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23장>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아니 그 이전부터 복음서가 아닌 역사 속에서 예수를 찾으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복음서에 드러난 신비로운 비밀들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본질을 역사 속의 예수님으로 한정하려는 헛된 노력은 예수님을 심각하게 왜곡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잘해야 윤리서로 격하한다.
그러나 성경은 꾸준히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유일한 해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는 그 어떤 율법도 지킬 수 없는 인류에게 주어진 윤리서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성도는 역사를 통해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역사를 조명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모사라고 할 정도로 완전한 그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삼위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 계시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완성된 계시인 성경이 주어졌고, 성령께서 신자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며 계시의 빛으로써 활동하신다.
성경이 성령님을 통해서 계시하는 역사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역사다. 그것은 신비의 영역인 동시에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실체다.
스스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깨달을 수조차 없었던 수많은 죄인들의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의 전진들이 지금도 수없이 발견된다.
역사적 예수가 단지 신학자들의 문제만이 아닌 이유는, 아직도 내가 이처럼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경험하지 못하여 그저 역사로서만 존재하셨던 예수님을 믿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나의 주인 노릇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발견하고 통렬한 회개를 경험하였는가? 자신의 소망 없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천국 소망을 발견하였으며, 이 소망이 내가 의지하는 전부인가? 도덕적인 범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고 나 자신을 사랑했던 죄마저 미워하고 혐오하여, 매일 자기 자신을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고 있는가?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전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경험과 소망으로 인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있는가?
이처럼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믿음으로써 나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나에게 이러한 구원의 증거와 표지가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역사여야 한다.
너무나 기본적인 교리이고, 심각하게 고민해봐야할 지점이다. 이러한 교리가 거부되고 체험되지 않는다면, 그저 역사적 예수만이 내게 남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우상만이 남을 뿐이다.
이 모든 살아있는 역사들은 내가 복음 앞에 엎드릴 때 일어날 것이다. 나의 오늘 하루가, 지금도 주님이 살아계심을 선명하게 증거하는 역사가 되길 소망한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