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9장> 쾌락과 기복에 대해서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즐거움의 모형이어야 한다. 즉, 천국을 더욱 사모하게 하는 즐거움이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이다. 

예컨대 스크루테이프가 이용하려는 성적인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 간의 하나됨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사랑안에서의 친밀한 연합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가 날마다 음식과 음료를 먹는 즐거움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양식과 음료되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며, 놀이의 즐거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의 모형이 되어야 한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아7:6)

주님께서 거듭난 성도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즐거움을 느끼시듯, 성도 역시 아름다우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였다.(딤후3:4)

타락한 인류의 만성적인 결핍, 즉 불만족의 이유는 주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움, 즉,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인데, 우리가 다른 것들로 이 결핍을 채우려 한 결과로, 채워지지 않는 결핍 속에서 중독과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에 의지하여 주께로 돌아와 누더기와 같던 옛 마음을 찢고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의의 옷(롬13:14,시132:9)을 덧입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게 된 자들이다. 성도는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은 성도를 기뻐한다.

다만, 성도의 거룩이 금욕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쉼과 오락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주님을 찾는 심령 안에서 먹고 마시며 주님 안에서 쉴 수 있다면, 건전한 오락과 쉼을 통해 천국을 더욱 소망할 수도 있다. 교회의 수련회처럼, 성도간의 교제의 기쁨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잔존하는 육체의 본성에 잠시나마 그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점에 늘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 속에서 세속의 쾌락에 대한 유혹을 받을 수도 있으나, 성도는 이전의 즐거움에 만족할 수 없으며, 결국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 .

나는 대학 시절 초신자로 교회에 등록한 후 한동안은 술을 멀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동아리의 술자리에 가던 중, 수요예배 중인 교회 앞을 지나며, 술과 친구들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고, 즉시 약속을 취소하고 생애 첫 수요예배에 참석한 이후로 술을 끊게 되었다. 우리가 어려서는 장난감으로부터 즐거움을 누리다가 성장하여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하고서는 장난감을 찾지 않게 되듯, 성도 역시 그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자라남에 따라 주님과 함께 하는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때로는 예배의 즐거움에 흥미를 잃고 꿀송이보다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를 잃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에 흥미를 잃었다’는 명제가 ‘이것은 거짓이다’는 명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주님께 흥미를 잃은 것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거나(민11:23), 주님께서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믿음의 연약함이 잠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이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현실적인 염려와 고난이 주님의 능력을 가린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고난이 가린 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아니라 나의 작은 눈일 뿐이니, 주님은 내가 믿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나, 믿음의 산을 넘을 때나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시며, 이 동행의 사귐을 통해 골짜기에서나 산에서나 나의 즐거움이 되어주신다. 

혹자는 이 신앙의 기복이 두려워서, "나도 한 때는 뜨거웠지!", "나도 청년 때는 저랬어." 하며 감정의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나, 신앙의 본질은 주님과의 교제하는 기쁨에 있다는 사실과 이 기쁨에는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에게만, 천국을 소망케하는 이 기쁨이 누려질 것이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