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6장> 교회를 판단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 다니는 교회에 등록한지 1년 쯤 되어간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이사를 하면서, 한동안 대형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새로 교회를 정해야 했는데, 내 나름의 교회 선택의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예배 후, 십자가 복음이 가슴에 남고 천국 소망이 가슴에 남는 교회였다. 

가까운 교회를 원했던 이유는 예전에 다니던 교회가 크고 먼 교회였기 때문에 내 삶과 신앙이 분리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동네에서는 막 살더라도 교회에서만 성도인 척하면 별 문제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동네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면서 내가 있는 그대로 노출된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는 것만큼이나 복음에 가까운 교회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목회자 분들은 자아성찰의 차원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비교적 쉬울지 잘 모르겠지만, 평신도 입장에서는 스크루테이프가 말한 교회감별사 내지 감정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최소한의 기준만을 정한다고 해도, 막상 교회에 방문하여 설교를 듣고 나면, 도덕 강사나 가정상담사의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 들거나 그저 TV의 아침마당 프로그램을 시청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 번은 1시간의 설교 시간 동안 십자가는커녕, 하나님, 예수님이란 단어나 단 한 번의 성경 구절조차 등장하지 않은 채, 부부 금슬을 위한 메시지만 듣고 나온 적도 있다. 

반면, 아주 보수적인 개혁주의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거나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장로교인가 성결교인가, 통합 교단인가 합동 교단인가 아니면 합신인가, 알미니안주의인가 칼빈주의인가 보다는, 내가 바른 신학에 힘쓰며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교단에 속해서도 자신의 신앙은 알미니안적일 수도 있고, 개혁주의 교단에 속해서도 개혁주의적인 정서는 있을지언정, 자신은 전혀 거듭남을 경험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구원받은 것이다. 이 거듭남은 나의 옛 본성을 지배하던 죄에 대한 혐오로부터 시작되지, 교회에 대한 혐오와 비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예배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나의 옛 본성에 대한 자각이지, 삐걱대는 의자나, 옆에 앉아 기침을 연신 해대는 성도나, 목사님의 말투나 세련되지 않은 교인들의 모습이 아니다. 내가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는 목사님이나 성도들보다 내가 더 나을 것도 없다.

나는 기독교의 다양한 교단과 그들의 다양한 신학과 다양한 교리를 모두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성경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확실히 말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어느 교단에 속해 있든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신뢰한다. 예컨대 해외 체류 중에 예배를 위한 교회를 찾다보면, 지역 내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교단을 찾기는 어렵다. 교회 자체가 한두 군데 있을까 말까한 지역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할 때, 그곳에 복음이 없고 회심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곳에서나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단 하나의 성경을 읽고 단 하나의 성령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또한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들도 단 하나의 하나님을 믿고 단 하나의 진리 가운데 설 것이라 믿는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좋은 교회를 선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나를 좋은 교회로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그 겸손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자 되고 싶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