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29장> 용기에 대하여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을 마주한다. 전쟁이나 전염병, 그리고 각종 사회 문제 등 실체적인 위험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마귀는 이때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교만을 유도하기도 하고, 증오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때 마귀는 신자의 참된 용기를 가장 두려워한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용기란, 단순히 수많은 미덕 중의 하나가 아니라, 시험의 순간, 즉 가장 첨예한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에 모든 성도의 미덕이 하나같이 발휘되도록 하는 용기다. 스크루테이프의 말에 따르면, 위험에 굴복하는 순결함과 정직이나 자비는 조건부의 순결함과 정직이나 자비에 불과하며, 참된 용기야말로 모든 미덕의 기초가 된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용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 분을 신뢰하는데서 나온다. 극심한 위험과 고통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과는 무관한가? 하나님은 계시는가? 라는 본원적인 질문과도 마주하게 되며, 이들 질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의지하고 나의 믿음에 대해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험으로 가득찬 세계마저도, 하나님께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을 따라 계획한 그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신자의 용기를 샘솟게 한다.
죄의 위험성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깨닫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시련은 두려워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맹목적인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된다.
용기는 무모함과는 다르다. 포탄이 떨어질 때 집을 지키기보다는 피난처로 대피해야 하며, 강물이 범람하려 할 때는 둑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몸과 가족과 재산도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청지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정한 피난처와 제방이 되어줄 것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우리의 영혼마저 지켜내야 한다. 그때서야 우리의 모든 미덕과 성령의 열매들이 동일하게 발휘될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비겁함과 증오로써 정당화하기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두려움을 털어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용기 있는 신자의 태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용기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쉬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미덕 가운데 살아내는 용기는 어려운 것인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분을 위해 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존 맥아더의 말이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