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상한  나눔 글​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렸던 구원보다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이 몰아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잃어버려야 할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그 잃음을 통해서 주님로부터 얻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큰 파도와 풍랑처럼 우리에게 몰아닥치는 큰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인정할 때에만이 전적으로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과 섞이지 않은 믿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의 큰 상처는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기회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시고자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죄 값을 대신 치를 때에 우리의 고난은 가벼워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고(빌립보서 1:29) 고난의 은혜를 누리고 싶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그 고난 가운데서도 축복을 누립니다.  그 누리는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나의 죄를 깨닫게 되고 그 범죄의 원인이 교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수만 있다 그 고난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배움이 없는 고난은 유익하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분명히 보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며 우리의 근심을 아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사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조금이나마 더 깊이 알게 된다면 그 고난은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겸손할 수 있다면 그 고난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못 자국난 손으로 내 마음이 빚어지길 원합니다.

 

고통의 축복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깨달음으로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예수 십자가에 고통과 죽으심을 바라보며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놀랍고 굉장한 구원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물댄 동산이 되어 하나님이 넘치는 사랑으로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많고 다양한 고난들을 접하므로 결국 그 고난 중에 오직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고난의 유익을 누릴 줄 아는 고난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전적 무기력함과 전적 무능력함을 경험하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구원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 탓을 하든 내가 고난을 통해서 내 탓을 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과거에도 건져 주신 신실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고난 속에서도 건져 주실뿐만 아니라 앞으로 장차 우리가 당면할 권한 속에서도 건져 주실 줄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통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8).

 

상황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더욱더 환하게 바라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두려운 상황이면 상황일수록 더욱더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의 마음 자세는 비록 상황은 변치 않았지만 마음이 변하여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나아가는 믿음(Faith)의 사람은 심히 두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운 느낌(Feeling)에 이끌림을 받기를 거부하고 사실(Fact)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갑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막고자 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사탄의 방법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삶 속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한꺼번에 몰려오게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지쳐 낭만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도와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혼손과 혼동을 주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기보다 담대하길 원합니다.  또한 저는 낙심하기보다 소망하길 원합니다.  나의 소망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소망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견디며 전진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만 영원히 선다는 것입니다(시편 33:11). 그리고 주님께서는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으십니다(욥기 42:2). 비록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고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오직 여호와의 뜻만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잠언 16:9, 19:21).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시행하십니다(이사야 46:11).

 

현재의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과거의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할 때 연약해졌던 제 마음과 심령이 다시금 소송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금 힘을 얻게 됩니다. 기억하고 기념할 때 저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후에 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는 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후에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할 위험이 많을뿐만 아니라 사람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문제를 회피하든지 도피할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사역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너무나 일하기에 분주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좀 복잡한 생활 환경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나 홀로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 멈추고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잠언 24:16). 그 이유는 우리가 탈진하여 쓰러져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어나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오뚝이와 같습니다. 쓰러졌다가도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사 우뚝 서는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떤 일로 두려움과 낙망 속에서 외로워하며 육신적으로 지쳐 쓰러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육체적 안식과 더불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다시금 재충전 받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전심 전력하십시다. 승리!

 

재물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함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는 재물보다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 세상보다 세속화된 세상적인 교회입니다.

 

사탄은 우리도 하여금 이 세상에 무거운 짐을지게 하므로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바로 불만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에게 하는 불평과 원망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불신이요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불만과 불평과 불신과 불순종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 가운데 거하게 할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 지도자로 하여금 영적 침체에 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처럼 탐욕을 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죄의 짐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이시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이사야 68:1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짐을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베드로전서 5:7).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쉬게하실 것입니다(마태복음 11:28).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쉼을 주실 것입니다(29절).  주님께서는 우리의 낙망한 영혼을 다시금 소성케 하실 것입니다(시편 19:7).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현재 삶 속에 고통과 역경으로 인하여 우리의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마음이 참담할 때 우리는 과거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현재 어떠한 힘든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지라도 과거의 상황이 현재의 상황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념해야 합니다.  과거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셔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현재 우리가 당면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반드시 건져주실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우리 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사탄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 마음(잠언 4:23)의 보호막과 같은 담과 울타리를 흔들어 놓고 심지어 넘어트리려고 부지런히 애를 쓰고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공격하여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하며 우울케 하며 심지어 절망케까지 하려고 부지런히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시편 62:8).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을 토해야 합니다(8절).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갈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이 짓눌려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들을 기억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과거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하나님께서 또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사 우리의 절망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서 소망을 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 중 하나는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회개한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억지도 아니하시므로 우리 또한 기억하지 말아야하는데 자꾸만 잊지 못하고 거듭 생각하며 또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과거에 우리 삶 속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 속에서 복음 성가 "약할 때 강함주시네"라는 찬양을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이런 저런 일들로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할 때 저는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의 강하신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저는 약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들의 강하여 지는 속사람의 모습을 엿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근심된 일이 많고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죄악된 일도 많고 죽을 일도 쌓였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은 마치 가시덤불과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일들로 엉키고 엉켜서 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애통함을 어느 누구에도 쏟아낼 때도 없는 외로움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 다윗처럼 우리의 심정을 기도로 하는게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내되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됩니다.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사람은 나를 미워하고 나를 괴롭힙니다. 왜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라도 좀 알면 좋겠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 사람은 나를 미워하며 나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모아 나에 대하여 말을 만들어 나를 비방하며 모함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하여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며 심지어 그들을 그들은 나를 위기에 몰아넣으려고까지 합니다. 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괴롭고 힘듭니다. 나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이렇게 내 영혼이 억울할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57:1).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2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실 줄 믿어야 합니다(3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된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송을 해야 합니다(7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높이 들리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5, 11절).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을 믿는 신앙인은 모든 결과를 떠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의지하기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능력입니다. 상황에 근거한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지간에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동서남북 다 돌아보아도 문제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 막막하게 여겨져서 그저 멍하니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사방이 다 벽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제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성경책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새벽 기도회 때 기도하면서 교회 사역이나 가정 사역이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곤 합니다. 그리할 때 제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게 하십니다. 그때 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선포하며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그때 제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는 믿음에 조금이나마 더 견고히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인내하며 견디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매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일 수가 없습니다(디모데후서 2:9).

