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혹은 가능성?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보는 것이

불신의 눈으로 위험을 보는 것보다 낫습니다.

 

 

 

위험한 분열

 

 

현실과 이상의 점진적으로 커지는 분열은

정신의 분열을 가지고 올 수가 있습니다.

 

(10여 년에 걸쳐 불안증, 우울증, 조울증, 공항장애, 거식증, 실어증, 불면증, 기억상실증, 몽유병, 다중인격 증후군, 그리고 정신분열증(조현병)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여러 정신질환을 앓았던 백현민 목사님의 "정신질환 치유와 예수 그리스도"란 책를 읽으면서)

 

 

위험한 열정

 

 

열정(zeal)은 귀하다.

그러나 잘못된 확신에 근거한 삐뚤어진 열정은 참 위험하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 삐뜰어진 열정으로 섬기는 자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된

자기 뜻을 이루고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인데... 

위험한 확신

 

 

확신을 갖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추측이나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확신은 위험합니다.

 

 

위험합니다.

 

 

성품의 변화가 없이

열심이 교회를 섬기는 자를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섬김의 자세가 겸손하지 못한 사람을

교회 일꾼을 세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을

교회 직분자로 세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유익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 자신에게 유익되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되게 해야 합니다.

유익한 고민이 돼야 할텐데 …

 

 

나 자신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고민할 때에

우리의 초점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 돼야 합니다.

그 주님을 신뢰케 하는

유익한 고민이 돼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소식을 듣고 ...

 

 

목회자의 이성과

목자의 마음을 균형있게 ...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잠드셨다는 소식을 접한 후)

 

 

율법적인 신앙이 아닌가 …?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은

율법적인 신앙 (? ) 이 아닌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함은 ...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함은

아무리 순수하다 할찌라도

어쩌면 지혜롭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

 

 

은혜와 책임

 

 

'하나님의 은혜로'가

우리의 책임을 무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를 믿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문에서 불의까지?

 

 

의문하다 보면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다 보면 불신하게 됩니다.

그 불신은 불순종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불의를 행하게 만듭니다.

의심의 원인

 

 

내 마음에 의심이 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보이지 않는 미래 보다

내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내 삶의 현실을

내가 지금 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심을 돌이켜 믿음에 견고히 서 있기 위해서는

나는 내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내 삶의 현실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신

진실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의심이 아닌 의지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두 마디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아내를 생각할 때,

자녀를 생각할 때,

가족을 생각할 때,

이 두 마디를 왜 하는지 조금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땅에서 아니면 하늘에서?

 

 

만일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주는 상급을 받아 누리기를 사모하며 또한 받아 즐기고 있다면, 하늘에서의 우리의 상급은 초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우리가 하늘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상 주심을 사모하며 또한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받는 욕이나 비방이나 수모나 박해 등을

은혜와 영광으로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보기보다 ...

 

 

이 세상에는 보기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너무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

마음에 무거움과 괴로움과 슬픔이 없이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죄를 자백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나 같은 연약한 죄인을 위해서 기도케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형제, 자매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기적인 것보다 희생적인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믿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이기적인 것 보다

희생적인 것이 낫습니다.

 

(Iain M. Duguid의 " Esther & Ruth"란 책에 나오는 보아스와 룻이란 인물을 생각하면서)

 

 

이기적인 나

 

 

내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인 줄 몰랐다...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정도로 익숙해져 있는 줄 몰랐다.

새벽기도회 때 주신 성령 하나님의 이 작은 깨달음 속에서 나는 특히 두 분이 많이 생각났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후 한 분에게는 이 메일로 용서를 구하였고

또 다른 한 분에게는 구두로 용서를 구하여 용서를 받았다.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는 나 자신과의 싸움...

충분히 낙심케 될 수 있겠지만 용서를 받았을 때 다시 내 영혼이 소성케 됨을 경험한다.

이러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 크고자 하는 야망을 버리고 싶습니다.

상대방을 크게 하고자 나는 작아지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비우고 싶습니다.

상대방을 높이고자 나는 낮아지고 싶습니다.

 

 

이러한 거절 행위는 성경적입니다.

 

 

영적 공통성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함께 하자고 할 때에

결단성 있는 거절 행위는 성경적입니다.

