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고통 ...

 

사랑하는 아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 그 고통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하였습니다(치유).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린 응답이 없었을 때

저는 고통 중에 있는 아기를 계속 보면서

하나님께 그 고통에서 자유를 누리게 해주시길 기도하였습니다

(죽음 -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버려야할 것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언제간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모아두었건만,

아낀들 뭐하랴!

 

 

아내 같았으면 ...

 

 

조금전 막둥이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등이 좀 간지럽기에 등좀 긁어달라고 했더니

'징그럽다'고 하면서 마지못해 살며지

(간지럽게) 긁어줬음.

아내 같았으면 확실히 긁어 줬을텐데 ...

 

아내 사랑

 

 

"우리가 배우자의 시각을 고치려고 서두를 때는 상대의 고통에 동감하기보다

오히려 옳고 그름에 더 관삼이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아내와 대화할 때 여유를 갖고 듣자(서두르게 해결 제시를 하지 말자).

아내의 감정에 먼저 공감하자(아내의 입장에 듣고 아내의 고통에 동감하자).

그런 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는 성경 말씀을 나누자(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주자). 

 

 

 

아내

 

 

아내(helper)는

큰 도움(help)이 되지만

또한

큰 해(harm)와 깊은 상처(hurt)를 줄 수도 있습니다.

 

 

 

아내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

내가 아내와 자녀들과 가정을 위해서 행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보다

아내가 나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가정을 위해서 행한 일들을 기억하고 고마워 해야 겠다.

 

아내와 어머니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요?

 

 

만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에게 '나와 당신의 어머님,

둘 중에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어머님을 택하겠습니까?

실제로 제가 아는 형제님은 아내로부터 그 질문을 받고 어머님을 택하므로

결국 부부가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먼저 생각되는 점은 남편으로서 내 아내와 내 어머니/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중가운데 역할을 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로서 내 남편과 내 어머니/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마찬가지구요).

또 한가지 생각되는 점은

성경에서는 내 배우자에게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부부가 주님 안에서 한몸이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적용할 때

부부 관계가 우선순위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가 부모님이나 우리 자녀들은 제 3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의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가는? ㅎㅎ

 

 

웃기다. ㅎㅎ

오늘 선배 목사님 세 분을 만나서 내가 그 분들에게 어제 제 아내가 저에게

'당신,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말했을 때

(아내가 나에게 그리 말한 이유의 배경은 나누기가 좀 곤란함 ㅋㅋ)

제가 아무 말 안하고, 하고 싶은 말 참았다고 말씀드리니까

세 분다 저에게 '잘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ㅎㅎㅎ

세 분다 경험이 나보다 훨씬 풍부하신 것 같아 보였다 ㅋㅋㅋ

만일 아내가 하고 싶은 말 하라고 했다고

우리 남편들이 그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아내하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어떻게 될까요? ㅎㅎㅎ

“아니오”라고 거절할 줄 아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오"면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절해야 할 때는 거절해야 하는데,

"아니오"라고 용기를 내서 담대하게 말하지 않는 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 결과 나는 먼저 하나님께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까지도 죄를 범하도록 방관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의 말보다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서

그 말씀에 이끌림을 받고 싶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할 때에

"아니오"라고 지혜롭게 그러면서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아들 딜런과 대화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겸손한 예배자로 세움 받아

참된 예배자의 삶을 사는 가운데서

봉사와 섬김과 전도, 선교 및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 딜런과 함께 차 안에서 대화를 한 후]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

사명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인도 나가랜드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평생 중국에서 살면서 선교하겠다고 헌신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삶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 순간적인 것들과

심지어 자신의 짧은 인생을 버리면서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용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와

그 진심어린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참 아름답습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과 화목과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매들 ...

 

 

겸손한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

 

 

위로 받기 보다

위로 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이끌림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아름답습니다.

 

 

"아버지"

 

 

오늘 양로병원에 계신 교회 권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함께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나무 이야기도 하고 푸른 하늘에 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그러시다가 권사님께서 권사님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딸도 권사님처럼 연세가 많아 양로병원에 있을 때 나를 기억하겠지 ...'

아직도 멀었나 보다.

 

 

껄끄러운 일을 보면 피하고 싶다.

엮기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엮겨보았자 그 일을 작정하고 벌리는 사람(들)과

섞이는 자체가 싫다.

누군가 그 껄끄러운 일을 알아서 하겠지란 생각이다.

나 자신이 비겁한 침묵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찌하나.

나는 매끄러운 일을 좋은 것을,

다툼이 싫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은 것을.

