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므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고자
자신의 생각도 부인할 줄 알아야 하는데,
왜 그리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 놓치 못하고 있는가?
교만!
교만과 겸손의 차이?
교만한 자는 책망을 받았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기를 원하지만(사울 왕) 겸손한 자는 책망을 받은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춰서 즉각 회개합니다(다윗 왕).
교만과 겸손의 차이는 죄를 짓는야 안짓느냐 라기 보다
죄를 지은 후 책망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교만하다는 증거?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있을 때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능력을 상실했다든지 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춰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교만하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교만한 목사들의 교묘한 죄 덮기?
우리 목사들이 교만하면 교묘하게 자신의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죄를 사랑으로 책망한 교인에게 말도 안되는 죄를 덮어 쒸웁니다.
교만한 사람의 불만족
교만한 사람의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만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이란 인물을 생각할 때 배우는 교훈]
교인들이 이럴 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 다투면 우리 목사님들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교제의 축복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고, 속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과 나눌 수 있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누를 수 있는 교제 축복입니다.
교회 다운 교회
성장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라는 말보다 교회 다운 교회 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요즘 교회가 얼마나 교회 답지 못했으면 ... ㅠ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지도자들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지도자들은 자만심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교인들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죄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판단하고 결정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자신들이 맡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교회 안에서 나의 불평이 …
교회 안에서 우리의 불평이
다른 형제, 자매들을
충분히 낙심시킬 수가 있습니다(민14:36, 신1:28).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들을 낙심시키는 원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또한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민 14:11, 24).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한 두 사람은 ...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한 두 사람은 교인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당파를 지은 후 반대아닌 반대를 해가면서 교회에 불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분쟁 속에서 교회의 분열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적대하는 사람(들)을 좇아냅니다. 이런 죄악된 습관과 패턴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더 많은 상처 입는 사람들의 영혼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는 이유가 …?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는 이유가 교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고 힘을 얻어 자기 당파까지 만드는 직분자들이 있다면 ...?
교회 안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하고 모르면 아는 척 하지 말아야 겠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화해하며 화목하길 원하시는데
그 주님의 뜻을 어기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만족이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주는 깊은 상처와 고통?
교회 안에서, 특히 지도자들로 인해,
'나는 실패자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더 나아가서 깊은 죄책감 속에서 시달리다가
마침내 못 견디고 그 교회를 떠났을 때에도
모든 교제를 다 끊어 버림 당할 정도로 차갑게 대하므로
더 큰 실패자라는 죄책감을 부여하는 것은
충분히 한 영혼에게 평생 큰 상처와
깊은 고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난다 할지라도
우리 교회를 떠난다 할지라도
다른 교회에 가서
주님께만 더욱더 가까이 나아간다면야 ...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오래 전에 아버님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말씀이 생각나는 이 밤입니다.
그 말씀을 제 자신에게 하려고 합니다:
'목사는 항상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교인들이 우리(담임 목사)가 교회를 떠나기를 바랄 때
우리는 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우리가 떠나지 않으므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 ㅠㅠ
[우리 목사님들은 3가지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1) 설교 준비, (2) 교회를 떠날 준비, (3) 죽을 준비]
교회를 섬기는 열심도 …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열심도 절제된 열심이어야 ...
교회를 통해 돈을?
교회를 통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욕심은
버리는게 자신의 신앙에도 유익합니다.
교회에서 상처입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
교회에서 상처입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따뜻한 사랑의 한 마디
('힘들지', '이해해' 등등)인데
왜 그리도 많은 말로 가르치려고 하는지 ...
교회에서 좇아내는 사람들? ㅠ
목사님을 좇아내는 교인들,
교인들을 좇아내는 목사님,
교인을 좇아내는 교인,
이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나요? ㅠㅠ
교회와 주님을 떠난 우리 자녀들 ...
교회를 떠나고 주님을 떠난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Robert D. Jones의 "Prodigal Children: Hope and Help for Parents"를 읽으면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판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별하면 아니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역차별 당하는 것 또한 아니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 ㅠ
지혜와 분별력이 부족하여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때
구체적으로 말했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고민과 노력과 결핍
양심에 찔림이 있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적어도 같은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고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을 해야하는데 .. ㅠ
궁핍함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궁핍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며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 Wayne Stiles, "WAITING on GOD"을 읽으면서)
궁핍함의 축복?
