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4장> 기도에 대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임한 것 같이 이 땅에도 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영광받으실 것을 먼저 기도한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어야 한다.
성도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성도와 성도, 그리고 피조물 사이에 사랑의 사귐이 있는 나라다.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일들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슬픔에 잠겨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또는 엄마의 존재에 신이 난 아이처럼, 그 품에서 나의 상황을 하나님께 소상히 아뢰며 나의 필요를 구하되, 그리하지 아니하시더라도,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중을 예단하여 적절한 말들만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필요들도 함께 고하되, 그 처분에 대해서는 전적인 의존과 신뢰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 이 땅에 부분적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 분과의 사귐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운데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의 사귐 중에 우리에게 행하시는 방식이다.
특히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영적인 기도는 줄창 읊어대는데, 어머니의 류머티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병상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되, 그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구원만을 기도한다면, 우리가 그 기도의 자리에서 성도의 사랑의 사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모임 중에 대표 기도를 하게 되더라도 그리 창피하지는 않을 만한, 꽤나 경건해보일만한 익숙한 문장들을 골라내며 암기된 기도를 반복하거나, 내 감정을 억지로 고양시키려는 기도, 혹은 그저 내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도, 내가 기도할 때 자주 반복하는 오류들이다.
기도의 주도권조차 나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께 내어드리면 좋겠지만, 내 영적 의무감이나 현실적인 갈급함 사이에서 기도하는 중에, 그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쉽지 않아도 기도해야 하며, 외워진 기도든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든,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 내가 기도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과 기도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성경을 읽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기도하고,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 내게 말씀하시어 내 속사람이 겸비케 됨으로써, 겉사람의 입이 아닌 성령님의 입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도를 통한 사귐의 유익이 더욱 클 것이다.
이처럼 말씀이 기도와 서로 짝을 이룰 때의 또하나의 유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내가 상상해내고 합성해낸 가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며 불변하시는 오직 한 분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참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못하다면, 내 기도가 심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여, 스스로의 심중에만 자문자답하는 기도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세상의 유익이 아닌, 나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꽤나 경건한 기분은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기도가 그저 자신의 마음을 성찰해나가는 세상의 심리학이나 명상법과 같아서는 안된다.
성도의 기도와 묵상은 다른 종교의 명상이나 마음치료법들과 같지 않다. 세상의 명상 수련법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비워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의 묵상과 기도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옛 본성을 쳐낼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소망으로 채우는 것이며, 주님과의 깊은 사귐이 그 목적이다.
이렇게 성령님을 통해 기도하고 성령님으로만 충만해진다면 기도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성화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기울어진 나의 새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쏟아부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하여 내 옆의 가족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그 가운데서 거룩과 천국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들을 뚫고 나갈 때, 하나님께 아뢰어 하나님을 통하여 극복되어지는 과정들과, 우리의 필요가 깨달아지고 그 필요가 채워지는 과정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더욱 밝히 알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
며칠전, TV에서 타로 카드에 심취하여 결혼과 이사 등 중대사들과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결정을 타로에 의존하시는 분을 보았다. 타로가 아니어도 이전까지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존하였다. 만약 이 분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면 아마도 타로 대신 기도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테니, 교인들이 보기에 경건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속사람이 전혀 새로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옛 본성에 따라 기도하고, 그저 타로나 점술을 대체하여 기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과연 믿음일까 하는 생각과, 나의 기도는 정말 다를까를 생각해보았다. 과연 그 기도의 대상만 다른 것일까?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가 내게 없으면,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없다면, 나의 기도가 세속의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생각하기보다 기도하며, 나의 필요를 구할 뿐만 아니라 매일 충만케 하시는 성령님조차 구할 것이다. 나의 속사람이 성령님의 생각으로 충만해지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이루는 나의 기도가 나의 호흡과 같아지기를 말이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