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고 말했지만

나는 "나는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believe, therefore I am)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사도 바울처럼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I believed; therefore I have spoken)고 말하고 싶다(고후4:13).  

 

 

믿음과 순종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고

순종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 겸손한 종이 되길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라 할찌라도

그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높임을 받는 겸손한 종이 되길 원합니다.

 

 

믿음이란 …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Wayne Stiles, "WAITING on GOD"을 읽으면서)

바람피는 배우자를 사랑하므로 ...

 

 

바람피는 남편(아내)를 사랑하므로

영적 음행을 범하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넓게 깨달아야 합니다(참고: 호 3:1).

 

 

 

 

“바른 교훈”을 잘 배우지 못하면 …

 

 

"묵묵히"란 단어가 생각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주신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야 겠다는 생각,

그 보다 더 주님께서 나 같이 불성실한 자에게도 주신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신실하게 성취해 나아가실지를 "묵묵히" 주목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창24:21).

 

 

 

 

바른 자세로

 

 

삐뚤어진 자세로 거울을 보지 말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른 자세로 성경을 대하므로 나 자신을 바로 알아가고 싶습니다.

 

( 운동 중에 거울을 쳐다 보다가 든 생각)

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태로운 상황을 접할 때

"나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

 

 

성도님 한분 한분을 세우기보다

자기 자신만을 세우려고 하는 목사는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이다.

 

 

 

바리새인처럼 겉으로는 …

 

 

지금도 교회 안에서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자도자)라 할찌라도

그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자기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는 바리새인처럼 겉으로는 매우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일찌라도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므로

탐욕 속에서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지원이

 

 

또 미련하게 행했다.

그 때 찾아갔어야 했는데 나는 또 미뤘다.

그 결과 이젠 그 친구를 이 세상에선 더 이상 볼 수가 없게되었다. 

바보 같은 지원이.

 

 

 

바쁘고 분주한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도 …

 

 

바쁘고 분주한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지체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

그/녀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눈물을 보고

성령님의 위로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강팎해 져서

우리는 더욱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 발자국만이라도 ...

 

 

그 위기 상황에서

반 발자국만이라도 뒤로 물러서서

그 상황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기가

무척이나 힘든 것 같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것이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분명히 믿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다 끊어 버려야 한다.

만일 내가 그것들을 끊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믿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받는 사랑을 남용하지 마십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귀한 사랑을 겸손히 받되 그 받는 사랑을 남용해서는 아니됩니다 ...

 

 

 

배려가 부족합니다.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가 있군요.

그 상대방 지체가 원하는 것은 기도만 ...

상대방을 배려하는게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배우기를 속히 해야 한다.

 

 

나는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기 보다 나 자신을 가르치기를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남을 가르치기를 속히하기 보다 배우기를 속히해야 한다.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 배우기를 즐기고 싶습니다.

배우는 즐거움이 더욱더 커지길 기원합니다.

 

 

배우는 즐거움이 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즐거움 보다 배우는 즐거움이 있어야 ...

 

 

 

배우자

 

 

배우자는 최고의 위로자도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최고의 낙심케 하는 자도 될 수 있습니다.

 

 

 

버리고 또 버려야!

 

 

무의미한 형식주의를

버리고 또 버려야 ...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읽으면서)

버리고 추구해야 할 것

 

 

무의미(meaningless)한 것(일)을 버리고

의미(meaningful)있는 것(일)을 추구해야 할텐데 ...

 

 

 

버림 받았다는 느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느낌)이 든다는 것,

매우 고통스럽고 마음에 큰 아픔과 상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에는

더 큰 충격과 아픔이 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느낌)이 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버림받았다는 느낌?

 

극심한 고통과 죽음 앞에서 격는 어두운 순간,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은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외면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지 들 수 있는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두운 순간을 죽기 전에 허락하신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하시고자 그 어두운 순간을 격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대학 동문 자매의 장례식에 그녀의 마지막 순간의 관한 이야기를

장례 예배 때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번성케 하심으로 고난을 잊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수고한 일을 번성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에브라임의 역사)

우리의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도 하십니다

(므낫세의 역사).

 

 

 

범사에 감사

 

 

우리가 보기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 때문이다.

 

 

 

변명과 노력

 

 

나의 변명이

나의 노력을 등한히 하게 만들도록 하면 아니 될텐데 ... ㅠ

 

변질 되기 좋은 자리?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자리는

변질되기 쉬운(좋은?) 자리인 듯 ...