 

비록 우리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고 또한 성취하시고 완성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또한 그 일을 주님께서 이루실 줄을 믿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이 힘들면 힘들수록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형통한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싶습니다.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두려운 상황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회개를 해야한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있는데 마음으로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애통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며 임마누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기쁨과 승리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지배를 받기보다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아야하며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기보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큰 위기 가운데서도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십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바른 생각, 즉 성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할 위험이 많기 때문에 더욱더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성경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죄를 회개만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침체된 영혼을 소성(restore)시키시며 부흥(revive)시키십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가 궁핍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기회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달을 수도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이적을 구하기보다 우리의 죄를 깨달아 하나님께 우리의 죄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힘들고, 제일 괴롭고, 마음이 너무 아플 때 우리 마음을 더욱더 괴롭게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진정으로 우리의 힘듦과 괴로움과 아픔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욱더 괴로운 것은 주위에 우리를 사랑해 주고 우리를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도 진정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이 될 때에야 참된 위로와 치유가 일어납니다.

 

절망이란 주님을 갈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결국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주님만 바라보며 소망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믿던 모든 것이 다 끊어질 때에 그 때야 비로서 우리는 더욱더 주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절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더욱더 가득 채워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위로의 성령님께서 살아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불만족 속에서 원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내는 것은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탐욕은 우리의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통해서라도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자족해야 합니다(빌립보서 4:11-12).

 

주님은 우리가 교만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사 우리를 막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한 자로 우리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주신 참 떡이시요(요한복음 6:32)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35절)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고(사무엘상 7:12) 지금도 도와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시편 121).  그리고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마태복음 1:23)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출애굽기 34:9).

 

우리는 생활의 염려로 우리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누가복음 21:34).  만일 우리 마음이 둔하여지면 우리는 영적 민감함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을 수 없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살기보다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마태복음 13: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영생)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로마서 8:32)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까지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입을 것을 안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아시고 공급해 주시기가 전혀 힘들지 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프면서 아프다고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두려움과 아픔과 고통을 앉고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나누지 못하고 전정 긍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나눔을 가질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우리의 고통을 나눠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우리의 고통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덮어 놓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도시를 좋아하지 광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 많아 보이는 도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외로운 광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광야에서 들춰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주님께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주님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게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그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므로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영혼들을 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체휼하시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귀로 그들의 신음소리조차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마음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하게 하시사 우리를 위로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위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요 또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경험하였고 또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구원의 소망을 현실화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위기 가운데 빛을 발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답변(말씀)에 순종할 자세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5:29).  비록 사람들의 말이 우리의 이성으로 타당성이 있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큰 위험 부담을 우리에게 준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여쭙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환난이란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복음 확장의 기회요, 지도자를 세우는 기회예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기회요, 또한 교회를 세우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에서 건져 주시길 기도하며 기대하기보다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길 기도하며 기대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히 함께 가시는 것이(출애굽기 33:15) 시련에서 건짐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이사야 30:15)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욥기 42:4).

 

우리 하나님은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예레미야 31:13).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여 우리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3절).  기쁨을 얻게 하시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춤추며 즐겁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3절).  춤추며 즐겁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죄의 기쁨과 구원의 기쁨과 회복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물댄 동산 같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시금 우리에게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앙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빌립보서 1:29)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고 누릴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우리들은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값옷을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선한 일을 하면서 우리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잠깐 고난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튼튼하게 세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소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절망케 하는 이 세상에서도 소망 중에 즐거하며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며 그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 소망되신 주님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인내하며 견디며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희망과 용기로 말미암아 다시금 오뚝이처럼 일어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내일 일은 모르지만 하루하루 소망되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위로와 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낙심되고 우울할 때, 염려와 걱정 속에서 허덕일 때에 소망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병든 마음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제임스 김, "마음이 상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