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2장> 교회에 대하여

 

사실은, 교회는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며 불편하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항상 그럴 것이다. 설교는 세상의 세련된 가치와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하니 답답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고, 거듭난 사람들의 새로워진 생활 방식은 나의 옛 본성과는 전혀 달라서 때때로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런 교회가 편해지려면, 불편하게 하는 ‘말씀’과 ‘경건한 생활’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으면 된다. '믿음'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기보다 적당한 종교활동에 머무르고, 적당한 직분을 얻고 그럴듯한 믿음의 외형을 갖게 된다면, 교인들의 칭찬과 은근한 우쭐함 가운데서 어느 정도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들 세상의 그런 방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아닌가.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잘 화내거나 나를 비난하지 않고 격려하며 내게 미소를 보이니, 내 종교 활동은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교인이 되기보다 성도가 되길 원한다. 시한부 아버지의 병상에서 그렇게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눈물 흘렸던 '성도'라는 호칭으로 주님께 불려지고 싶다. 주님의 값없는 은혜로 영원한 새 생명을 얻어 주님의 거룩과 사랑을 닮아가는, 그런 구별된 성도 말이다.  

아마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교회에 출석하셨더라면, 많은 실망감에 맞딱뜨렸을지도 모른다.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 보이지도 않는 믿음 하나 붙들고서 죄와 악마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전쟁터에서, 혹은 죄의 유혹과 세상의 풍조와 쉽게 타협해버리는 세상의 또다른 축소판 속에서, 아버지가 기대하셨던 천국의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느껴야 할 실망감은 목회자나 다른 교인들에 대한 실망감이 아니다. 또는 내가 기대했던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새벽기도와 금요기도회에서도 얻지 못한데서 오는 실망감도 아니다. 내가 느껴야 할 실망감은 내가 교회에 출석한 후에도, 혹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분투해야하는 나의 옛 본성과 연약함에 대한 혐오와 슬픔이어야 한다. 교회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발견되는 우리의 죄성에 대해 슬퍼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패함과 연약함을 압도하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하여 또다시 소망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다. 아마 교회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한 의'라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하고, 우리가 얻은 구원이 완전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누리는 은혜가 충만하다. 나는 여전히 죄의 유혹 가운데 있지만, 죄를 혐오하는 중에 날마다 죄를 죽이며 거룩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가 누리게 될 거룩한 천국의 모형이다.      

성령님의 조명 가운데서 느끼는 나에 대한 실망감과 무력감은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사모함으로 변할 것이고, 구원의 현장인 교회에 대한 사모함으로 변할 것이다. 교회를 오해하도록 하기 위한 악마의 갖은 술수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능력 있는 팔로써 나를 굳게 잡은 것이라, 나는 앞으로도 교회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연약하나 우리가 사모하며 이루어가는 교회는 영원에 뿌리를 박고 모든 시공간에 걸쳐 뻗어나가는 교회, 기치를 높이 올린 군대처럼 우리의 대적이 두려워하는 그런 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