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4장> 겸손과 재능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신앙과 정서에서 '겸손'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율법적인 겸손'이고, 하나는 '복음적인 겸손'이다. '율법적인 겸손'은 율법의 엄격성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율법에 제압당해 갖게 되는 겸손으로서, 거듭남이 없는 악인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겸손이다. 즉, 그는 높아지고자 하지만, 율법에 의해 강제적으로 굴복당한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겸손하게 된 사람은 스크루테이프의 말처럼 율법을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경멸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고, 자신이 '겸손'이라는 하나의 율법을 지켰다는데서 오는 뿌듯함과 우월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반면에, 복음적인 겸손은 죄의 혐오스러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도덕적 아름다움에 취하여 자신을 높이려던 옛 성향을 죽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만을 바라며 자신의 영광을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할 겸손의 본질이다.
우리가 복음적인 겸손 가운데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 우리가 혐오하고 미워하며 부인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죄의 문제이지, 나의 가치 문제가 아니다.
나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하신 작정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소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믿음의 영역에서의 부르심, 즉, '내적인 소명'이고, 또다른 하나는 세상 임무로의 부르심, 즉, '외적인 소명'이다.
내적인 소명, 즉, 영적인 소명은 해가 모든 사물에 동등한 빛을 비추듯이, 모든 성도들마다 동등하게 주어진다. 이 영적인 소명 앞에서 성도간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영적인 소명이야말로 영원한 소명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참으로 값진 보배이기 때문에, 외적인 소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만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반면 외적 소명에는 각 성도마다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자비로우신 작정을 따라, 각기 다른 민족과 다른 신분과 다른 직업으로 부르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다른 신체적 조건과 외모와 재능을 부여받는다.
이처럼 개별적인 외적 소명을 따라 다양한 직업과 신분과 재능으로 성도를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사역을 위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각 성도가 각기 다른 은사와 위치를 가졌을 때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로서는 완전하고 온전한 능력과 기회를 고루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능과 외모도 모두 교회의 온전한 사역과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기에 우리가 그 가치를 깎아내릴 수 없다.
따라서 성도의 존엄과 가치는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에서 나오고, 각 개인의 실제적인 차이가 타인을 판단하거나 나 자신을 높이거나 낮추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성도의 겸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가운데 ‘모든 성도(자기 자신을 포함해서)는 하나같이 영광스럽고 뛰어난 존재가 된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