걱정이 됩니다.

 

 

걱정되는

한국 신학교와 한국 교회 ...

 

 

건강관리 및 자녀양육

 

 

 

건강관리를 잘 하기 위해선 음식조절 및 운동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잘 지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스트래스를 잘 극복해야 한다.

적당한 스트래스는 필요하지만 너무나 지나친 스트래스는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한 삶과 나누는 삶과 예배 및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녀 양육을 잘 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자녀들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해서 개발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디딤돌이 되야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꽃이 필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자.

 

 

건강한 양심?

 

 

진리로 양심이 건강해져야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진리에 순종하는 마음에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사랑하는 아내와 "A Hidden Life"란 powerful한 영화를 본 후)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겉으로는 반가워 하고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마음으로는 싫어하고 짜증내며 귀찮아 하는 것,

이런 사람과는 주님 안에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진정한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진실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밝고 환한 웃음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그녀의 마음에는 자신의 슬픔과 아픔과 우울함을 더욱더 포장하여

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깊은 고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부부라 할지라도 …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부부(또는 가정)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관계가 심각한 부부(가정) 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의 힘보다 은혜의 힘으로 …

 

 

인간의 결과의 힘으로 섬기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묵묵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부가 함께 하십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한 죄인 남자가 한 죄인 여자와 결혼할진데

어떻게 그 부부 관계에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부가 함께 삽니다.

 

 

결코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결코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결혼 전에 충돌을 통해서라도 ...

 

 

결혼하기 전에 서로에 대해서 좀더 잘 알아가기 위해서

비록 남녀가 충돌이 있다 할지라도 서로 마음 문을 열고

각자 자신 속 마음에 있는 것들을 들춰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어느 정도 미리 서로를 알고 결혼하는 것이

거의 전혀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결혼해서 부부가 계속 충돌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John Piper 목사님의 "Preparing for Marriage"를 읽으면서)

 

 

 

결혼 준비

 

 

결혼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특히 상대방 배우자가 될 사람을 위해서 마음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그 마음 준비 중 하나는 지난 날 마음에 있는 상처들을 치유받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적어도 배우자가 될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처 입는 마음을 고백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배우자가 될 상대방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다.

 

 

 

결혼 준비

 

 

싱글 지체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결혼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마음에 심겨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준비되지 못한 결혼은 아름답지 못하다.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상대방의 가능성을 보고 결혼한다는 것,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현재 그 사람의 성품이나 삶의 습관에 문제점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변하겠지(나아지겠지)라고 추정하는 것은

큰 오산일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그 사람의 문제점을 위험신호로 여기고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Josh Mulvihill의 "PREPARING CHILDREN FOR MARRIAGE"를 읽으면서)

 

 

 

 

결혼에 대해 ...

 

 

자녀들은 교회에 가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결혼"에 대해서 배우는데

집에 와서 부모님을 바라볼 때에는

배운 말씀과 너무나 거리가 먼

부모님의 부부 생활을 보면서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John Mulvihll의 "PREPARING CHILDREN FOR MARRIAGE"을 읽으면서)

 

 

 

 

 

결혼이란 ...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그 남자의 가정과 그 여자의 가정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두남녀가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부부 관계가 성장해야 할뿐만 아니라

양가 가정의 관계도 성장하는데 헌신해야

축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연애와 결혼과 성적 유혹에 대하여 나눔을 한 후)

 

 

 

겸손한 말, 그러나 교만한 마음?

 

 

겸손하게 보이게 만드는 온유한 말이지만

어쩌면 그 마음은 매우 교만할 수도 ...?

 

 

겸손한 사람

 

 

겸손한 분은 존경스럽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교만함을 들춰지기 때문이다.

 

 

 

 

경건한 질투

 

 

경건한 질투는 부부의 하나됨을 지켜주지만

불경건한 질투는 그것을 깹니다.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

 

 

행실이 나쁜 사람에서

습관적으로 잘못을 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기 방식이 굳어져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을

경계하며 멀리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경계하시시다.

 

 

주님을 향한 열심이 나의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십시다.

 

 

 

 

 

 

경제권을 가진 부모님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이

자녀를 경제적으로 도와주려고 할 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하지

그 자녀를 통제하려고 하면

그 관계는 갈등 속에서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닌데 ...

 

 

상대방이 그려러니 한다고 해서

내가 계속해서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닌데 ..

 

 

 

고 오덕겸 장로님의 가르침

 

 

사람을 내가 바꾸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주님의 사랑으로

겸손히 인내하며 섬기자.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배우는 장인 어르신의 삶으로의 가르침)

 

고난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고난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우리는 주로 신음하며 상처와 눈물 속에서 허덕이곤 합니다. 

그리곤 우리는 원망까지도 해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누구 탓이라도 해야 좀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원망하곤 합니다.

우리는 사람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탓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 탓, 상황 탓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은 잘 탓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우리 사람은 더욱더 이기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이되면 우리는 고난이 자기 자신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고난 당하는 이기적인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고난 자체 보다

 

 

우리는 고난 자체 보다

누구 안에서, 누구랑, 무슨 목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L. Anne Jervis, "At the Heart of the Gospel"을 읽으면서)

 

 

고난 주간에 ...

 

 

고난 주간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고난 당하고 있는 내 이웃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길 원하여

그 이웃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길 기원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므로

예수님의 고난으로 하여금 우리의 고난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인내하며 견디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

 

 

고난의 길을 믿음으로 걸으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단련되어 강해질 때

우리는 세상과 죄악과 더욱더 분리되는 거룩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을 보는데로 걸을 때에는 우리가 영적으로 약해져서

세상과 짝지어 살면서 불신자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이유 보다

 

 

고난의 이유(원인) 보다

고난의 결과(소망)를 생각하자!