아직도 멀었나 보다.

 

 

 

 

악한 교회 지도자들?

 

 

죄는 자기가 범해놓고서

그 죄가 들춰지니까

그 죄를 덮으려고

죄 없는 피해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악한 사람들,

그런 악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는 이 현실 ...

ㅠㅠ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어쩌면 그 지체가 "악해서" 그렇게 행했다기 보다

그 지체가 "약해서" 그리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해서'라는 말보다 '약해서'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입니다.

 

 

오늘 대학교 후배의 어머님의 장례식에 갔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유가족 분들은 관 옆에 서 계시고

조문객들이 줄을 서서 고인의 관쪽으로 걸어가면서 유가족 식구 분들께 위로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 대학 후배의 대학 룸메이트였던 자매와 함께 줄을 서서

유가족 식구분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어머님을 떠난 보낸 그 후배는 많이 울고 있었습니다. ㅠ

저에게 울면서 "감사합니다 목사님"하는 후배에게

저는 힘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악수하였습니다.

나중에 식당에서 그 후배의 대학 룸메이트들과 식사하면서

그 후배와 대화하면서 알게된 것은

그래도 그 자매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중환자실에서 누워계신 어머님께 마음의 고백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 얘길 듣고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잘했다고 격려했습니다.

 

오늘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점은

사랑하는 분을 떠나보내기 전에 마음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입니다

알게 되는 것도 ...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도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양심은 더욱더 깨끗해지므로

양심에 거리끼는 언행을 삼가할 수 밖에 ...

 

 

 

알면서도 못하고 있으니 …

 

 

불평하지 말고 감사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

 

비판하지 말고 허물을 덮어 줘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들이 ...

 

남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입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

알아야 안심하는 성격의 사람?

 

 

알아야 안심하는 성격의 사람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 터지면

놀라며 불안해 합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그 상황이

자신의 컨트롤 밖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암이란 하나님의 초청장?

 

 

저는 "암"(cancer)이란 '하나님의 초청장(God's invita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암은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초청장이요(시편 143:8)

또한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구원의 사랑을 좀 더 깊이, 넓게, 많이, 높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청장이라 생각합니다(63:3; 엡 3:19).

 

 

 

약속들을 …

 

 

약속들을 잘 지키고 싶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싶습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양가 부모님을 통해 입는 상처?

 

 

자라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 온전히 치유가 되지 않았는데

결혼 후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를 통해

또는 장모님이나 장인을 통해

그 상처가 다시 생각날 뿐 아니라

그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더해 질 수가 있습니다.

 

 

 

양심 마비 경계

 

 

우리는 우리 양심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양심을 팔지 않는 친구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도,

양심을 팔아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친구는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쳐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내"가 더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데 … ㅠ

 

 

만일 우리 목사들이

구속사적 해석(Redemptive-historical interpretation)과

그리스도 중심된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정의 부부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Christ-like life)이 결핍되어

아내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 영광을 받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느 목사님이 더 낫습니까?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 보다

설교한 대로 잘 사는 목사님이 더 낫습니다.

 

 

 

어느 설교가 더 잘 들리고 있나요?

 

 

나의 죄를 책망하는 설교보다

나의 죄를 덮어주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설교가

나의 귀에 더 잘들리고 있다는 것은 ...?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낫습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속해 있나요?

 

 

맞혀가는 공동체보다

맞는 공동체가 좋은데 ...

 

 

 

 

 

어떠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한다는 느낌보다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느낌을 주는 책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됩니다.

 

어떻게 이혼의 고비를 넘길 수 있을까요?

 

 

꾹꾹 참고 참다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이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할 때에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을까요?

 

 

 

어리석도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도 별다를 바가 없는데,

왜 아닌 것처럼

나는 자꾸만 덩달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어리석도다.

 

 

 

어머니의 과잉 사랑의 쇠사슬?

 

 

과잉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다는 명목아래

자녀에게 큰 부담을 주는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대와 요구는

그 자녀로 하여금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장애를 가지고와 어머니의 과잉 사랑의 쇠사슬에 매여

평생 고생하며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이시기에 ...

 

 

형제/자매는 용서를 못해도

어머니는 용서를 하십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방법도 …

 

 

어쩌면 사랑하는 방법은 상대방을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것일 수도. . .

그를 비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배려하지 않은 내 입장에서의 충고도

(아무리 사랑으로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할지라도 ) 삼가해야 하는지도. . .