 

(참고: 박윤선 박사님의 에스라 4장 1-3절 주석 해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난다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텐데 ...

 

 

이러한 교회가 싫은 이유는?

 

 

기업화 된 교회는 싫습니다 ...?

이러한 교회이면 좋겠습니다.

 

 

시대에 뒷떨어져서 인기가 없고, 작다 할지라도,

견고하고 일관성이 있는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이면 좋겠습니다.

 

("THE PATTERN OF SOUND DOCTRINE"이란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만남을 가지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중요시 하는 것이 다르다.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꼭 중요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이다.

 

이것을 함께 중요시 하는 소수의 지체들을 만나

주님 안에서 함께 말씀과 기도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만남이 좋습니다.

 

 

웃음이 꽃피는 만남이 좋습니다.

옛 추억을 되살리면서 함께 크게 웃는

엔돌핀 도는 만남이 좋습니다. 하하

이러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 완전히 몰입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 자신을 굴복시키길 원합니다.

저는 성경을 제 안에서 재창조해서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먼저 성경을 소화시키길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면화한 성경을 살면서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이러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목회를 힘들어 하는 목사가 되기 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을 제일 힘들어 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목사님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을 비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사님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십시다.

 

 

쫓기는 삶에서 쫓는 삶이 되길 ...

이러한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무익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과 소망보다

우리의 신앙에 유익한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이 좋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내 자신도 바라보지 마십시다.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시편 123:1).

우리의 소망과 구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런 친구가 좋습니다.

 

 

이런 친구가 좋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나누는 친구,

곁에 있으면 소외감을 느끼거나 무시당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지지 않는 친구,

나의 최선을 모습을 끌어내고 나를 채워 주는 친구 ...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이렇게 살고 싶다.

 

 

가슴의 열정과

머리의 냉정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살고 싶다.

 

 

이미 그 시험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하나님

 

 

저에게 시험 문제를 내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음을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 시험 문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않하는지를

아시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민 목회

 

 

이민 목회,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사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인내하며 견뎌야 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전하며 정직해야 함 또한 배우고 있습니다.

 

새해 2013년에는 더욱더 내 뜻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을 더욱더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려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옵소서.

이별이란 …

 

 

사랑하는 가족 식구과의 이별은

더 사랑하는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다.

 

이상을 일상으로

 

주님, 저에게 성경적인 이상을 가지고

성경적인 일상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오늘 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그 방송 프로그램 담당자와

손님인 한의사 분하고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든 생각/기도제목).

 

 

이상합니다.

 

 

자신의 궁핍함을 잘 보면서 다른 사람의 궁핍함을 잘 못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너무 잘 보고 있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은 잘 못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이상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항상 "예"만 해야 하는데(고후1:19) 많은 때에 "아니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에게 "아니오"해야 할 때도 많은데

그 때에 우리는 "아니오"라 말하지 못하고 "예"하고 있습니다.

"예"해야 할 주님께는 "예" 하지 않고

오히려 "아니오"할 이웃에게 "예"하고 있으니 이상합니다.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하나님의 뜻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기도 응답(말씀, 뜻)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될 때가 참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성과 명철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말씀(뜻)을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뜻)에 불순종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말씀, 뜻)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뜻)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그 말씀(뜻)에 끝까지 순종하지도 못합니다.

 

 

이성적인 배우자는 …

 

 

이성적인 배우자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는 듯 하다?

 

 

이야기 나눔

 

 

성도의 교제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그 나눔이란 바로 우리 각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에는 주님이 누구이신가 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가 포함되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이웃 사랑에 관하여 ...

 

 

이웃 사랑에 관하여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셨을 때

이런 저런 핑계대면서 미루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

 

 

 

이해 받는다는 것

 

 

이해를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특히 마음을 이해해 줄 때 위안이 됩니다.

 

 

 

이해 오해

 

 

이해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나요?

 

 

 

 

이해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주님의 뜻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될지라도 …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면

왜 내가 그리 어리석게 행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염려하지 않고

주권자 하나님께 다 맡기므로

과거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신 뜻이

내 삶 속에 이뤄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이해가 안됩니다.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많은 세상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볼 때에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된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느 누구보다 그 지체를 사랑하고

또한 그 지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제일 잘 알고 계시기에 ...

