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면,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의존하게 것입니다.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게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춤추시는 하나님”) ["As we make God the center of our lives, our sense of who we are will depend less on what others think of us or say about us. We will cease being prisoners of the interpersonal"(Henry Nowen,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

 

 

 

          제가2009년 7월 29일에 개인 네이버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늘에서야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제 자신의 부족한 생각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전부터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들의 글들을 보면서 그 때 그 때 드는 생각들을 적어보려고 했지만 미루다가 오늘 한 지체의 이 메일을 받고 도전을 받아 이렇게 ‘인간관계’ 폴더를 열어보았습니다.  그저 부족한 저의 생각을 적어보면서 그 때 그 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길 원합니다.  제가 제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못하고 제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앞설 수 있기에 여러분들의 리플을 환영합니다.  함께 나누는 가운데 서로에게 지혜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제임스 목사.”  그런 후 저는 같은 날에 2009년 7월 28일에 이미 썼었던 “관계의 우선순위”란 제목 아래의 글을 그 “인관관계” 폴더(folder)에 올렸습니다: “관계에는 우선순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우선순위에 놓고 그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살아간다면 결코 올바른 이웃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달리 우리 각자 자신에게 적용 질문을 해 본다면 우리가 만일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크리스천들은 분명히 이웃과의 관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믿는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격을 때가 많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웃 사랑에서의 어려움들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어려움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두텁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들이나 상처나 아픔들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시는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싸매어 주심과 치유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 등을 깨닫게 되는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인간관계를 하나님께 맞길 수 있는 기도의 기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조차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도우심과 사랑과 지혜 등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주관하시는 이웃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 속으로 흘러가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9년 7월28일, 보이는 인간관계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더 초점을 맞추면서).” 

 

          그런데 어제 금요일(2023년 12월 29일) 사랑하는 제 아내가 사랑하는 친구 익순(Albert)이의 장례 예배 등에 집중하여 이런 저런 일을 준비하고 있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일-지향적(work-oriented)이지 않고 사람-지향적(people-oriented)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은 뭔가에 한번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을 잘 보지 못하고 일을 추진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힘을 들여) 끌고 가는 것(drag) 같습니다.’  몸이 좀 아픈 제 아내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한 후 ‘아무래도 우리가 일-지향적이면서 사람-지향적일 수 있다는 것은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지금 제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 익순이의 유가족(특히 그의 아내)을 돕고자하는 마음을 주신대로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는 과정에 있어서 아내가 말한대로 일-지향과 사람-지향의 균형(balance)을 잃어버린 것을 부인(deny)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변명(excuse)은 ‘사랑하는 친구의 장례식에 다음 주 토요일로 다가왔기에 나는 준비 과정에 해야 할 일들을 제 가정 사역과 목회 사역과 인터넷 사역을 감당하면서 하려다보니 이렇게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내랑 대화를 한 후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헨리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란 책을 그 전날 밤에 이어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이 문구에 관심을 다시금 갖게 되었습니다: “As we make God the center of our lives, our sense of who we are will depend less on what others think of us or say about us. We will cease being prisoners of the interpersonal"(나우웬).  이 문구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면,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덜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토요일 이 새벽에 이 문구 중심으로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글을 좀 적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라고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는 저는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했는데 실제로는 아직도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그런 생각의 근거는 제 자신부터 해서 제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그 정도로 우리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의지해야 하는 것인가요?  우리의 존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생각과 다른 사랑의 하나님의 생각은 모래 사장의 모래알보다 더 많을 정도로 셀 수가 없고(참고: 시139:17-18; 사55: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사43:4)라는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그리도 민감한 것인가요?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하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정도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 가치보다 낮은 것입니까?  그게 아니잖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더 중요하잖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만큼 지금 우리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고 싶다고 기도하고 또한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한 감각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대인관계의 갇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던지고 던졌을 때 “대인관계의 갇힘”이란 헨리 나우웬의 말 중에 “갇힘”이란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제가 어제 금요일 이미 묵상하고 적은 짧은 묵상의 글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인터넷 공간에 나눈 짧은 말씀 묵상 글들이 생각나서 제 네이버 블로그에서 그 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이 보기에 갇힌바 된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 앞에서 애굽 왕

바로가 보기에 갇힌바 되었고(출14:3), 다윗도 그일라에서 이스라엘 왕

사울이 보기에 갇힌바 되었습니다(삼상23:7).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건지심)의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더욱더 구원의 하나님을 믿게 만드시고자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삶을 뒤돌아볼 때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와 기대대로 저를 지름길로

인도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멀리 돌려 인도해주셨고(출 13:17-18),

또한 제가 아무리 동서남북을 보아도 문제 해결점이 안보이는 갇힌바된

상황으로 인도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14:3).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

인도하셨을까 생각해 볼 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길 원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13-14절).”

 

“갇힌 바된 나, 동서남북을 아무리 보아도 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낙심이 되고 심지어 절망스럽기만 하다.  원망하고 싶다.  자포자기하고 싶다.

갇힌 바된 나, 비록 동서남북을 보아도, 비록 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주님을 갈망하며,

나는 주님 안에서 소망을 품는다.  그 이유는 나는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이기 떄문이다(슥9:12).  그러므로 나는 감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상황 안에 갇힌 자는(출14:3) 환경에 지배를 받아 두려워하며

원망합니다(10-12절).  그러나 진리 안에 갇힌 자는 말씀의 지배를 받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합니다(13-14절, 시 43:5).”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들을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십니다(시 68:6).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서 이끌어 내사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므로

그의 가족과 후손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보존하셨습니다(창39:20ff.).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 바된 상황에서

이끌어 내사 애굽 군대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출 14:3 f2f.).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사 그로 하여금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행 16장).”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금 묵상할 때 우리가 우리 삶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못한 결과로 “대인관계의 갇힘”에 처해있을 때 먼저 우리는 그 갇힘에 숨겨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들을 믿음의 눈과 말씀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그 갇힘이 현실적으로 볼 때에 숨막힐 정도로 답답하여 대인관계 기피증까지 들정도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한 믿음으로 그 갇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이루시사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특히 새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1절 가사처럼 우리는 대인관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이 보기에 갇힌바 된 상황으로 인도하시는지 창세기 39장 20절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나, 출애굽기 14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나, 사무엘상 23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윗의 경우나, 사도행전 16장 23절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의 경우 등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시사 우리의 그 “대인관계의 갇힘”을 보는 시야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때만이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대인관계의 감힘”을 보게 되므로 그 갇힘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며 소망 가운데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대인관계의 갇힘 속에서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축복들을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음으로 겸손히 그 축복들을 부분적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축복들 중에 하나는 우리가 대인관계에 갇힌바 되었을 때 그 현실적인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케 만드는 것이며 또한 더욱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그 말씀을 우리 마음 판(심비)에 더욱더 깊이 적어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붙잡게 하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그 약속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붙잡아주므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 갇힌바 된 상황을 견뎌내며 마침내 승리케 하십니다.  승리케 하시되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대인관계의 갇힘 속에서 벗어나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케 하시므로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