 

 

어쩌면 우리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잘 안맞아서 그럴 수도 ...?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시고자 우리를 궁핍한 "광야"에서 오랫동안 훈련시키시고 들춰지는 죄의 결과로도 우리를 고통 중에 단련시키시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통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억울함

 

 

우리 안에 있는 억울함(분개)(Resentment)은 위험하다.

특히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는 분개는 참으로 위험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않좋은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문제가 우리 자신임을 계속 부인하면서

우리의 억울함만 호소하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억제해 주시는 은혜?

 

 

우리가 은혜로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의 죄악된 옛 본능을 억제해 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답시고

그 성경 말씀을 억지로 풀어서(벧후 3:16)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을 볼 때

성경을 보는 틀(frame)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틀은 바른 교훈(sound doctrine)으로서

제 개인적으로는 개혁신학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틀안에 박혀 있는 것도 위험할 수 있지만(하나님의 계시에 열려있지 않는 상태)

그 틀밖에서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괴로울까

 

 

나중에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다.

알면서도 안되는 자신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까.

 

 

엉엉 울 필요가 있습니다.

 

 

꿈 속에서라도 그리운 사랑하는 고인을 뵙고

좀 엉엉 ,엉엉 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나 힘든 세상에 살아가면서 적어도 주일 하루 예배 드리는 한시간 만이라도

위로의 설교, 긍정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어느 한 성도님의 솔직한 고백,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안전한 설교"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도님은 그 "안전한 설교"(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전한 설교는 "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

목사님은 이러한 "위험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던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유있는 마음, 단순한 생각?

 

 

마음에 여유가 없는데

생각까지 복잡하면

마음이 조급해 질 수가 있고

생각에 혼란이 오기가 쉬운 듯 ...

 

 

 

여행에 관한 우리 부부의 차이

 

 

아내하고 저는 다른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아내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자라 나면서 장인 어르신이 식구를 데리고

여행을 종종 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변명은 가난한 목사님의 가정에서 자라나서

돈이 없어 여행을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이 다른점 때문에

많이 다퉜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합의점을 찾은게

아내가 여행 계획을 다 세우면

(물론 아내는 저에게 다 상의를 함)

저는 운전을 합니다 ㅋㅋ

아내의 입장에서는

제가 여행 계획을 다 세우고 등등 해서

자기를 데리고 가길 원할텐데 ...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오겠죠? 하하

역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정에 허락하시는 역경이나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만이 간절히 이뤄지길 원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오직 말씀으로!

 

 

역시 오직 말씀으로 ...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자.

 

 

 

열매보다 뿌리로 인하여

 

 

나무의 풍성한 열매들로 인하여 만족하며 즐거워하기 보다

나무의 뿌리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열매보다 뿌리를

 

우리는 보이는 가정의 열매들과 나무와 줄기(외면)에 신경 쓰기 보다

보이지 않는 가정의 뿌리(내면)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영생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영생을 그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 (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영생이란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2)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도 의미하지만

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에 우리가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17:3) 나누는 가운데 주시는 내세의 축복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이 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성령님의 성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현재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의 축복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마나 맛보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의 축복은 평안입니다. 

비록 평화가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부분적으로마나 영생의 축복인 하나님의 평강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설상 그 헤어짐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잠시 헤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할 것을 소망합니다.

 

 

영적 그레질

 

 

한옥을 지을때에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바로 주추를 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추란 기둥 밑에 괴는 돌을 의미합니다. 

그 주추를 다 놓으면 그 때서야 기둥을 세우는데 바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는 주는 일(창방)을 하며 집을 세워갑니다. 

그런데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울 때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레질(그렝이 공법)입니다. 

여기서 그레질이란 주춧돌은 보통 자연석을 쓰다 보니까 아무리 넓고 평평한 돌을 골랐다 해도 기둥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기에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주춧돌의 면과 기둥의 면이 잘 맞아 떨어지도록 하는 선 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레질입니다.  그레질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주춧돌에 맞게 깍고 갈아 내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깍고 다듬어 주추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준은 기둥이 아니라 항상 주춧돌입니다. 

그리고 이 그레질을 잘 하면 잘 할 수록 집은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세워집니다(인터넷).

저는 영적 그레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 적 그레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마7:24).   다시 말하면, 영적 그레질이란 우리가 그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1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준이 기둥이 아니라 주초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준은 바로 주님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초가 기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둥이 주초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근육 발달

 

 

내가 약 14년 동안 일주일에 3번씩 가는 YMCA가

얼마전에 리모델링을 하면서 새로운 운동 기구를 갔다 놓았다. 