 

 

 

 

 

변질되지 말아야 할텐데 …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데

그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변하는 시대에 적용함에 있어서

우리 사람들이 변질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변질의 위기, 변화의 기회

 

 

우리는 변질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위기를 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변질하는 사랑이 아닌 변화하는 사랑으로

 

 

신랑과 신부가

하나님께 결혼 예배를 드리면서

증인이신 하나님과 하객들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그러면 부부는 서약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부부의 사랑이 변질되어 가므로 말미암아

그 서약에 불충하고 있습니다.

결혼할 당시에는 서로가 그리고 크게(뜨겁게) 사랑하더니

이제는 그 사랑이 점점 작아지고(식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부부가 주님 중심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중심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의 사랑을 점진적으로 더욱더 체엄하고 깨달아 알아

자연스럽게 그 주님의 사랑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지나갈 수록 그 부부는 점진적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가므로

더욱더 풍성해 지는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둘중에 하나입니다.

부부가 주님의 신실한 언약적 사랑을 경험하므로

그 사랑으로 서로에게 서약한데로 사랑하든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사랑) 아니면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모르고 머리로만 알고 있던지

또는 모르므로 세상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결국에 가서는 변질되던지(점진적으로 변질하는 사랑)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점진적으로 변질하는 사랑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길 기원합니다.

변화

 

 

많이 많이 힘들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change)를 추구하는

사랑하는 딸을 볼 때

이 아버지의 마음은

감사하고 감사하단다.

 

(사랑하는 딸과 단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변화시킬 것 같은 사람보다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변화시킬 것 같은 사람보다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눈에 잘 뛰지 않는

한 평신도 형제의 마음에

변화를 이루시고 계시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기 보다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교회의 한 지도자를 바라보며

뭔가를 그에게 기대할 정도로

그를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ㅠ

별개인 신앙과 삶

 

 

왜 우리는 신앙과 삶이 별개인 것인가?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노라 말하면서

우리의 믿음 생활은

주님-중심이 아니라

나-중심인가?

 

 

 

보기엔 작은 일인 것 같아도 …

 

 

보기엔 작은 일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크게 역사하시사

그 작아 보이는 일을 통하여서라도

우리를 향하신 큰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고 계십니다.

 

 

 

 

보상심리를 경계해야 …

 

 

주중에 세상과 짝지어 살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

죄책감을 가지고 주일 교회에 올라와서

더 열심히 예배 드리고, 더 많이 헌금하며, 더 열심히 봉사하므로

스스로 마음의 죄책감을 좀 무마하려는 보상심리를 우리는 경계해야 ... 

보이는게 전부가 아닙니다.

 

 

보여주는게 다가 아닙니다.

보이는게 다가 아닐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부르셔서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을 주시고

주님의 몸된 승리 장로교회(주로 어르신들)를 섬기게 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인터넷 사역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대부분 젊은이들)를 섬기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은 더 가까와 집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겠지만 주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들은

사랑하는 우리 교회 식구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더 가까와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멀리 있는 교회 식구들을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며(빌1:8)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그들을 더욱더 걱정할 것입니다(2:26).

본 받고 싶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믿음을

본 받고 싶습니다.

 

 

본론에 충실하자

 

 

인생의 논문의 결론이 잘 쓰여지기 위해서 본론에 충실하자.

그리고 본론에 충실하기 위해서 내 인생의 논문의 결론을 잊지말자.

 

 

 

본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실패를 통해서 배운 점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충고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실패하지 않고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본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배울점이 훨씬 더 많습니다.

 

 

본질 변질 변화?

 

 

본질에 충실하면 변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변화의 삶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가 ..

부모님 다툼에 자녀들의 반응?

 

 

딸은 엄마를 이해하는데

아들은 아버지 편만 드니 ... ㅠㅠ

 

 

부모님께 감사합시다.

 

 

육신의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합시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사랑?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서

부모님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사랑하며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데 ... ㅠ

 

 

부모님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사랑하는 어머님(아버님)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자녀들이 더욱더 화목하고

또한 형제 우애가 더욱더 두터워져야 합니다.

부모로서의 기쁨

 

 

부모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기쁨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기에

하나님께 감사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자녀들에 대하여 대화를 한 후)

 

 

 

 

부부 갈등 속에서의 분노

 

 

부부 갈등 및 다툼 속에서

보편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죄악의 분노(sinful anger)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

(1) 분노를 표명(ventilate) 하든지, 아니면

(2) 분노를 속으로 삼키든지(내면화하든지)(internalize) 합니다.