우리는 너무 풍부함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너무나 풍부함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풍부함이란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그 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궁핍함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주권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시는 궁핍함 가운데에는 그 분의 뜻이 있을진대
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탕자에게 허락하신 궁핍함에는 하나님의 회개의 축복이 숨겨져 있었는데(눅15) ...
요셉 시대 때 풍부한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애굽에도 기근을 내리시사 궁핍케 하신 이유는 요셉으로 하여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후손들의 생명을 구원(보존)해 주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궁핍함의 축복을 누리기를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귀한 만남입니다.
서로의 고충과 아픔을
주님 안에서 함께 나누는 만남이 귀합니다.
서로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 기도를 주님께 함께 기원하는 만남이 귀합니다.
균형 잃은 신앙 생활
우리는 균형을 잃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축복만 좋아하고 "재앙"은 싫어하고 있다.
풍성함만 좋아하고 궁핍함은 싫어하고 있다.
강함만 좋아하고 연약함은 싫어하고 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하시는
"재앙"과 궁핍함과 연약함의 축복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욥 은 "재앙"을 통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깊은 영적 체험의 축복을 누렸고(욥42), 탕자는 징계의 흉년을 통하여 궁핍함 가운데 회개의 축복을 누렸으며(눅15), 시편 기자 아삽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옛적 기사들을 묵상하므로 하나님의 강하심을 의지하는 축복을 누렸는데(시77) 왜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경희 여기고 있는 것인가?
균형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섬기는 자들이 탈진의 현상을 보이는 것은
공급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일 수 있다.
반면에 교회 안에서 봉사하지 않는 자들은 주는 것보다 공급 받는 것이 더 많으므로 변화가 없이
그저 현상 유지하는 모습만 보일 수가 있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 노인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노인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겼던 노인은 참 귀합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학수 고대하는 노인은 영광스럽습니다.
그 말씀이 나에겐 적용이 안된다 할지라도 …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은 나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말씀의 원리를 배우지 않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설상 그 말씀의 원리가 나에겐 적용이 안된다 할지라도
내 주위에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기에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도
그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당을 청소하시는 분들이나 경비를 보시는 분이나
사찰 집사님이나 교회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그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진실성은 …
그 사람의 진실성은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한 말에 책임을 지고
이행하는 모습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그 사랑 고백은 주님이 먼저 들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과거의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해서
그 이성에게 '나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므로 마음의 자유을 누릴 때
그 고백은 주님께서 먼저 들으셔야 할 고백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 차이의 즐거움을 아십니까?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해야 할 때가 있지만
'당신은 도움이 필요합니까?'라고
새로 만난 사람에게도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차이의 즐거움을 아십니까?
그 형제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까?
사랑하는 형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넘쳐
빰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형제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
우리 각자만의 고민과 고충과 고통을 그대로 나눌 때
아무 비판없이 주님의 마음으로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꼭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시기와 욕심 ... ㅠ
그럼 나는 비정상입니다.
나: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싱글이었을 때 연애를 한 것 같습니까?
어느 자매: 예
나: 왜 그리 생각하나요?
그 자매: 그 이유는 그게 정상(normal)이기 때문입니다.
나: 그럼 저는 비정상(abnormal)입니다.
저는 한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습니다.
짝사랑은 해 보았어두요.
저에겐 지금 제 아내가 처음으로 연애해본 여자이며 마지막이랍니다.
(가정 세미나 인도하는 중에 ...)
그리스도인의 삶은 ...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다움에 일치하고자 하는
평생 노력입니다."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영광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영광이 아닙니다.
모방을 부추기지 않습니다. 눈에 뛰지도 않습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의 필수 과목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고난은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그리움
그립습니다.
그리움보다
그리움보다 책임감이 더 듭니다.
그저 좋은 것으로 만족하는 나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지만
니는 그것을 마다하고 그저 좋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금년 2019년 한 해를 영원히 과거로 보내기에 앞서 ...
금년을 시작하면서 저는 사랑하는 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무거운 슬픔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으로 인해 마음의 뭉클한 눈물이 고이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님께서는 저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And the God of all grace, who called you to his eternal glory in Christ,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will himself restore you and make you strong, firm and steadfast."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벧전 5:10).
그 때부터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자녀가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다시금 회복시켜주시되("온전하게 하시며")
그 자녀를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길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추수감사절이 가까운 시점에 사랑하는 딸을 대학교 기숙사에서 데리고 오면서
차 안에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하나님께서 자기를 "strong"(강하게)하게 하신다는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추수감사절 목요일 당일 날 가족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베드로전서 5장 10절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 저는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말하면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성취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성취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주님은 제 자녀에게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성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을 마무리하는 이 12월에
주님께서 저로 하여그 이모양 저모양으로 "죽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케 만드시고 계시지만 금년 1월처럼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무거운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넉넉히 감당케 하시는 은총을 누리면서
오히려 주님께 "순교의 선물"을 구하게 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영혼이 되길 기원합니다(계시록 6:9-11).