나는 그 새 운동 기구를 사용하다보니 여탯것 근육 발달이 안되었던 부분이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근육이 골고루 균형있게 발달되기 위해서 잠시 겪어야 할 통증이란 것이다.

영적 근육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골고루 주시는 말씀을 편식하지 말고 다 잘 먹고 지켜 행하므로

내 영적 근육을 균형있게 성장시켜야 하겠다. 

듣기 좋은 말씀이든 듣기 좀 부담이 되는 말씀이든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고 계시니 겸손히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로 잘 받아 먹자. 

비록 그 과정에는 성장 통증(고통)이 있다할지라도 ...

 

 

영적 매력을 느낌니다.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

그 말씀을 알고 배우고 싶어 열심을 내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몸부림 치는 모습,

신실하게 일관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

그 모습을 사랑하는 지체들에게서 볼 때

저는 영적 매력을 느낌니다.

 

 

영적 산소 호흡기?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산소 호흡기를 떼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적 우월감과 열등감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영적 우월감을 갖기가 쉽고

타인의 공로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갖기가 쉽습니다.

 

 

 

영적 차이

 

 

부부 관계에 있어서

영적 차이는 위기를 가져옵니다.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와의 부부 관계보다

왠지 둘 다다 믿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신앙관이 다를 때 오는

부부 갈등은 부부 관계에 있어서 더 치명적인 것 같습니다.

 

 

 

영적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

성격 차이보다 영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면 …?

 

 

교회에 어르신들을 보면

수술 후에든지, 연세가 많으셔서든지,

어느 순간부터 입맛이 없으셔서

식사를 잘 못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 살이 빠지시고 몸이 더 허약해 지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져서

전 처럼 성경책을 가까이 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면 성경의 맛을 잃습니다.

 

 

 

 

 

영혼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데 ...

 

 

교회의 리더쉽이

영혼을 키우는 일을 뒷전에 놓고

비즈니스와 소비자 중심 모델을 따르면서

교회의 수적 및 재정적 자립을 보장해 주는 방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유진 피커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예민, 고민, 민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에

내가 예민할 때 마음에 고민이 생기지만

그 고민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민감해지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 죄가 들춰졌을 때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 낙심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기억하고)

믿음으로 겸손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는

낙심한 내 영혼이 소성케 되고 소망을 품게 됩니다.

 

(Iain M. Duguid의 "Jesus in the Old Testament"을 읽으면서

오늘 아침에 네이버 블로그의 댓글을 통해 어느 지체로부터 받은 교훈을 생각하면서)

 

 

 

 

 

 

“예수”라는 우상?

 

 

지금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예수"는

결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예측불허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더욱더 의지해야 ...

 

 

 

오늘 배운 교훈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흔들림이 없이

해 나아가야 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선물 주님 안에서 즐기자.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 주님 안에서 즐기자.

특히 "시편 말씀 묵상집"을 수정하는 일,

어제 밤까지 67 pages까지 했는데 오늘 밤까지 시간이 되는데로 열심히 해서

711 pages 끝까지 다는 못한다 할찌라도 하는데 까지 즐기면서 하자.

될 수 있는데로 빨리해서 마지막 수정본을 다시 이 메일로 원했던 지체들에게 보내자!

 

 

오늘 하루

 

 

오늘 하루가 당연히 있는 하루도 아니요

당연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하루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겸손히 받아 누리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를 뒤돌아 볼 때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하루의 첫시간인 새벽기도회 때와 조금 전에 하루를 마치면서 읽은 성경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 영혼을 기쁘게 하시고 감사케 하셨으며 또한 소생케 하셨습니다.

(동역자들과의 만남과 중환자실에서의 만남과 양로원과 식당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 "덕분에" 행복합니다!

 

 

"때문에"란 말보다 "덕분에"란 말을 사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때문에"란 말은 불만족 속에서 불평과 원망을 표출하지만

"덕분에"란 말은 만족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당신 "덕분에" 행복합니다!

 

 

오늘의 만남이 ...

 

 

오늘의 만남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 있기에 ...

 

 

오래된 친구들

 

 

오래된 친구들이 좋다.

3-40년이 되어가는 친구들,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웃었다.

웃을 일이 있어서 웃었다기 보다

지난 날의 추억들을 얘기하면서

함께 웃었다.

 

오직 주님만이

 

 

짧은 인생,

긴 고통,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

주님만 바라보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지는 선교여행 되길 …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지는 선교여행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그들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귀로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입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게 하옵소서.

 

 

오해받는 목사, 이해하는 주님의 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목사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D. A. 카슨,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를 읽으면서)