 

분노를 표명하는 것은

대화를 잘못 전달 하는 것(miscommunication)이요

분노를 속으로 삼키는 것은

대화를 안하는 것(not communicating)입니다.

 

(Lou Priolo의 "Resolving Conflict"이란 책을 읽으면서)

 

 

 

 

 

 

부부 갈등의 윈인

 

 

부부 갈등을 통해

배워가는 것 중 하나는

갈등의 원인이 아내에게 있다기 보다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부부 갈등의 유익

 

 

부부 갈등을 통해

배워가는 것 중 하나는

어떻게 서로의 다른점 하나 하나를

보완(complementary)해서

윈-윈(win-win)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부부 갈등의 유익한 점은 ...

 

 

부부 갈등의 유익한 점은 …

 

  1. 서로의 다른점을 들춰내 줍니다.
  2. 서로의 단점들을 잘 보게 됩니다.
  3. 서로의 죄성을 들춰내 줍니다.
  4. 서로의 자라난 배경까지 알아 갈 수가 있습니다.
  5. 서로의 습관이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을 알 수가 있습니다.
  6.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됩니다.
  7. 서로에게 무슨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부부 갈등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선 ...

 

  1.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서로의 단점들을 보는 가운데서 서로의 장점을 의지적으로 더 열심히 보고 감사하며 칭찬하는 가운데 서로의 단점들을 서로 보완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3. 서로의 죄성을 보면서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부부가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4. 서로의 자라난 배경을 알아가면서 서로의 부모님에 대해서 알아가므로 부부가 양가 부모님의 사돈 관계에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5. 서로의 습관이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을 알아갈 때에 서로가 고치려고 하던지 비난하지 말고 성경 말씀에 근거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여 믿음으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6.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내려놓으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므로 서로의 필요성을 채워주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7.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 성령님의 열매인 절제를 사모하면서 무슨 말과 행동을 하려고 애쓰기보다 무슨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부지런히 그리고 겸손히 배워가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부부 관계가 그리도 중요한데 …

 

 

부부 관계가 좋지 않은데

다른 관계가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부부 관계를 지켜내야 합니다!

 

 

자녀로 인해 부부가 충분히 다툴 수 있듯이

(양가) 부모님으로 인해서도 부부가 충분히 다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다툼 속에서도

남편과 아내는 부부 관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

 

 

부부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을 알면서도

부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몰라

계속 다투고 싸우면

부부 각자 마음에 쌓이는

상처와 아픔과 실망과 분노 등으로 말미암아

결국에 가서는 별거하다가

이혼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불만족이 쌓이다 보면 …

 

 

부부 관계에서 불만족이 쌓이다 보면

관심이 배우자에게서 서서히 떠나

내 불만족을 채워주는 것 같은

함께 직장에서 시간을 오래보내는

다른 이성에게 점점 더 쏠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부부 대화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

 

 

마음 문을 열고

부부가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나누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부부가 감정적으로 연결(emotional connection)이 계속 안될 때

 

 

이혼하기까지 합니다.

왜 감정적으로 연결이 안되는 것일까 생각해 볼 때

주로 아내가 필요한 감정적 욕구를

그녀의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에게서 감정적 욕구가 채워져야 함.)

어떻게 부부가 서로의 감정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엔 서로의 마음 문을 열고

 

서로의 감정을 진솔하게 나누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우리 남자들이). 

그리고 부부는 서로의 진솔한 감정 이야기를 감정의 관점에서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 남자들은 논리적 관점으로 아내의 감정 이야기를 듣는 것을 미뤄야 함).

잘 듣되 우리는 서로의 말을 경청하여

상대방 배우자가 내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정도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논리적(객관적/성경적)인 관점에서 지혜롭게 대화를 해야 합니다.

 

 

 

 

부부는 …

 

 

부부는 상호 보완적(complementary)이지 결코 경쟁 상대(competition)가 아니다.

 

 

 

 

부부란 ...

 

 

부부란

주님을 따라

함께 좁은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당하면서

함께 울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서져야 할 자신감?

 

 

성적인 죄를 범하기 쉬운 상황인 줄 알면서

그 상황을 피하기 보다 그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철저히 부서져야할 교만한 자신감입니다.

 

 

부실공사

 

 

부실공사...  욕심에 눈이 멀어서인가 ...

기초를 든든히 했어야 하는데...  주저 앉을 정도로 해 놓은 것을 보니...

 

목회에도 적용을 해 보았다.

영적 부실공사...  우리 목회자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서...

