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장> 이성과 실제의 삶에 대하여

 

이성의 끝에서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겠지만, 이성의 끝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여 성령님의 활동으로 내가 겸비케 되었을 때, 비로소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이 자라날 것이다. 더욱이 믿음의 눈을 갖게 되어 지성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휘장 뒤에 감추어졌던 진리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는 이성과 논증이 진리의 대척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 진리를 풍성하게 하는데 활발히 사용되어질 것이다. 

유물론을 탐구하든, 유신론을 탐구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거듭나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는 것이고, 창조 세계의 원천이며 모든 지식과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 다른 지식을 쌓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 그 감각 위에 우리의 일상을 쌓는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중 어느 하나 신뢰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십자가에서의 대신 죽으심과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 새롭게 된 지성과 감정과 의지만이 우리의 논증과 사색과 일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이다. 

무소부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가운데 실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펼쳐놓으시고 수놓으신 창조 세계를 통하여도 어디에나 실재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1:20) 내가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어서, 사단이 충동하는 내 몸의 악한 생각들을 쳐내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사유하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거리의 꽃들과 하늘의 해와 구름은 물론, 인류가 쌓아올린 문화와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나는 지금 지하철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있지만, 목적지에 이르거나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면 읽던 책을 덮고 까맣게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것이 악마의 전략이라고 해도 내가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이 세상을 임의로 등지고서 눈감고 귀닫은 채 수도원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깨어있음의 표지는 종교 활동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서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1절 이하에서 똑같이 밭을 매고 맷돌을 갈던 이들 중에, 누군가는 하나님께 데려가졌고 누군가는 버려짐을 당했다. 하나님께 데려가진 여인은 밭을 매든지 맷돌을 갈든지, 항상 깨어있어서 주를 기다리는 가운데 주를 위해 일하였고, 그 마음이 주를 향해 있었다. 여인이 특별한 장소가 아닌 밭에서 하나님께 데려가졌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발견되어질 것이다.  

이처럼, 스크루테이프가 말한 소위 '실제의 삶'도 내게 소중하다. 그러나 그 삶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야 소중하다. 그 소중한 '실제의 삶'이 의미를 발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소중한 일상마저도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실제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발견해냈으면 한다. 스크루테이프와 웜우드가 저렇게까지 애쓴다면 나 역시 말씀과 성령님께 의지하여 늘 깨어있는 수 밖에 없다. 

 

(영상 형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