 

 

 

 

이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해를 기대하기 보다

오해 살 일을 하지 말아야 할텐데 ...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오해를 받기 보다 이해를 받고 싶지만

실상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이해와 동의는 별개일 수도

 

 

이해는 좀 되지만

동의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와 인정?

 

 

이해는 하지만

꼭 인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해의 틀

 

 

대화할 때

상대방의 이해의 틀(frame of understanding)에

알아듣게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말이 들리지 않을 듯 ...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힘쎈(?) 한 사람이 힘이 없는(?) 또 다른 사람을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학부형이

한 형제, 자매인 동역자나, 교역자를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게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

 

 

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내 머리로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므로

그 상태나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지 말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이 모든 상황을 통하여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주님 안에서 감사하며 즐기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이해할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있는 사랑하는 친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 Tobey 형제의 아버지를 만난 후)

 

 

익숙하지 않은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접했을 때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익숙한 관점으로 그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본능조차도 좀 뛰어넘어서 우리가 익숙하지 않는 관점으로도

그 문제를 보고자 노력핲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접한 문제의 해결점을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하여 다가가므로좀 더 나은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익숙한 것

 

 

익숙한 것이 꼭 편안한 것이 아닐 수도 ...

 

 

익숙함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는 것도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익숙함

 

 

익숙함이 귀함을

앗아가는 것 같습니다.

 

 

익숙해지면 안되는 건데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다른 사람이 해주니깐

이제 내가 뭐하러 그 일을 해야하냐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 ㅠ

인간관계를 포기한 세대에

 

 

어제 한국 뉴스를 보다가 생각케 만든 점이 있었다.

 

전에 들어 알고 있었던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와

"오포세대"(출산, 결혼, 연애를 포기한 삼포에 인간관계와 집을 추가로 포기한 세대),

그런데 어제 뉴스에는 "칠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에 내집마련과 인간관계를 추가한 오포세대에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세대)가 되었다고 한다.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세대를 맞이하였다니 ...

 

나는 이 뉴스를 접하면서 "오포세대"에

"인간관계"를 포기하였다는 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 그래서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넷 사역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가운데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한국 청년들의 상황과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싶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세대에

그러면 그럴 수록

나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교제를

추가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세대에

어쩌면 주님 안에서 참된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더욱더 간절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보다 오해, 위로보다 상처를 받을 수 입을 확률도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의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뜻하시는 바이고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미?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

 

 

인간적인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

 

 

인간적인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절망의 끝에서 절박감에 쫓길 때

마지막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크로포드 로리츠의 "세 가지 만남"이란 글을 읽으면서)

 

 

인생의 난관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큰 난관을 통해

우리의 죄의 종노릇하던 삶을 청산하고

그 큰 난관에서 건짐을 받아

주님의 종의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인색함

 

 

어머니의 사랑은 인색하지 않는데 ... 

인정하고 사과하면 되는 것을

 

 

자신의 잘못을 사랑하는 식구에게

인정하고 자백하며 사과를 하면 되는데

왜 그리도 합리하면서

다른 식구를 원망하면서까지

자기 방어하기가 바쁜 것인지 원 ... ㅠㅠ

 

 

인정하기가 그리도 힘든 것일까?

 

 

진정으로 나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면

나는 사람 앞에서도 뉘우치는 마음으로

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텐대 ... ㅠ

 

 

일관된 좋은 습관에 이것만 더 있다면?

 

 

일관된 습관(consistent habit)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으나

그 일관된 좋은 습관에

유연성(flexibility)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일의 마침?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또한 마치시는데

일의 시작이 창대할 때에는

내가 마치고 싶지 않을 수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이 창대해졌을 때

멈추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대케 하신 일을 멈추시려고 할 때

더 나은 창대한 일을 계획하시고 계신지도 모르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잃어버려서라도 얻어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에야

고통 중에서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림의 큰 가치

 

 

물질의 풍부함은

우리로 하여금 자금자족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물질을 다 잃어버려 궁핍해져서라도

우리가 주님 한분 만으로 자족하며 주님만을 의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잃어버림을 가치있게 여겨야 합니다.

잊지 못하는 사랑, 기억나지 않는 사랑

 

 

받은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사랑을 준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주님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잊지 못하지만 ...

 

 

내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때에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나에게 베푼 자는

자신이 그 사랑을 베푼 기억을 못한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