진리로 제 양심이 건강해져서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진리에 순종하는 마음에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A Hidden Life"라는 영화를 아내랑 본후 생긴 마음).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큰 고통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행복감의
훨씬 더 큼과 넓음과 깊음과 높음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오늘 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생긴 마음).
급속이 변하는 세상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급속히 변하는 세상을 이끌어야 하거만
왠지 이 세상의 변화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너무나 속히 변질시키고 있는 것 같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처럼
나도 내 이웃을 불쌍히 여기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주시길 간구합니다.
기계적인 관계?
기계적인 관계보다
유기체적인 관계가 훨씬 좋습니다.
딱딱한 일 이야기만 하는 만남보다
허심탄회하게 마음 문을 열고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만남이 훨씬 좋습니다.
기계적인 종교생활?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기계적인 것 같다.
생동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기도 기적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 응답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도 응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들?
성도님들은 목사님들이 변질되지 않길 위하여 기도하며
목사님들은 성도님들이 변화되길 기도하고 있는 듯...
기도 친구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때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기도 친구가 한 두명은 있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도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기도 허락?
약 93세나 되신 헨드릭스 목사님(장인 어르신과 40년 넘게 교제하신 분)께서
저에게 제 장인 어르신의 장례 예배 때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내가 그 기도문을 저에게 썼는데
저에게 허락(permission)을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No need to get permission from anybody. As the Lord speaks through him"
(아무에게서도 허락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분을 통해 말씀하시는데로).
기도에 관하여 …
상황에 이끌림을 받는 기도보다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서 기도 드려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마십시다 (눅 18:1).
포기하지 말고 끈기있게 믿음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면서도 왜 시험에 드는 것일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마 26:41).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시험에 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를 영 잘못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영 잘못 알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는 알고 행하는 문제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하시고(요 3:16)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시사(고전 15장)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입니다(롬 4:25).
그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그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 되야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통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기독교인은 ..
기독교인은
기도하는 사람들 입니다.
기본적인 것이라도 행해야 할텐데 …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현실을 뛰어 넘어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혜롭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나친 이상적인 사랑이나 지나친 현실적인 사랑은
이웃이게 덕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상적이던 현실적이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것을 지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것도 행하지 못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히 여겨지는 오늘입니다.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의 축복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정에 허락하시는
역경이나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쁨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기쁨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까 고민을 할 때 더 기쁨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에는 제일 기쁨니다.
기억력 감소
오십이 넘으니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기억력 감소다.
자꾸만 잊어버린다. 뒤돌아서면 방금 전에 말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내 주위에 가까운 오십대 친구들도 그렇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들에게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보다
그냥 우리의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될 수있는데로 전화기 구글 달력 같은데에
기억 날 때에 적자고 말했다.
기억하며 기도
나는 당신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내 마음에 각인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내가 각인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들려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
기적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우리의 눈이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분히 건져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으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벌써 기적입니다.
기적입니다.
하루 하루가 기적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로 여겨지는 것조차도 감사하게 됩니다.
차 사고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교회 집사님을 뵙고 왔습니다.
살아 계신 것만 봐도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기준을 낮추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관계된 업체들이 발전소의 안전 수치를 완화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이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도의 삶의 기준을 완화시켰고 지금도 완화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다시 성경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준을 낮추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인정하며 바라보며 소망하는 우리는
현재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사역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DEAN R. ULRICH, "FROM FAMINE TO FULLNESS:
THE GOSPEL ACCORDING TO RUTH"를 읽으면서)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때 해야 ...
그런 기회가 내일 또 온다는 보장이 없기에 ...
깊은 고통을 통해서도 아름다운 역사를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깊은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Living in the Light of Inextinguishable Hope"이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제임스 페커의 “하나님의 인도”란 책을 보면
깨달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는 깨달은 것을 신중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 포함합니다(폐커).
깨달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자신을 깨닫는 것,
자신의 연약함과 미련함과 한계와 죄 등을 깨닫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이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과 지혜와 무한하심과 죄사함 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깨어짐 (Brokenness)
가정의 어려움들이 하나씩 하나씩 물방울처럼 내릴 때
바위 같았던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이 조금씩 조금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참 많이 그리고 깊게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의 무기력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 때에서야 우리는 '약할 때 강함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진정으로 깊게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깨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깨지 말아야 합니다!