 

 

 

 

고독의 한 복판에서 …

 

 

고독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갈망이 훨신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갈망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 원하시는 갈망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백하니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짐을 고백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고지식

 

 

우리는 "고지식" 할 필요가 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고지식"하다고 생각할지라도 ...

우리는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원칙주의자라고 말할지라도 ...

아무리 주위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튀는 말과 행동을 한다고 뭐라고 비판할지라도

우리는 좀 고지식하고 원칙을 따르는

소히 사람들이 말하는 "꼴통"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통 회개

 

 

고난을 통해서라도 회개를 할 수만 있다면 ...

 

("욥"이란 이름의 뜻인 "고난받는자", "회개하는 자"를 생각히면서)

 

 

 

고통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고통 ...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흘릴 수 없는 고통 ...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는 고통.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부모님에게 입은 상처, 배우자에게 입은 상처,

자녀에게 입은 상처, 형제, 자매에게 입은 상처,

친척에게 입은 상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한 4 가지로 반응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를 가리켜 하나님과 춤을 추는 스텝 4 가지라고 말합니다.

 

  1. 하나님과 춤을 추는 첫 번째 스텝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울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인정하기보다 부인(deny)하려고 하던지 무시(ignore)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려고(suppress)하려고 합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을 당할 때마나 원망하며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할 확률이 많습니다.

 

  1. 하나님과 춤을 추기 위한 두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 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이 뭔지 알아야 우리가 그 원인을 직시하던지 안하던지 할 텐데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할 뿐더러 설상 우리가 그 원인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본능은 그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피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1. 춤의 세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부정하는 데 쏟아 부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 우리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가운데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어둡고 무서울 수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터널에 들어가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1. 춤의 마지막 네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의 터널에 들어가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과 상처에 치유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움을 받아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지체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지체,

그 대를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픔니다.

그 대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길 기원합니다.

 

 

고통에서 건져주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건져주시기 이전에

그 모든 고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 원인인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어떠한 혜택을 바라고 섬기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원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How To Read Job"이란 책을 읽는 중에)

 

 

 

고통을 형통의 복으로 …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을 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다.

 

 

 

고통의 길을 ...

 

 

내 마음의 고통을 통하여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의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고통의 길을 겸손히 믿음으로 걸어가리라.

 

 

고통의 문제

 

 

고통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는 죄의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으심으로 해결되었다.

 

 

고통의 문제 2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기보다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

 

 

 

고통의 문제보다 죄의 문제가 ...

 

 

고통의 문제(Problem of pain)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죄의 문제(Problem of sin)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합니다.

고통의 순간도 함께 지고 즐기기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에 들어가

그 자녀와 함께하는 순간 순간을

주님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기길 원합니다.

 

 

 

 

 

고통의 필요성과 유익

 

 

고통을 통해

주님은 내 좁은 마음을 넓히시사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의지케 하십니다.

 

 

 

 

 

공감한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반갑고 기쁘며 힘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우리는 과거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구원의 확신과

미래의 구원의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과거를 뒤돌아 볼줄 아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히 부르짖을 때에

과거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중에서도

우리를 반드시 또한 분명히 건져주실 것이라는

확신(confidence)을 가져야 합니다.

 

(W. Robert Godfrey, "LEARNING TO LOVE THE PSALMS"을 읽으면서)

 

 

과거의 상처를 다시금 생각나게 만든 현재의 상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었던 깊은 상처를

현재에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다시금 기억이 나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주님께서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일 수도 ...

과연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나도 임박한 죽음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특히.가족 식구들에게,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인생은 ...?

 

 

과연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인생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모험을 하는 인생인가?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약속의 말씀의 성취가 더디고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과거 지향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관계가 여기까지 인가 보네요 …

 

 

주님 안에서

우리의 관계가 여기까지만 인가 보다 하고

move on하는 것도 좋을 듯 ...

 

(주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실 것을 믿기에)

 

 

 

 

관심이 욕심으로?

 

 

관심이 너무나 지나치게 되면

욕심으로 변질될 수도 ...?

 

 

 

관심이 필요한 듯 …

 

 

생각보다 여러 형제, 자매들이

다른 지체들과 연락을 별로 하지 않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듯 ...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지체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을 듯 ...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어제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44일 생일 새벽기도회 때 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고 싶습니다(3절).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으니라”(2절)고 전파하고 싶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 역사가 있길 기원합니다(5-6절).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싶습니다(3절).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첩경을 평탄게 하길 원합니다(3절).

주님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로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소리가 되고 싶습니다.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있길 기원합니다.

 

 

 

 

괘락 우상

 

 

탐닉에 휩쓸려 통제력을 상실하게되면 우리 자신이 통제하기 위해서

비인격화시킨 쾌락의 세계가 이제는 우리를 비인격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쾌락은 우리의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 때부터는 그 우상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져

우리를 이용하기 시작하여 우리는 쾌락의 종이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괜찮다고 안심을 시키는 목사님?

 

 

 

우리 목사들의 얄팍하고 가벼운 메시지는

부패하고 거짓된 교인들에게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안심을 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안괜찮은데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통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괜찮은 삶을 살고있는 것인가?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겉모양을 중요시하는 문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정서,

 

그래서 스펙을 쌓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겉치레를 할수 밖에 없는 우리,

다른 사람들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 우리,

 

그런데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지금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