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30장> 경험과 실제에 대해서

 

얼마나 피곤하고 곤고한 인생인가? 스스로 죄를 짓는데 피곤할 뿐만 아니라(렘9:5),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전1:8)

성도의 영적, 육체적 피로는 때때로 자신의 연약함을 일깨워 겸손케 하고,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짐을 통해, 내게 족한 은혜를 깨달아(고후12:9)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가는(약1:3) 영적 성숙의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와 악의의 원인이 되어 영적 침체에 빠뜨리기도 한다.

신자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므로, (마26:41)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며 기도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피곤과 절망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피로하고 곤고한 이들에게 잠시간의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잠시만 참아내면 다 잘 될거야'라고 다짐해보나, 우리의 기대는 쉽게 무너진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르고 나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했던 바는 어느새 마땅히 얻었어야 할 당연한 권리로 여겨져버리기 때문에, 이 권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실망과 분노가 된다.

편지가 쓰여질 당시의 전쟁 상황과 같이,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저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아서, 뭉개진 시체의 흔적이 벽에 남아 있는 광경들을 발견한다면, 혹은 오랜 포로생활에서 곧 자유를 얻을 줄 알았던 북한의 동포들이 여전히 흑암 가운데서 절규함을 본다면, 또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저 위험천만한 상황을 본다면, 미움과 폭력 가득한 이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의 실제이고, 내가 믿어온 하나님은 허상에 불과했던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나의 믿음이 내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고,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어찌 하나님이 계시다 하겠는가? 

그러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62:5) 하신 바처럼 나의 소망은 상황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께만 오롯이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이에 따른 변치 않는 언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현시되었고,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들의 회심과 성화의 열매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통해 실체화되었다.

모든 경험은 언제나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영광을 드러낸다. 전쟁 중의 상처로부터 왜 인간의 죄성과 나의 소망없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전쟁 중에서도, 북한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심하여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기도하는 모습들을 왜 발견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저들처럼 스스로 싸우며 스스로 멸망하는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보호하시고 보존하고 계심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육신은 연약하고 쉽게 피곤하여 우리의 인식과 사고는 언제든 왜곡되기 마련이다. 내가 당장 피곤한데 하나님을 떠올리며 지혜와 명철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과 인식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붙들어야할 진리가 되어야 한다.(요17:1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진리이심을 다시 한 번 고백한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