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2장> 아주 오래된 교인들에 대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7) 부활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확인하고자 하셨던 것,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에게 원하셨던 전부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교회에 출석하였느냐, 봉사하였느냐가 아니다. 

여전히 교회에 드나들며 성찬에 참여하고 있어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소한 궤도이탈로 치부될 수 없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중략)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015B- 아주 오래된 연인들)

어릴적 즐겨듣던 이 노래 가사처럼, 석연치 않은 감정을 뒤로 한 채, 의무감으로 안부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말한들, 주말이 되어 습관적으로 만나 봉사를 한들, 그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다면, 이 사귐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화석화된 신앙은 그저 죽어버린 종교활동에 불과하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 마음의 찔림을 들여다볼 용기도 없다. 이 불안하고 찝찝한 마음과 미뤄둔 마음의 숙제를 잊게 하는 데는 사소한 흥미거리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학창시절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서는 평소 안보던 다큐멘터리나 뉴스마저 왜이리 재밌었는지, 도서관에 앉으면 왜이리 몽상에 빠졌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에게서 흥미를 잃었을 때도, 별 것아닌 호기심이나 장난과 사소한 유흥에 빠져보기도 하고,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길고도 어둑한 몽상의 미로에서 헤매이며 성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는 것, 지금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할 일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고서도 그의 부활에 대하여 냉랭하며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나,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야 그 마음이 뜨거워졌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말씀에서 하나님의 여전하신 사랑과 약속의 소망을 재확인하였을 때, 015B의 노래 가사처럼,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렘을 찾게 될 것이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