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3장> 영적인 가면에 대해서
얼마전 극장에 갔다가 어느 캐피탈 업체의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하는 CM송을 들으며, 나중에 채무를 갚지 못해도 “행복하세요” 해주실 수 있을까 싶어 아내와 살짝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대출이란 것이 때로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 숨 돌릴만한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훗날 막대한 청구서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집에 빨간 딱지가 붙어봤기에 잘 안다.
갑자기 CM송이 생각난 이유는 요즘 말씀을 묵상할 때에 스스로에게 현실 문제에서 벗어난 기쁨과 평안을 강요하는 나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현실의 고통을 아파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나의 신앙의 미성숙함 때문인 듯 나를 질책하고,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눈을 돌리기를 강요하며,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한다.
최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 투병 중이신 어머니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아버지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천국 소망을 말하며 상실의 아픔과 슬픔의 감정을 억눌렀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소망은 지금도 유효하고 뚜렷하지만, 그때 억눌렸던 감정이 지금에 와서 살짝 건드려질 때면 슬픔이 폭발하기도 한다.
성도의 기쁨과 평안은 실존을 등진 채 자기 암시 중에 나올 수 없다. 심장을 타격하는 드럼과 베이스 연주와 은혜로운 찬양 가사가 내가 이미 기쁨 가득한 사람인 양 느끼게 해준다고 해도, 혹은 기쁨과 평안의 말씀과 교리를 지식으로 배운다고 해도, 또는 스스로 '행복해져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해도, 참기쁨은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만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님의 조명 가운데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직시하는데서 믿음이 나온다. 현실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에게나 다른 누군가에게 영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한다고 해서 평안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파산신고를 하여 빚을 탕감받을 때조차, 나의 부채 목록을 법원에 소상히 제출해야 한다. 하나님이 값없는 은혜로써 성도의 죄를 탕감해주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죄와 연약함과 현재의 감정들도 모두 주께 소상히 아뢰는 것이 옳다.
나의 문제 혹은 가족과 이웃의 현실 문제를 무시하고 도외시한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주께 아뢰어서 주 안에서 다루어지지 못하고 내 안에 꽁꽁 싸매어진 감정과 현실의 문제들은 영적인 돌려막기 끝에 막대한 청구서로 돌아와 우리를 실족하게 할지 모르며, 끝내 우리의 파산한 영혼이 건져냄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회심의 열매와 성도의 품위는 중생이니, 성화니, 견인이니 하는 고상한 말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에 대한 태도와 행실에서 나온다. 사랑을 상상해내기보다, 사랑을 행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경건과 거룩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전히 나는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며 욕심으로 가득하여,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가 서툴고 삐그덕대니, 영적인 이야기나 늘어놓으며, 나와 일상에서 부딪치고 충돌하는 이들을 영적으로 정죄하고 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현실 문제에서 도망쳐 버린다.
현실 문제에서 눈 돌리다보니 우리의 부모님이나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교정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그들의 현실에 눈감는 사이에 그들은 타자화된 가상의 인물이 되어, 부득이 그들의 현실의 얼굴을 마주하며 살을 부대낄 일이 있으면, 그 불편한 상황 때문에 쉽게 짜증과 화가 올라온다.
우리의 영성은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어야 한다. 성령은 사랑으로 일하시며 구원은 사랑으로 증명되고, 우리의 현실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하루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나를 낮아지게 하고 소망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룩한 삶과 성화를 이루어가게 할 것이고, 그 모든 과정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할 것이다. 내가 하루중에 만난 것이 고난한 일상이나 불편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실제의 하루를 무시한 채로는 영적 성장도, 구원의 증거도 확인할 수 없으며, 그 믿음에는 뿌리가 없어 작은 유혹과 고난에도 쉽게 무너질 것이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