꾸밈이 없는 웃음이 좋습니다.
꾸밈 없이
마음 것
크게,
함께
웃어요.
꾸준히 해야 합니다.
어제 수요일 아침에 축구하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 공을 몰고 가다가 아무도 건딜지 안았는데
자기 혼자 스스로 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축구 시합을 마치고 그 사람에게 얼마 만에 이렇게 오늘 와서
축구를 했냐고 물었더니 1년 만에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왜 혼자 스스로 넘어졌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전에 몇개월 만에 다시 축구를 했는데
공을 몰고 가다가 마음은 저 앞을 뛰고 있었는데 제 몸이 따라주지 않아
그냥 저 혼자 스스로 넘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에게 이젠 다시 축구를 시작했으니 계속 뛰다보면
꽨찮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
어쩌면 그 이유는 규칙적으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봉사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교회도 잘 나가지 못하고 봉사도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규치적으로 꾸준히 교회를 나아가지 않고 봉사도 그리하지 않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기 위해선 말씀 묵상과 기도 생활 등을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꿈꾸는 공동체
주님 안에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교제가 충분히 가능한데 ... ㅠ
꿈만 같은 일이 ….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분명히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날이 옵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꿈만 같을 일일지라 할지라도
그의 뜻 가운데서 현실화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편).
99% 진리?
1%로의 '거짓말' 한 방울로
100% "진리"의 물을 흐려 놓는 사탄의 계략,
99% '진리'란 없습니다!
100%로 성경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참으로 달콤하게 들리는
설득력이 강한 사탄의 새빨간 거짓말은
성경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99% 성경 말씀에
1%로 추가되었던지
아니면 1%로 뺀 비성경적인 말이다.
100%로 성경적인 마인드가 없이는
다 속아 넘어갈 수 밖에 ...
100세 시대를 준비해야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이 미국에 100세 이상 된 분들이 약 12,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오래 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저는 그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갈렙'에 대하여 말씀한 내용 중 동의하고 공감하는 점
몇 가지를 적어 봅니다:
-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85세 때 헤브론을 정복, 모세는 80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광야에서 40년, 제 아버님은 82세이신데도 지금도 선교하고 계심)
- 주님의 일에는 결코 은퇴가 없습니다.
(비록 각자 일하고 있는데서는 은퇴가 있지만 은퇴한 후에도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은퇴가 없음)
-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갈렙은 40세 때나 85세 때에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힘이 있어서 전쟁을 할 수 있었음, 은퇴 없이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선 건강관리를 잘해야 함)
- 정신력이 강해야 합니다.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어르신들은 육신의 연약함도 극복하심)
-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기도하며 선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함.)
(조금 전 운전하면서 미국 기독교 라디오 방송에서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후)
2011년 말씀 집회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의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인내하게 하옵소서 용서하며 용납하게 하옵소서.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끝까지 신실하게 하옵소서.
일관성있게 섬기게 하옵소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옵소서.
2018년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
2018년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나는 다섯 분의 죽음이 생각난다.
고 김정희 사모님,
마지막으로 사모님과 대화를 나눴을 때
사모님은 아드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 김성천 목사님,
그분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목사님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였다.
고 토비 김 형제,
비록 15살이란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가 죽기 전 약 한달 전에 쓴 '하나님께 쓰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의 믿음에 놀랬다.
고 오덕겸 장로님,
나는 장인 어르신의 죽음을 통해서 산자보다 죽은자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좀 깨닫게 되었다.
그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 이다(요 15:12-14).
고 유정숙 권사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유권사님에게 들은 말씀은 내가 기도한 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했을 때 권사님도 "아멘"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한 해를 뒤돌아 볼 때 이 다섯분이 생각난다.
2018년 한해를 장례예배로 시작하여
장례예배로 마쳤음을 생각할 때
작년 2018년은
고 김정희 사모님의 장례예배(1월)로 시작해서
고 유정숙 권사님과 장인 어르신의 장례예배(12월)로 마쳤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일까?
성경 전도서 7장 2절 말씀이 생각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당신은?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만한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목숨을 버릴 만한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likes" 그러나 나는 'dislike'?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올린 사진에
"likes"을 누른다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dislike'을 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의미가) 있을까요?
부부 관계란
부부 관계란 상호보완적이 되야지 비교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