양떼들의 신앙 기초가 든든하게 세우지 못하므로

영적 지진으로 인하여 주저 앉을 정도로 해 놓은 것은 아닌지...

분노

 

 

부부 관계에서

의로운 분노(righteous anger)는

건강한 변화(healthy change)를 가지고 오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분노(unrighteous anger)는

서로의 언행으로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부부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Gary & Greg Smalley, "THE HEART OF REMARRIAGE"를 읽으면서)

 

 

 

 

분명 (clear)  vs.  혼동 (confusion)

 

 

성령님의 역사는 분명하지만

마귀의 역사는 혼동입니다.

 

 

 

 

불문명 혹은 분명?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분명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그 말씀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십니다.

불쌍이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비주류의 사람들 또는 소외된 지체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비주류의 사람들 또는 소외된 지체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예수님처럼 상대방을 바라볼 때

그/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면 되는데 ...

 

 

 

불안 없이 사는 법?

 

 

우리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신실하게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이 세상에서 불안 없이 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불안해 하지 않나요?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이웃에게 잘못을 한 후

조금이라도 불안해(nervous) 해야 하는데 ...

 

 

 

 

불안해 해야 하지 않나요?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이웃에게 잘못을 한 후

조금이라도 불안해(nervous) 해야 하는데 ...

 

 

불쾌한 그 십자가

 

주 달려 죽으신 그 십자가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 십자가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갈5:11).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불필요한 논쟁보다 유익한 논리를?

 

 

불필요하고 유익하지 못한 논쟁은 하지 않는게 좋겠지만

서로에게 유익되고 우리의 성경화되어가고 있는 지성을

유익하게 자극할 수 있는논리를 피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리를 필 때에

물론 상황적인 관점이나 개인적인 관점으로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두 관점들이 성경적인 관점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성경 말씀을 더욱더 열심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딤후 3:14).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논리를 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성경적인 지식을 사용하는데 점진적으로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함 가운데서 성경적인 논리를 피는데 훈련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불만족 속에서 불평합니다.

그리고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고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며 살고있습니다.

 

 

붙잡을 면목이 없습니다.

 

 

더 이상 안주하기 싫어

그 울타리를 떠나고자 하는 자를 어떻게 붙잡겠습니까

 

 

 

“브니엘의 아침” 설교를 듣고 나서 …

 

 

김경원 목사님의 "브니엘의 아침" 설교를 듣고 나서 받는 교훈들:

 

  1. 승리장로교회는 기도의 장소가 되야 한다는 것
  2. 승리장로교회는 변화의 장소가 되야 한다는 것
  3. 먼저 "야곱"(간사한 자)과 같은 내가 변화를 받으므로 "에서"와 같은 형제도 변화를 받아야 함.
  4. 승리장로교회는 축복의 장소가 되야 한다는 것
  5. 기도 응답을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공동체가 되야 함.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승리공동체로 세움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비건설적인 비판이라 할찌라도

 

 

나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비건설적인 비판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내 마음을 세우는 기회로 삼자.

그리고 나를 비판한 형제를 세우는데 힘을 쓰자.

 

 

 

 

비교의식으로 느끼는 행복감 혹은 불행감?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면

불행한 것이고,

내가 이 사람보다는 나으면

행복한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가

행복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신 33:29).

그러므로

나는 행복한 자이다.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부러워하지 말아야, 감사해야 합니다.

 

 

 

어릴 때 자라나면서

부모님이 우리를 다른 애들과 비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는데,

이젠 우리가 장성하여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을

우리 친구의 부모님과 비교하면서

'왜 엄마/아빠는 내 친구의 부모님처럼

나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나요?'라고 말한다면 ...

 

 

 

 

비난.비방하지 마십시다.

 

 

비관적 속에서

비난하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

 

 

 

 

비복음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기에

그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점점 줄어들 수 밖에 ...

비오는 이 아침에 ...

 

 

밖에 비가 오듯이

내 마음에도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과

헌신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길 ...

 

 

 

비전인가 야망인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인가 아니면 나의 야망인가?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 할지라도

나의 욕심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더 이상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 나의 야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성취하고자

지금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안에 욕심을 보고

사랑의 면책을 하는데도 우리는 듣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스스로 영적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이란 포장된 나의 야망을 추구하는데 욕심을 내고 있다.

이젠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멈추게 하실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비판에 관한 제 생각

 

 

비건설적인 비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은 듯 합니다.

 

 

 

비현실적인 기대

 

 

결혼해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